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왕관의 보석 (6) (162/341)

왕관의 보석 (6)

런던 증권거래소 인근의 인적 드문 골목.

“쓰읍.”

그런 골목 어귀에 서 있는 한 남자는 입에 문 궐련을 끝까지 빨아들였다.

마침내 뜨거운 불기운이 손가락 끝에 다다르자, 남자는 궐련을 손가락을 튀겨 바닥에 던지고 구둣발로 아직 불이 남은 궐련 꼬다리를 밟아 불을 껐다.

이미 꽤 오랜 시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듯, 남자의 구두 앞에는 거의 다 태운 궐련 꼬다리가 상당한 수 떨어져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부족한지, 남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신의 검은 정장 주머니에서 궐련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꺼냈다.

그러나 남자는 성냥에 불을 붙이기 전, 멈칫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쩝. 피우면 피울수록 사장님한테 월급을 바치는 꼴인데.”

그래도 어쩌랴. 이거라도 태우지 않으면 당장에 가슴이 바짝바짝 쪼이다 못해 쪼그라들 기세인데.

결국 이삭의 민족 부사장, 플로리앙은 성냥에 불을 붙이고 새로 뽑은 궐련에 성냥을 가져다댔다.

플로리앙 자신도 나름 부사장인데, 담배는 좀 복지명목에 공짜로 찔러주면 안 되나? 그거 몇 개 스리슬쩍 한다고 무슨 거창한 문제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간에 고약한 사장님 같으니. 아마 사장님이라면 플로리앙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담배를 가져가려하셔도 돈을 내고 가져가라고 하지 않을까?

다음에 사장님과 계약할 때는 계약서에 꼭 담배 무상 지급을 ‘복지’로 받아내리라 결심하는 플로리앙이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은 언제 온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플로리앙은 자신을 이 추운 겨울날 거리로 내민 사장님을 한참 동안 씹다가, 문득 자신이 보낸 아이들이 걱정되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 아이들은 플로리앙과 미리 약속한 장소에 별 탈 없이 도착했다.

“아저씨! 우리 왔어요!”

플로리앙이 런던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친해진 꼬마 셋이 아직 앳된 걸음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며 말했다.

“피터, 존, 조지! 별 일 없었니?”

“뭐야. 아저씨, 또 담배 펴요? 윽, 냄새. 우리가 담배 냄새 싫다고 했잖아요.”

“아, 아니. 이게 왜 내 손에 있지?”

플로리앙은 손을 탈탈 털어 방금 불을 붙인 담배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젠장, 방금 불붙인 장초였는데.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아깝기 그지없었다.

그런 마음을 떨쳐버리고자, 플로리앙은 아이들을 향해 몸을 기울여 말했다.

“그, 그보다 어떻게 됐니? 일은 잘 풀렸니? 누가 해코지는 안했고?”

“물론이죠, 플로렌스 아저씨! 우린 애들이 아니라고요.”

.

그리고 가장 나이가 많은 피터가 개선장군마냥 당당하게 배를 내밀며 플로리앙에게 말했다.

그런 피터의 모습에 플로리앙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여덟 살인 녀석이 무슨 애가 아니야?”

“흥, 난 애 아니거든요? 우리 공장장님이 나보고 일할 수 있는 나이니 애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거 완전 개새···. 큼큼, 미안하다.”

플로리앙은 손을 입에다 가져다 대고 멋쩍은 듯 몇 번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 앞에서 비속어를 썼다는 게 양심에 좀 찔린 탓이었다.

‘고작 여덟 살짜리를 공장에 데려다가 일을 시키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나도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열 여섯이나 된 이후였는데. 세상이 대체 어찌될는지.’

“후우우.”

플로리앙은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왜 한숨을 쉬어요?”

“아니, 뭐. 그럴만한 게 있어.”

플로리앙은 애써 좋은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의 물음에 답했지만,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플로리앙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우리가 이거 가지고 왔으니까 이제 안 좋은 곳에 마음 쓰지 마요!”

곧, 아까의 개선장군 피터가 자기 손보다 두 배는 클 딱딱한 종이를 플로리앙을 향해 내밀었다.

[아일랜드 면직물 공업사, 1주]

[북해 대구 어업사, 1주]

[맨체스터 앤 포츠머스, 1주]

“이야, 너희 정말 아저씨 말대로 했구나!?”

플로리앙은 아이들이 건네 준 종이 세 장을 받아들고 놀랍다는 듯 말했다.

런던 증권거래소의 인장과 사인이 확실히 찍힌 정상적인 주식 증서, 이건 곧, 아이들이 플로리앙이 부탁한 내용대로 착실하게 행동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플로리앙은 아이들이 기특한 나머지 주머니에서 사탕을 세 개 꺼내, 아이들 손에 하나 씩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은 달달한 걸 좋아하니, 정말 좋아할 터였다.

“아저씨 설마 이걸로 땡 칠 건 아니죠?”

“뭐, 뭐?”

플로리앙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 당연히 아니지. 이건 너희가 기특해서 주는 부상(副賞)이야 부상.”

“후유. 야! 존! 내가 말했지?! 플로렌스 아저씨는 저번 공장장 같은 사람 아니라구!”

“에이, 돈 떼먹을지 안 떼먹을지 받기 전까지 어떻게 알아?”

“하... 하하...”

대체 런던의 아이들은 뭘 보고 자랐길래. 가슴에 동심을 품기는커녕, 동심을 저 멀리 내팽겨쳤단 말인가.

플로리앙은 이런 권모술수와 임금체불이 난무하는 런던의 혹독한 정글에서 어서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려면 일단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킨 값을 제대로 치루어야 할 터.

플로리앙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서 아이들에게 지폐를 한 장씩 쥐어주었다.

“자, 10펜스 짜리야. 피터, 존, 조지. 모두들 수고 많았다.”

“우와. 고마워요 플로렌스 아저씨!”

“야, 이거면 오늘은 고기 먹을 수 있어! 아이작 간편식사가 딱 10펜스잖아!”

10펜스.

평소라면 하루 종일 방적기 밑에 들어가서 기계 밑에 쌓인 실을 뭉텅이로 긁어 와야 겨우 벌 수 있는 돈, 돈 많은 아저씨들 구두를 열 켤레 윤이 나게 닦으면 받을 돈.

그런 돈을 겨우 종이 몇 장 대리로 사줬다고 만지게 되다니!

아이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넘쳐났다.

“아저씨! 또 종이 사올 일 있으면 저한테 시키세요!”

“나도! 나도!”

“그래, 앞으로도 부탁한다. 혹시 너희가 아는 애들 중에 믿을만한 애가 있으면 아저씨한테 소개시켜주렴. 그 친구에게도 일거리를 주마.”

플로리앙은 세 아이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싸!!”””

겨우 간편식사 하나 사먹을 수 있는 돈에 이렇게 기뻐하다니. 플로리앙은 입맛이 썼다. 아직 해맑은(?) 아이들을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이용해먹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우.”

또 다시 한 차례 한숨을 내쉰 플로리앙은 며칠 전, 사장님이 자신에게 한 이야기를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 사장님, 이거 어떻게 보면 애들을 이용해 먹는 거 아닐까요?

- 무슨 소리에요. 정당한 노역에 임금을 주는 거지.

- 으음...

- 런던에 공장 만든 놈들이 하루 종일 애들 부려먹고 10펜스 주는데, 종이 한두 장 사오는 심부름에 그만한 돈을 주는 거면 충분히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장님은 그 이후로도 이어 말했다.

- 지금 동인도 회사 놈들이 우리 등에 칼을 꽂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 회사와 명품관의 생명은 위태로워질 게 뻔합니다.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만약 플로리앙 씨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제가 알려주십쇼. 적극 반영하겠으니.

사장님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게다가 방법이 떠오르면 말하라는 사장님의 말도, 여지껏 보아 왔던 사장님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순수한 진실이면 진실이지 결코 플로리앙을 멕이려는 속셈도 아니었다.

- 플로리앙 씨. 제 뒤에는 우리 이삭의 민족 사원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비열하고 더럽게 나오는데, 가슴 한편에 걸리는 위법도 아닌 것 때문에 우리 사원들을 고생시킬 순 없습니다.

- 맞는 말씀입니다. 사장님.

- 뭐...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그냥 아이들에게 ‘투자’를 알려준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우리 돈이 들어가는 거지, 그 아이들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 예, 사장님.

자신도 사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나 이렇게 현장에 직접 나와 아이들에게 말을 하고 있노라면, 마음 한편에 무언가 형언하지 못할 가시가 걸린 듯 했다. 아마 그게 책에서 읽은 양심이라는 것, 인간성이라는 것 아닐까.

플로리앙은 말없이 담배를 입에 꼬나물었다.

***

1793년 1월 중순.

런던 증권거래소.

- 땡, 땡, 땡.

개장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오늘도 소악마들이 증권거래소 문을 비집고 들어와 창구 앞에서 외치기 시작했다.

“풀스턴 자물쇠 제작소, 1주요!!”

“포츠머스 목공소, 1주요!!”

“웨일즈 증류소요!”

저 소악마들, 주식을 사려면 동인도 회사나 베어링 은행 같은 우량주를 사는 게 아니라, 무슨 듣도 보도 못한 값어치도 없는 개잡주들을 사가고 있었다.

덕분에 에드워드는 평소에 오른손목에 두르던 린넨 천의 양을 두 배로 늘리고, 쉴 새 없이 펜을 서류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손 또한 쉬지 않았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목판에 새겨진 주가 숫자를 이리저리 바꾸지 않으면 거래가 막히고, 그 뒤에 쏟아지는 물량을 받으려면 한 사람이 더 붙어야 하기에 에드워드는 계속 양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런던 증권거래소가 이 어마어마한 거래량을 온 몸으로 받아내기 시작한 때가 언제더라.

일주일 전? 이주일 전? 아니, 한 달?

아니. 잘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조차 이 거대한 물량 앞에서는 사치니.

“으윽... 난 더 이상 못해...”

에드워드가 맡은 5번 창구 옆에서 에드워드처럼 쉴 새 없이 근무하던 동료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무책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에드워드는 그런 동료를 처량하게 바라보기는커녕, 별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또 다시 한 명이 실려 나가는군. 그러면 이제 내가 저 양까지 도맡아 처리해야 하는 건가? 씨발.’

결국 에드워드는 참다못해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블러디 헬!”

평소 같았다면 팀장 앞으로 불려나가 ‘증권인이 그런 시정잡배 같은 소리라니, 자네에겐 명예도 없나!’라던가,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라는 소리를 들었을지 몰랐겠지만.

지금은 팀장이고 나발이고 모두 피곤과 과로로 찌들어 에드워드처럼 ‘블러디 헬’을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형편이었다. 역시나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늘도, 런던 증권거래소의 불빛은 밤늦게까지 계속 켜져 있는 채였다.

***

나는 죄가 없다.

모든 죄는 동인도 회사 그 놈들 탓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놈들이 좀 양심 있게 해쳐먹었으면 나도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다.

나는 뭐랄까, 그래. 모 야구감독님의 말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 뿐.

모 야구의 신 왈, 팔은 쓸수록 강해진다 하셨으니, 이 어마어마한 물량을 감당하는 증권인들의 팔도 강해질 터였다.

그래, 나는 돈도 안 받고 사람들의 건강을 챙겨주는 거라고.

“증권 거래소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당일 거래량조차 제대로 집계 못하는 듯 합니다.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사장님!”

마이어 씨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내게 말했다.

베어링 은행이 얼마나 증권거래소에 연을 쌓아 두었는지는 몰라도, 거래소 자체가 아예 맛이 가버리면 지들이 어떻게 현금흐름을 찾을 수 있겠나.

“좋아요. 마이어 씨. 제대로 장난 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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