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보석 (5)
- 땡, 땡, 땡.
“어우우. 허리야. 이러다가 부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쓰읍, 나는 허리보다는 목이 점점 딱딱해지는 것 같아.”
오후 12시 30분.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세 번 연달아 울리자, 런던 증권거래소의 직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몸을 꺾으며 뻐근해진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서 지금까지 책상에 쭈그려 앉아 숫자가 가득한 종이와 씨름하다 보면 몸이 뻐근해지지 않으려고 해야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고용인들이 노는 꼴을 보기가 정말 죽어도 싫은 건지, 점심시간을 굉장히 빡빡하게 줬다.
제대로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를 즐기고 싶어도 정해진 시간까지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눈치는 물론이고 심하면 감봉까지 주니, 직원들이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아마 요 몇 달 사이에 런던 곳곳에 새로 생긴 ‘아이작(Isak)의 간편식사(듣기로는 플로렌스였나? 플로랭스였나 하는 30대 남자가 만들었다고 하던데, 아마 그 사람은 천재가 분명하다!).’가 아니었다면 몇몇 식사가 느린 직원들은 아직도 배를 곪기 일쑤였으리라.
그래도 너무 안심할 수는 없었다. 너무 늦게 가면 가끔씩 재료가 다 떨어지는 일도 드물게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렇다. 10펜스라는 싼 값에 갓 구운 고기, 갓 구운 빵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은 시티 오브 런던의 샐러리맨은 없었다.
그 때문에 증권거래소 거래창구에서 일하는 에드워드 또한 손목에 린넨 천을 몇 차례 감고, 서둘러 증권거래소를 나섰다.
아직까지 컴퓨터는 물론, 타자기 자체도 없는 이 저주받은 시대는 작게는 물건 발주부터 크게는 보고서까지.
모든 걸 수기로 직접 작성해야하는 까닭에 만성 건초염은 증권거래소의 직원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핫한 유행병이었다.
에드워드는 시큰거리는 오른쪽 손목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증권거래소 옆에 난 길을 따라 쭉 걷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간편식사로 가는 길이었다.
“어? 오늘은 사람이 좀 많은데?”
길 끝에 다다른 에드워드는 가게 앞에 줄을 지은 사람들을 보고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나왔는데, 어째 평소보다 줄 길이가 배는 긴 것 같았다.
잘못하면 오늘 점심을 굶을 수도 있겠다는 안 좋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기에, 결국 에드워드는 주머니에 고이 넣어놨던 손을 빼고 뛰기 시작했다.
“헉, 헉. 여기! 아이작 간편식사 하나 주세요!”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구렛나루에 흘러내리는 땀을 왼손으로 훔쳤다.
오직 밥을 먹겠다는 혼신의 힘을 다한 덕분일까, 다행히도 에드워드는 재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예이, 여기 있습니다. 10펜스입니다.”
에드워드는 직원이 신문에 싼 간편식사를 건네주자 10펜스짜리 동전 몇 개를 직원 손에 서둘러 쥐어준 뒤, 서둘러 한 입을 베어 물었다.
“흐어어.”
역시나, 고단한 일과 중간의 밥시간은 행복했다.
온 길을 되돌아 다시 일터인 증권거래소 근처로 온 에드워드는, 늘상 그랬듯이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 주문하겠습니다.”
“아, 바로 준비해드리지요.”
카페에서 일하는 급사는 에드워드가 손에 쥔 ‘아이작 간편식사’를 보더니 자리를 하나 내주었다.
에드워드 또한 급사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편히 걸터앉았다. 12월 말의 추운 날씨에도 땔감을 넣어 따듯하게 덥혀주는 카페에서, 에드워드는 반 쯤 먹은 간편식사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왜 그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작의 간편식사와 에드워드가 들어온 이 카페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듯 싶었다.
이 카페의 커피를 들고 아이작의 간편식사를 가면 내야 하는 값을 조금 깎아주고, 반대로 아이작 간편식사를 들고 이 카페에 오면 커피 값을 깎아줬다.
소비자로서 더 할 나위 없었지만, 주식을 사고파는 일을 중계하는 에드워드로서는 가게 주인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장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뭐, 사실 알 필요도 없긴 하지.”
에드워드는 간편식사를 조금 찢어 급사가 가져온 커피에 조금 적신 후 입으로 가져갔다.
***
“식사는 잘하고 왔나?”
“예, 물론이죠.”
“그래. 슬슬 시작할 준비하자고.”
에드워드는 상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 중에 맡았던 서류를 정리하고, 또 점심시간 중에 밀린 거래를 분개할 준비를 하고,
이런 제기랄. 분명히 오전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는데, 대체 이놈의 왜 일은 해도 해도 줄어들지를 않는단 말인가.
에드워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곤, 오른쪽 손목에 묶어 놨던 린넨 천을 풀어, 다시 세게 묶었다.
- 땡, 땡, 땡.
종이 울렸다. 업무를 시작하라는 뜻.
에드워드는 창구를 막아놨던 나무토막을 치우고, 서류를 꺼내며 창구 너머에 있을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떤 거래를 하시겠···, 어?”
에드워드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분명히 창구 너머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에드워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뭐, 뭐지?”
런던 증권거래소에 입사한 이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에드워드는 눈만 꿈뻑꿈뻑일 뿐이었다.
그렇게 에드워드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창구 밑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저씨. 여기에요. 여기.”
“···?”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창구 너머를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앞을 향해 기울였다.
그제서야 에드워드는 창구 밑에 손을 꼬물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꼬마가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꼬마의 키가 너무 작아서, 어른 눈높이에 맞춘 창구에 보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조그마한 꼬마가 증권거래소에 오다니, 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혹시 길을 잃은 건가?
에드워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친절하게 꼬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꼬마야, 여긴 무슨 일이니? 혹시 근처에서 부모님을 잃어버린 거니?”
“아, 아니에요!”
꼬마는 그런 에드워드의 말에 추위 때문에 빨개진 볼과 고개를 세차게 가로 지으며 말했다. 보통 부정의 뜻이 아니었다.
“그, 그러면 길을 잃어버렸니?”
“아니에요!”
이번에도 꼬마는 고개를 가로 지으며 외쳤다.
“어···, 그러면 무슨 일로 온 거니?”
에드워드의 물음에, 꼬마는 손을 쭈뼛거리다가 조그마한 소리로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아, 아일랜드 면직물 공업사 1 주 주세요.”
“···뭐?”
에드워드는 당혹스러움을 이번에는 감추지 못했다. 겨우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 법한 꼬마가 주식을 사겠다니, 이 세상 누가 당황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꼬마는 에드워드가 당황스럽거나 말거나 또 다시 크게 외쳤다.
“아일랜드 면직물 공업사 주식 1 주 팔아주세요!”
***
시티 오브 런던.
왕립 은행, 베어링.
이사장실.
“···뭐라고?”
방금까지 위스키를 잔에 따르던 쉰 정도의 남성은, 위스키의 마개를 도로 잠그며 말했다.
“자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저잣거리 꼬마들이 증권거래소 문고리를 두드린다니?”
시티 오브 런던을 쥐락펴락하는 베어링 가문의 가주이자, 왕립 은행의 은행장이며, 동인도 회사의 최고이사인 프랜시스 베어링(Sir Francis Baring, 1st Baronet)은 비서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얘기했다.
“혹시 어젯저녁에 자네가 식사로 먹은 대구가 상한 거 아닌가? 어떻게 하면 하루 먹고 하루 사는 꼬마들이 시티 오브 런던 한복판을 걸어 다닐 수 있단 말인가.”
구두닦이, 일용직 노동자, 신문팔이 소년 소녀들이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주식을 산다니.
난생 처음 듣는 이상한 소리에 프랜시스 베어링은 비서가 혹시 식중독에 걸린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 하지만 실제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사장님! 방금 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우리 은행으로 전해준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서는 자신을 믿어달라는 듯 억울한 표정으로 그런 프랜시스 베어링에게 말했다.
“···우리 휘그당 친구들에게서는 별 말 없었나?”
베어링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가, 다시 자신의 비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예, 쉘번 백작(William Petty, 2nd Earl of Shelburne. 휘그당 의원, 전임 상원의장)께 전령을 보냈지만 그쪽에서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입니다.”
“으음. 휘그당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친구들은 아니니, 일단 휘그당은 정말 모른다고 봐야겠군.”
자신을 비롯한 무역자유론자들과 자유시장론자들이 수십 년 간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끝에, 휘그당은 베어링 가문과 굉장히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 휘그당이 이런 짓을 벌일 리는 없을 터. 당장 나도 휘그당 당적으로 의원은 물론, 재무부에서 잠시 몸을 담가보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그 시절에 참 국가사업을 주도한다고 많이 뒤로 빼돌려 먹었었는데. 또 추억이군.’
그랬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휘그당과 에드먼드 버크가 무슨 언질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딱 하나.
프랜시스 베어링은 잔에 반 쯤 따른 위스키 잔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윌리엄 피트와 토리당이 또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는 거 같은데...”
“토리당이라면, 심증은 충분합니다.”
정적인 휘그당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베어링 자신을, 수상 윌리엄 피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굉장히 싫어할 터.
그런데 꼬마들을 동원해 주식을 사 모으는 것과 날 견제하는 게 무슨 연관이 있지?
“뭔가 이상해.”
도대체 무슨 계략을 꾸미는 거냐, 피트.
프랜시스는 뭔가, 뭔가 계속 가슴에 답답하게 걸리는 듯 했다.
그럼에도 프랜시스 베어링은 경거망동 하지 않았다.
상대의 수를 읽을 수 없고, 내가 뭘 해야 할지 뚜렷하게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해야 할 건 차분함을 잃지 않는 한 가지 뿐이니.
왕관의 보석, 인도를 자기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기회를 겨우 정치공작 따위에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금융가인 프랜시스는 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미국 보스턴, 이집트 쪽 연락선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임원들에게도 당분간은 눈에 띄는 활동을 자제하라고 전하게.”
일단은 사려야 한다. 상대가 무슨 공격을 하던, 공격을 할 건덕지를 주지 않으면 되니까.
“임원이라 하심은 어떤 회사를 말하시는 건지요.”
“베어링 은행, 동인도 회사, 호프앤컴퍼니(Hope & Co.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은행.)까지, 우리가 지분을 보유한 곳에 모두.”
프랜시스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웨스터민스터로 가서 소문이든 뭐든 좋으니 정보를 수집해오게.”
“예, 이사장님.”
비서는 프랜시스 베어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이사장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