왕관의 보석 (8)
런던, 왕립 베어링 은행.
척 보기에도 상당히 고가로 보이는 명화들, 그리고 값비싼 인도산 가죽과 북해 노르웨이산 목재로 만든 가구들로 장식된 총재실 안에는 두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꽤 높아 보이는 쉰 즈음의 나이를 가진 남자, 그리고 그를 보필하는 듯 비서로 보이는 남자.
나이가 든 남자는 금테로 만든 안경을 쓴 채, 비서가 전해준 서류를 눈으로 읽어 내려가다가, 고개를 돌려 비서를 향해 물었다.
“···해당 법인 이름이 뭐라고 했나?”
“예, 총재님. 프라이스 세무회계법인입니다. 창립자는···.”
총재, 프랜시스 베어링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 됐네. 창립자든 뭐든 그 작자는 그냥 바지사장이겠지. 내가 말하는 건 이 작자 뒤에 뭐가 있냐는 걸세.”
“그, 그것이 한참 정보 수집 중이라...”
“···쯧.”
프랜시스 베어링은 불만족스럽다는 듯,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짓을 한 놈. 보통내기가 아니야. 내 살면서 이토록 정교하고 세련되게 테러를 가하는 놈은 처음 봤네.”
“···그, 그렇습니까?”
“자네는 이 장난질이 안 보이나?”
“모, 모르겠습니다. 총재님.”
이런 놈이 내 비서라니. 총재는 다시 한 번 혀를 차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총재님!”
“···됐네.”
베어링은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고 있음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서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이것 봐라.
“예술이야. 예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마음 같아서는 내 아들놈이 보고 배웠으면 좋겠구만!!”
일평생을 이 돈놀이 쪽에 바친 한 사람으로서, 이 얼굴 모를 의문의 금융가가 장난질을 친 서류를 볼 때마다 프랜시스 베어링은 흥미가 동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이런 실력을 가진 놈이라면 적어도 시티 오브 런던에 즐비한 금융사 중 한 곳에서 떵떵거리고 있을 텐데, 여태껏 재야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
아, 이놈보다 실력은 떨어지는데 입에 기름칠 좀 했다고 시티 오브 런던에 사무실을 차리는 놈들이 한 둘인가.
두 번째는 이 자식이 대체 무슨 악감정이 있기에, 동인도 회사를, 그러니까 베어링 자신의 뒤통수를 크리켓 방망이로 후려쳤는지.
피트가 움직였다는 건 확실한데, 그렇다면 여태껏 재야에 있었다면 공무원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이렇게 법망을 유유히 도망가는 놈이 공무원을 한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지경이다.
베어링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이보게.”
“예, 총재님.”
“근 3년 사이에 동인도 회사에서 체결한 계약을 모두 가져와주게. 내 한 번 확인해봐야겠어.”
이놈에게 얻어맞은 동인도 회사 장부를 샅샅이 살펴보면 이놈에게 연결되는 한 가닥 실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터.
***
옛날 옛적, 고구려의 왕은 고주몽의 ‘고 씨’지만 5개의 명문가가 왕을 보필하며 국정을 맡아 다스리는 일을 했다.
그런 것처럼 이 칙칙하고 짜디 짠 비린내가 진동하는 섬나라 영국 또한 현 왕가인 하노버 왕가가 들어선 이후로 여러 명문가들이 등장해 나라를 이끌어 가는 기둥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호 통재라!!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기둥 중 하나였던 웰즐리 가문은, 선대 가주였던 가렛 콜리 웰즐리(Garret Colley Wesley)의 방탕한 생활과 투자 실패로 인하여 대대로 물려주던 영지마저 팔아버릴 정도로 가세가 기울고 말았으니.
충의지사의 가문인 웰즐리 가문이 이토록 무너져가는 걸 보는 모든 이가 한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웰즐리 가문의 현 당주이자, 현직 인도감시위원회 최고위원 중 한 명인 모닝턴 백작 리처드 콜리 웰즐리는 자신의 가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 만은 없었다.
결국 충의지사의 후예인 리처드 웰즐리는 쓰러져가는 가세를 일으키기로 굳게 다짐하고, 현직 수상이자 재무부 장관인 윌리엄 피트의 허락 아래에 상당한 양의 돈을 특별히 대출 받아 전망이 좋은 한 세무회계법인에게 기탁하기로 했다.
바로 런던 리버사이드 7번가에 사무실을 펴 놓은 프라이스 세무회계법인이었다.
우연찮게도 프랑스의 전직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또한 비슷한 시기에 자기가 소유한 기업의 원활한 영국 현지 정착을 위해 해당 세무회계법인에게 업무 용역을 맡기고 투자했으니 역시 잘나가는 사람들의 눈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아주 우연찮게도 웰즐리가 돈을 기탁한 그 세무회계법인은 동인도 회사에게 투자를 하기로 했고, 상당한 양의 동인도 회사 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매우 정말 우연찮게도 충분한 지분을 확보하여 동인도 회사에 대한 관계회사의 지위를 얻은 프라이스 세무회계법인은 어느 날, ‘합법적’으로 수집한 동인도 회사의 장부에서 상당한 양의 비리 및 회계 장난을 발견하게 되고 법인 주주인 리처드 웰즐리와 기욤 드 툴롱에게 해당 사실을 통보하게 되는데···.
“허, 시나리오 짜는 실력이 나쁘지 않으시군요, 총감님.”
“하하, 그런가요?”
음, 역시 한참 학과 공부할 때 여러 기업 사례집을 많이 본 덕이 있다.
수액을 팔에 맞고 휠체어 탄 회장님들, 소액주주들이 못 들어오게 주주총회 문을 막아버리던 용역깡패들, 기타 등등. 아직 내가 맛봤던 21세기 불닭볶음면 맛 장난질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 내 뇌리에 남아 나에게 온갖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아아, 교수님···. 저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시려고 종강하고도 그렇게 연구실까지 불러 들이셨군요. 이 불초 제자, 드디어 거룩하신 스승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꺼흐흑.
나를 과거의 상념에서 깨운 건 뒤이은 리처드 웰즐리 경의 말이었다.
“웬만한 악덕 유대인 금융가 뺨치십니다.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나는 키득대는 웰즐리 경을 흘겨보며 그리 말했다.
하여간에 그냥 첫 마디에서 멈추면 될 걸, 꼭 한 마디씩을 덧붙이는구만. 역시 공무원이라 깐깐한 거 보소.
아, 아니다. 마이어 로스차일드 씨를 비롯해 로스차일드를 네 명이나 부리고 있으니까 악덕 유대인 금융가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겠구나.
세상에, 생각해보니 이러다가 한 백 년 뒤 쯤 각종 음모론에서 프리메이슨보다 ‘기욤 드 툴롱’이라는 이름이 더 커질 수도 있겠다.
세계의 경찰인 미국을 조종하는 흑막 ‘유-대 자본’, 그 ‘유-대 자본’을 이끄는 흑막 로스차일드 가문, 그 로스차일드 가문을 이끄는 흑막 기욤 드 툴롱이라니.
아마 대충 2백년 뒤에 일요일 아침마다 한국에서 방영될 TV프로그램에 내 이름이 자주 거론될 것 같다. 콧수염을 기른 보헤미아 상병 다음 정도?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총감님?”
“뭐어...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잡생각이지요.”
나는 웰즐리 경의 말에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 웰즐리 경 밑에 계신 재무부 직원들에게서는 무슨 말 없었습니까?”
나는 아예 웰즐리 경과 그를 따르는 영국 재무부에게 우디노 부장이 습득한 동인도 회사의 장부를 넘긴 상태였다.
아무래도 불과 십 년 전까지 전쟁을 치르던 적국의 고위 공직자 출신이 직접 자기네 나라 대기업 장부를 까서 열어보는 건 상당한 반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일.
이런 비밀스러운 일에 내부자 중 누군가가 삔또가 상해 만천하에 비밀이 노출되거나 뒷통수를 맞는 일이 역사 속에서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지 않나.
그 거대한 로마를 만든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아끼던 부하에게 칼빵을 맞았는데 여기 있는 영국인들 중 누군가가 눈이 돌아가서 ‘영국인의 자존심 상 간교한 프랑스 개구리 놈에게 이런 걸 줄 수는 없다! 네가 온 곳으로 사라져라!’라고 외치며 내 배에 납탄을 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또한 희대의 천재이자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전 재산을 털어먹은 몇 십 년 전의 ‘남해회사 거품 사건’으로 인해 영국 재무부는 회계와 세무 쪽에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격함과 철두철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괜스레 내가 감식한다고 깝치다가 숫자 하나 빼먹으면 이런 창피도 창피가 없는데다가, 만에 하나라도 내가 가지고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나 혼자 독박 맞는 건데, 그런 건 싫다 이 말이야.
죽어도 같이 죽어! 살아도 같이 살아!
아무튼 내 질문을 받은 웰즐리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 안 그래도 재무부에 심어놓은 제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분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증거는 충분하다더군요. 횡령, 배임, 차명 계좌, 원가 부풀리기는 기본. 최소한 지금 재무부가 걸고넘어지면 동인도 회사가 한 번 큰 타격을 받기는 할 겁니다.”
나는 웰즐리 경의 말에 눈가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큰 타격이라는 건, 이걸로 적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말이시군요.”
“역시 총명하십니다.”
쩝. 탈레랑 그 인간하고 베르사유에서 부대끼고 지낸 게 얼마인데, 알 수밖에 없지.
나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아. 자주 만나던 사람 중에 말을 꼭 돌려서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알겠다는 말은 고려해보겠다는 말이고, 고려해보겠다는 말은 안 된다는 말이며, 안 된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정치인이군요.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려.”
웰즐리 경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는 또 다시 내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참아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담은 이만하고. 웰즐리 경, 이 정도 증거로도 동인도 회사를 뒤집는 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증거는 있지 않습니까.”
“증거는 있되, 우리를 지지해 줄 사람은 없지요.”
웰즐리 경은 고개를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휘그당의 주머니에는 동인도 회사에서 준 뱅골산 파운드화가 꽂혀있고, 우리 토리당 안에도 동인도 회사에 상당한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해군성이야 자기들 일자리를 늘려준 친구들이니 말 다했지요. 아무리 정의롭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도, 자신의 돈이 걸려있다면 주저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 말입니다.”
“아니. 저번에는 승률이 반절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총감님. 정치인은 본래 이기는 싸움만 한답니다.”
“···제 정치인 혐오증을 더욱 돋우시는군요.”
요컨대 최소한 휘그당, 토리당 내 친(親) 동인도 회사 파벌, 해군성 이 셋 중 하나를 포섭하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을 완벽하게 가져갈 수는 없다는 거다.
“휘그당은···.”
“말해서 뭐합니까. 그 자들은 절대 변하지 않지요.”
웰즐리 경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 토리당은요. 웰즐리 경이 토리당 의원 아닙니까.”
“물론 저도 그 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해군성은?”
“전 해군에 문외한이라.”
안타깝다는 듯 표정 짓지 마시지.
“그러면 저보고 뭘 하란 말씀입니까?”
“어디 높으신 분께서 제가 말씀하시기로는, 총감님께서 편지를 받으셨다고 하던데...”
“···윌리엄 피트 수상?”
아, 웃으면서 고개끄덕이지 말라고!! 진짜 싫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