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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왕관의 보석 (7) (163/341)

왕관의 보석 (7)

“이 정도면 사람들 눈에 안 띄겠지요?”

“물론입니다, 각하. 거리에 흔한 디자인이니 남들 눈에 띌 리가 없습니다.”

음. 옷 하나는 제대로 보는 마레샬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마레샬 씨가 챙겨준 수수하고 어두운 검은색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보는 지팡이까지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쓰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역시 섬나라 아니랄까봐. 춥고 짠 공기가 폐 속 깊이까지 들어왔다.

나는 그런 런던 공기를 가르며 지팡이를 짚고 런던 증권거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이어 씨의 말로는 우리 계획대로 작살이 났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지 않으면 영 불안해서 말이다. 전생에 뒤통수를 거하게 한 번 맞으면서 생긴 조그마한 버릇이었다.

그리고 과로로 개박살난 증권거래소라니, 상경계열 전공자로서 그런 진귀한 광경을 안 보러 가면 문제가 있는 거다.

런던에 오모시로이한 증권거래소가 있다!

그렇게 기욤바야시 툴롱콘은 수수한 옷을 입은 채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

“큼큼. 객장을 한 번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만.”

“···.”

“저기요?”

똑, 똑, 똑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이 없기에, 나는 창구를 손으로 몇 번 두드렸다.

다크서클이 코 밑까지 내려온 직원은 그제서야 초죽음이 된 몸을 일으켜 옆 창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옆 창구로 가자, 좀비 한 마리가 흐느적거리며 목판에 걸린 숫자를 바꿔대고 있었다.

손에 종이를 들고 숫자를 바꾸는 걸 보니, 아무래도 타 거래 팀에서 보내 준 서류를 보고 주가를 갱신하는 역할 같았는데. 옆에 서류가 적어도 미터 단위로 쌓여있는 걸 보니 이미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크게 넘은 듯 했다.

“쓰읍.”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렇게 과로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진다. 하지만 내가 무슨 죄랴, 내 죄라면 우리 회사의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린 것 뿐.

일단 난 아님. 아무튼 그럼.

마음을 굳세게 다 잡은 나는 이 혼돈과 파괴와 망각이 휩쓸고 있는 증권거래소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저 곳에 조금이라도 더 있다간 나도 어두운 기운에 잠식될 것 같아.

“뭘로 하시겠습니까?”

“간단한 걸로.”

“알겠습니다.”

급사가 내온 커피의 은은한 향을 즐기며 저 소돔과 고모라를 보노라면, 내가 정말 머리를 잘 쓰긴 한 거 같다.

아이들이 개잡주로 거래량 테러를 하면 그 품삯을 주고, 아이들은 그 품삯을 우리 아이작 간편식사로 소비한다. 그러면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또 아이들에게 테러를 사주하고, 또 품삯을 주고, 반복.

내가 괜히 아이들 품삯으로 딱 10펜스를 준 게 아니다. 후려치려면 그거야 얼마든지 후려칠 수 있는 돈이다. 솔직히 종이 쪼가리 하나 대신 사오는 게 그렇게 큰 돈을 받을만한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10펜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아이작 간편식사 하나 값이거든. 평소에 점심시간을 가져도 밥조차 굶기 일쑤인 아이들이 딱 십 분 투자해서 따듯한 점심밥 한끼를 먹을 수 있는 돈이란 말이다.

배고픈데 몇 분 걸리지도 않는 심부름을 하면 컵라면 하나 값 850원이 나오는 그런 느낌.

이 기적의 공식 아래, 나는 어차피 나갈 세금과 임대료를 제외하곤 타격 하나 없이 증권거래소에 무자비한 공격을 쏟아 붓고 있었다.

아마 증권거래인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거다. 주식 거래 자체를 막으면 거래소 평판이 떡락하는 거니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특정 개잡주 주식을 막으면 그게 ‘잡주’에 해당하는 기업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결국 증권거래소는 어디선가 날아오는 잽을, 그것도 쳐내거나 막을 수도 없는 잽을 무한히 맞으며 그로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장기의 아이들은 따듯한 고기와 따끈한 빵을 먹고, 나는 거래수수료 빼면 돈도 거의 안 잃고, 동인도 회사가 잡고 있는 거래소만 연일 두들겨 맞는 그런 순환구조가 완성됐다.

씁. 전생에 사업 말고 금융이나 팔 걸 그랬나? 그랬다면 아마 코리안 워렌 버핏이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게 다 우리 학과 교수님하고 군 생활 할 때 소대장님 때문이다.

- 기찬 학생, 학생의 사업 계획서를 봤는데 가능성이 충분하더군요! 모기업 사업개발부에 내 후배가 있는데, 그 친구라면 학생을 능히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 야, 기찬아. 넌 전역하면 뭐 할래?

- 사실 입대하기 전에 친구하고 사업 하나 계획했던 게 있어서 말입니다. 아마 잠시 휴학하고 사업해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야, 사업? 그래. 너라면 잘 할 수 있겠지. 맞다, 너 나중에 나 취업 안 되면 좀 들여보내야 줘야 돼?

- 아, 물론입니다. 제대하고 취업 안 되면 오십쇼! 제가 소대장님 자리는 뎁혀 놓겠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그 사람들의 격려 아니었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

비록 교수님이 소개시켜준 사람은 내 등골을 뽑아가고, 소대장님과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도 나름 나쁘진 않았다.

뭐, 이 정도라면 옛날에 같이 부둥키고 살던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하지 않나.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과거의 향취와 은은한 커피 향을 번갈아 맡으며, 그렇게 잠시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

“리버풀에서 514주 구했습니다.”

“노퍽에서는 250주.”

“도버에서는 이제 더 긁어모을 게 없습니다. 정리를 끝낸 뒤에 카디프로 이동하겠습니다.”

사장님의 계책 덕에, 마이어 로스차일드와 세 아들은 사악한 유대-기욤의 마수를 뻗어 영국 곳곳에 흩어진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사 모으기 시작했다.

기존에 차명, 차명, 차차명까지 들어가던 주식구매를 단순히 차명까지만 해도 피곤에 쩔어버린 거래소 눈을 속이기 쉬워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속속 정리되고, 또 계획대로 잘 되어간다고 모두가 느낄 때.

그러나 가장인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사장님과 아버지의 계획대로 되가는 거 아닌가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의문을 가진 첫째, 암셸은 그리 물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이삭의 민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쫒던 사우론의 눈, 증권거래소는 그 막강한 힘을 잃고 퍼져버린 지 오래.

암셸의 생각에는 더 이상 행보에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쉬운 상대가 아니라서 그런다.”

“쉬운··· 상대라니요?”

“베어링 말이다, 암셸. 보통내기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보통 정신력이 아니로군.”

마이어는 계속 눈을 찌푸린 채 아들들을 향해 말했다.

왕립 베어링 은행의 총재이자, 동인도 회사의 최고이사, 프랜시스 베어링.

열일곱의 나이에 무역회사 두 개를 인수하고 그걸 토대로 베어링 은행을 설립하여 ‘왕립(Royal)’이라는 단어까지 왕가에게 하사받은 영국 최고의 은행을 만들어 낸 걸물.

과연 걸물이라는 단어에 맞는 듯, 베어링은 이토록 이삭의 민족이 제 집 문간을 부수다 못해 태우고 있음에도 그 초인적인 인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내력이라니요?”

“우리가 공격을 한 그 날부터 시장에 베어링 계 회사들 움직임이 확실히 떨어졌다. 아마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운신에 들어간 거 같은데, 아직까지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걸 보면 그 인내심이 대단하지 않느냐.”

마이어는 안타까운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상한 일이 시장에 생겼으니 일단 사리는 거야 그리 어려운 판단은 아니다. 공격을 몇 번 맞아서 사태파악을 위해 움츠려 드는 것도 마찬가지.

길거리 싸움에서도 적의 카운터를 치기 위해 가드를 올리지 않나.

하지만 적의 공격을 수 없이 맞으면서 그 카운터를 칠 기회를 기다린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라는 게 있으니.

그런데 거의 두 달 간 모든 공격을 맞으면서까지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니, 마이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우리 수에 걸려든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은 우리가 이겼다. 다만, 나중에 우리와 어떤 식으로 적대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관계회사니, 뭐니. 사장님이 동인도 회사를 찌르기 위해 쓰는 비수는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회계법률 한편에서 사장님이 끄집어 낸 물건이다. 세련되다 못해 보기만 해도 피가 날 것 같은 그런 물건.

아마 베어링이라 해도 한 번은 제 아랫배를 내줄 수밖에 없는 그런 공격이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베어링과 마주하게 된다면, 베어링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이런 간단한 속임수는 더 통하지 않을 테고. 결국 서로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해야 할 것이다.

그 언젠가가, 마이어는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금융가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모든 행동을 투자하는 존재였기에.

“그래도 일단은 현재에 집중해야겠지. 암셸, 몇 퍼센트까지 모았느냐.”

“내일 중이면 목표치에 다다를 것 같습니다.”

“좋아. 걱정은 나중에 하자꾸나.”

마이어는 그렇게 말하곤 사환을 불러 짧은 편지를 들려주었다.

“리처드 웰즐리 경에게 전하게. 때가 되었다고.”

“예, 마이어 선생님.”

***

1792년 2월 중순.

리든험 가, 동인도 회사 런던 사무소.

질 좋은 북해산 나무로 만든 문이 벌컥 열리고, 한 무리의 남자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당, 당신들 누구요!”

데스크에 앉아 있던 동인도 회사의 사원은 놀라 일어나며 외쳤다.

“당신들 혹시 경찰이오!?”

그러나 남자들은 서로 시선만을 주고받을 뿐, 동인도 회사의 사원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는 듯 했다.

사원은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분기가 솟아, 데스크를 뛰쳐나가 남자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여긴 엄연한 동인도 회사 사유건물이며! 영장 없이 경찰이 수색하는 건 위헌이오!”

“···그렇소?”

한 무리의 남자 중 대장인 듯 우락부락한 사내가 나와 사원에게 물었다.

“흥, 당연하지! 이건 명백한 회사의 사유권 침해며! 자유 시장을 위협하는 일이오! 당장 경관들을 물리시오!”

사원은 경찰 대장이 자신의 말을 들어서 저리 나오는 거라 생각하고, 배를 내밀며 크게 외쳤다.

역시 경찰이란 무식한 작자들은 이렇게 과격하게 나와야 말을 듣는 법이다. 이쯤 멕여주면, 슬슬 기거나 꼬리를 말고 나가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우락부락한 경찰 대장은 턱을 유유히 쓸어내리며 가소롭다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렇다면 경찰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회사가 감사를 하는 건 괜찮은 일이겠군.”

“···뭐요?”

“관계회사, 프라이스 세무회계법인에서 나왔소. 관계회사의 권한으로 댁네 사무실을 좀 뒤져야겠으니 비켜주시지.”

“관, 관계회사? 난 들어본 적 없소!”

“그러면 이제부터 알면 되겠군.”

경찰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한 무리의 남자들이 동인도 회사 사원의 몸을 들어 저 멀리 던져버렸다.

“어어억!!”

“남들 눈에 피눈물나게 했으면, 자기도 눈물 한 번 흘려봐야지! 크헤헤!”

이놈들은 뭐지? 경찰이 아닌가? 깡패인가?

“경, 경찰을 부르겠소! 당장 체포되기 싫으면 나가란 말이외다!”

“무슨 소리? 우린 정당한 회사권을 행사하는 것 뿐이오. 안 그런가, 제군들?”

“““우디노 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하!”””

남자들은 그렇게 왁자지껄 웃더니, 그대로 사무실 곳곳에 비치된 서류들을 싸그리 파란색 상자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사장님께서 오늘 일 끝나면 시원하게 한 턱 쏘신다고 했다! 빨리빨리 움직이고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키러 가자!!”

“““와아아!!”””

“이, 이게 대체 무슨...”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자기들의 일터가 개박살나는 광경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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