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보석 (4)
1792년 12월 말.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
“토리당 서민원 의원, 리처드 웰즐리일세. 수상 각하를 뵈러 왔네.”
리처드 웰즐리는 마차에서 내려, 자신을 막아선 경비병들에게 그리 말했다.
“예, 의원님. 들어가시지요.”
경비병들 또한 웰즐리를 형식적으로 막아선 것이지, FM대로 막을 생각은 아니기에 바로 수상 관저의 문을 열어주었다. 괜스레 높으신 분들 심기를 건드렸다가 화풀이로 곤죽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관저로 들어간 웰즐리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환에게 코트를 맡기고, 피트 수상이 평소에 다과와 차를 즐기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수상 윌리엄 피트는 오늘도 그곳에서 업무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상 각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웰즐리 경 아닙니까.”
윌리엄 피트는 응접실로 들어오는 웰즐리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설마 우리 토리당의 ‘오랜 친구’인 휘그당 당수 에드먼드 버크가 웨스터민스터에서 또 무슨 헛소리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버크 의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서서 얘기할 만큼 짧은 내용은 아니니 앉아서 얘기해야 될 듯 싶습니다.”
웰즐리의 말에 피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잠시 후 두 토리당 의원이 모두 자리에 앉자, 웰즐리가 입을 열었다.
“동인도 회사 건입니다.”
“···후우, 이번에는 어디에서 사고를 쳤답니까?”
웰즐리 입에서 나온 문장 한 마디에, 윌리엄 피트는 골이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뱅골 대기근으로 30만을 죽이고, 보스턴 차 사건으로 10만을 죽인 만악의 근원 동인도 회사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니고 인도감시위원회 최고위원이 이리 직접 수상 관저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세 살배기 코흘리개 꼬마가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는 어머니처럼, 십 수 년 간 동인도 회사의 사건 사고를 수습하는 일에 질려버린 피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웰즐리는 씨익 웃으며 골을 싸매는 피트에게 얘기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수상 각하. 동인도 회사 입에 재갈을 물릴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웰즐리 의원?”
피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동안 개판을 치고 다닌 동인도 회사를 국가차원에서 단죄하려하면, 동인도 회사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사람, 주식을 사놓은 사람 등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자들은 물론이고 애덤 스미스 교수를 비롯한 자유무역론자까지 토리당 당사를 향해 어마어마한 분노가 담긴 편지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신문들은 뒷주머니로 들어오는 인도산 금덩어리에 혹해, 연일 정부가 사기업을 힘으로 깔아뭉개려 한다는 둥, 동인도 회사는 ‘사유권 침해’라며 대법원에 소송을 내는 건 이미 연례행사.
사람들의 사랑을 담아 살아가는 정당답게, 휘그당 또한 그럴 때마다 ‘경제를 독재하려하는 제 2의 크롬웰, 피트를 끌어내리자! 휘그당과 에드먼드 버크를 다우닝 가로!!’라면서 한두 번 수상 자리를 노리던 게 아니었고.
“···그런 휘그당이 우리가 동인도 회사 입에 재갈을 물리는 걸 가만 두겠습니까?”
윌리엄 피트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과거 생각에 속으로는 몸서리를 쳤지만, 겉으로는 짐짓 젠체하며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웰즐리는 씨익 웃으며 피트에게 말했다.
“그 치들도 이번에는 방법이 없을 겁니다. 수상 각하.”
“흠. 당최 무슨 계획이길래, 그리 당당하게 말하시는지 궁금하군요.”
“관계회사라는 법을 아십니까?”
웰즐리는 그걸 시작으로 장장 몇 시간 동안 ‘원대한 계획’을 피트 귓가에 때려박기 시작했다.
그리고 윌리엄 피트는 귓가에 웰즐리의 말이 들리면 들릴수록 점차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면 관계회사라는 회계법을 이용하면 일반 회계법인에 용역을 주고 동인도 놈들 목에 목줄을 채우는 것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참 묘안입니다.”
“그 치들도 항상 회사의 권리를 존중해달라고 했으니, 관계회사가 될 법인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리처드 웰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윌리엄 피트에게 웃으며 말했다. 윌리엄 피트 또한 웃으며 계속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동인도 회사, 자기들 논리에 자기들이 걸려 넘어질 꼴을 생각하면, 웃음이 멈추지 않았으니.
“하하, 안 그래도 새 인도법(India act)을 통과시켜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좋은 기회가 생겼군요. 이 계획은 리처드 웰즐리 의원이 생각해내신 겁니까?”
“아니요, 기욤 드 툴롱 총감이 생각해낸 겁니다.”
“···기욤 드 툴롱 총감이요?”
웰즐리의 말에, 윌리엄 피트는 웃음을 멈추고 턱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동인도 회사가 꼴도 보기 싫다고 해도 외국인이 개입하는 건 영 꺼림직 했다.
그런 피트의 마음을 알아챈 듯, 웰즐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상 각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관계회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권한은 상업적인 부분까지입니다. 초석이나 화약 같은 군사적인 내용은 결코 그 프랑스인의 손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음. 하기야 웰즐리 의원께서 다 검토하셨겠지요. 실례했습니다, 괜한 걱정을 했군요.”
자신이 아끼는 웰즐리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피트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애초에 리처드 웰즐리를 인도감시위원회에 꽂아 넣은 것도, 그의 세심하고 꼼꼼한 일처리가 마음에 든 윌리엄 피트 아니었는가.
‘그래, 웰즐리 의원이 어련히 잘 알아서 했겠지.’
피트는 웰즐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웰즐리 의원.”
“수상 각하께서 도맡아 처리하시는 일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웰즐리 또한 그런 피트의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리처드 웰즐리가 떠나고도, 피트는 응접실에 남아 곰곰이 생각을 계속했다.
‘역시 돈 만지는 분야에서 굴러본 사람이라 다른 건가.’
기욤 드 툴롱이라...
안 그래도 호기심 때문에 기욤 드 툴롱을 영국으로 초대한 피트는, 자신의 호기심이 더욱 더 커져만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피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편지지 한 장을 꺼내어 깃펜을 잡고 그 위에 간단히 내용을 써넣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예, 수상님. 부르셨습니까?”
“이 편지를 이삭의 민족, 기욤 드 툴롱 총감 앞으로 보내주십시오.”
“예, 수상님.”
사환은 피트가 건넨 편지를 손에 소중히 들고는, 피트의 말을 따르기 위해 응접실을 나갔다.
‘기욤 드 툴롱, 당신이 이 정도로 영국에서 활개치고 다니게 해줬으면 한 번 쯤 내게 얼굴은 비춰줘야지.’
윌리엄 피트는 혼자 남은 수상 관저에서, 칙칙한 런던스럽게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비를 눈으로 훑어보며 찻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
런던, 리버사이드 7번지.
프라이스 세무회계법인.
나는 오늘 아침 내 앞으로 배달된 종이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책상 위에 정리했다.
[동인도 회사 주식증서. 1783년 발행]
첫 번째는 우리가 비밀리에 모으고 있는 동인도 회사 주식들, 두 번째는··· 음,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프랑스 혁명 왕국,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각하께. 가능하시다면 근시일 내에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여기까지는 뭐, 괜찮다.
여기 영국에 온 이후 내가 받는 편지들이 부쩍 늘어났으니.
그런데 말이지.
[-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 -]
편지 뒤편에 적힌 발송인 주소를 보면 별로 괜찮지 않다.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면 수상관저 아닌가.
윌리엄 피트 수상이 날 왜 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인과 엮이면 엮일수록 사업가들은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거나 마찬가지.
저게 날 향한 러브레터인지, 아니면 그만 좀 깝치고 다니라는 내용인지는 몰라도, 한 번 수상을 만난 뒤에는 지금처럼 운신 할 수는 없을 거다.
자신들에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인들 특성상, 전자라면 무언가 모를 복잡한 일에 피트의 편에 휘말릴 거고, 후자라면 여기가 내 놀이터가 아닌 이상 정말 쥐 죽은 듯이 있다가 떠나야 하겠지.
그냥 지금이 딱 적당하다. 정 뭐라고 하면 바빠서 갈 시간이 없다고 잡아떼지 뭐.
나는 나를 향해 과분한 관심을 보이는 편지를 살포시 다시 접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고이 모셔놓기로 했다. 설마 편지 좀 간수한다고, 부정 타지는 않겠지.
그래. 에비, 저건 지지야 지지.
“이걸로 몇 퍼센트 정도 모였지요?”
나는 서랍을 닫고, 책상에서 일어나서 오늘 아침 포츠머스 항구와 맨체스터에서 암셸 로스차일드와 나단 로스차일드가 보내온 주식 권리증서를 금고 안에 수북하게 쌓인 기존 권리증서와 합치며 마이어 씨에게 말했다.
“지분의 약 9퍼센트까지 확보했습니다, 각하.”
“9퍼센트라!”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웃은 게 아니고, 대단해서.
아무리 나와 영국 재무부가 뒤에서 밀어준다고 해도, 겨우 두 달 만에 뒤탈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게 주식과 채권을 이 정도 양까지 사들인 걸 보면 역시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21세기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는 건 운이 아니라 실력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일이 이렇게 잘 풀리는 데도 계속 욕심이 났다.
물량을 받아온 지 두 달 즈음 되었으니. 곧, 동인도 회사에게 바가지를 쓰고 겨우 구해온 3개월 치 물량이 바닥을 보일 거다.
지금도 차익이 별로 안 남는데, 그 때가서는 그 놈들이 또 어떤 독소조항을 펼지 상상도 채 되질 않는다. 막 스무 배로 바가지를 씌우는 건 아닐까.
사람들이 자기들 차를 안 산다고 떼를 부려 전쟁까지 일으킨 놈들이니 오죽하겠는가.
“하아. 조금 더 빨랐으면 좋으련만.”
“사장님. 사장님의 마음은 알지만, 사는 것보다 동인도 회사 스파이들에게 들키지 않을 뒷작업이 더 중요한 거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마이어 씨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인도 회사의 최대 주주이자 이사회를 주무르는 베어링 가문의 눈을 피해 지분을 상당량 확보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에 그냥 남들 눈 신경 안 쓰고 막대한 양의 주식을 한꺼번에 산다면, 왕립 은행을 겸하고 있는 베어링 은행이 그 만한 자금이 어디로 흐르는지 눈치 채지 못할 리 없고, 분명 나와 리처드 웰즐리 경의 속셈도 베어링 가문 손에 들어갈 것이다.
아마 리처드 웰즐리 경은 프랑스인에게 국가 산업을 팔아먹었다고 정치 인생이 끝날 테고, 나와 이삭의 민족은 겨우 알 박은 곳에서 본전도 못 찾은 채 쫓겨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차명의 차명의 차명 계좌를 써서 뒷작업을 깔끔히 해놔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연관이 없어보이게.
“후우, 이 영국이란 곳은 시장이 너무 깔끔해서 작업하기가 힘드니 원.”
“그러게 말입니다, 각하. 시장이 좀 혼란하면 속도가 빨라질 터인데...”
마이어 씨는 내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마이어 씨를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장이 혼란하면 속도가 빨라진다고요?”
“그렇지요. 수기로 그 많은 주식 거래를 다 받아 적어야하니, 자금줄을 쥐고 흔드는 입장에서는 꽤 당혹스럽습니다.”
“아, 수기. 그렇지.”
이 18세기에 현대의 전산 따위는 없었다.
증권거래인이 모든 거래를 수기로 받아쓰고, 숫자가 쓰인 나무판자를 이용해 주식 가격을 바꾸는 시대.
그 불편함을 이용한다면. 자금줄을 흔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