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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왕관의 보석 (3) (159/341)

왕관의 보석 (3)

1792년 11월 초순.

가을을 맞아 붉게 물들었던 단풍나무의 마지막 잎새가 이제는 힘을 잃고 가지에서 떨어지는 한편, 북해와 도버해협에서 런던을 향해 불어오는 소금기 섞인 공기도 날이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었다.

“음, 대강 1, 2 주 쯤 있으면 추워지겠구만.”

“그래요, 여보. 슬슬 땔감을 준비해야겠어요.”

사람들 모두 선선한 가을 날씨를 즐기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일으키고, 지척으로 다가온 겨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런던의 중심인 시티 오브 런던 또한, 그런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힘입은 듯 오늘도 소란스러웠다.

해운 보험사가 즐비한 노스 다운즈(North Downs)부터, 웨스트햄 헤이츠(Westerham heights), 런던 증권거래소, 거기에 잉글랜드 왕립 은행인 베어링 은행까지.

“내일까지 대금 입금이 없다면 거래는 파기요! 파기! 이곳이 치외법권 지역인건 알고 있겠지! 밤중에 길가다가 총 맞기 싫으면 당장 대금을 입금하란 말이외다!”

“키야, 콜옵션 안 탄 멍청이 없지?! 떡상 가즈아!!!”

“아, 안돼! 난 풋옵션에 걸었단 말이야!!”

돈을 위해 만들어진 테마파크이자 유원지를 탐험하는 시민들은, 오늘 하루도 손에 채권과 주식 구매증서를 꼬옥 쥐고서 증권거래소를 드나들 때마다 바뀌는 숫자놀음에 열광하고 또 오열하기 마련이었다.

방장사기맵을 제대로 쓰기 시작한 미국의 월스트리트에게 권좌를 뺏기기까지 수백 년간 전 세상의 금을 빨아들인 곳이니 오죽할까.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차며 아니꼽게 볼 수도 있겠지만, 아침 일찍부터 금융가들과 사업가, 회계사들로 소란스러운 시티 오브 런던을 보노라면, 이곳이 곧 다가올 19세기를 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금융허브가 되기 충분한 곳이라고 무리 없이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후끈한 런던과 달리, 시티 오브 런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손꼽히는 리든홀 가(Leadenhall st.)의 동인도회사 사무소(East india house)의 응접실에서는, 11월 초순의 차디찬 공기보다 더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큼큼. 기욤 총감님, 이 사람이 런던 동인도 회사 사무소 대표입니다. 대표,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님입니다.”

리처드 웰즐리는 그런 분위기를 깨고자, 마주보는 두 사람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동인도 회사를 대표하여 각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두 신사는 살갑게 서로의 손을 마주잡았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싸늘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만난 적들 마냥 말이다.

***

그래, 회사가 이익을 내기 위해 값을 올려 받는 거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나.

“후우, 장 당 25 리브르는 어떠십니까.”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옷감이야 차후에 라부아지에나 기요탱 박사님을 갈아 넣···, 아니 부탁드려서 방적기 같은 기계를 만든 뒤 뽑아내면 그만이지만, 적어도 가죽은 무조건 원단이 있어야했다.

언뜻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법한 금테 안경을 쓴 남자는 서글서글 웃으며 내 말에 답했다.

“25 리브르라! 영국 돈으로 환산하면 3 파운드 정도군요. 음, 뭐랄까요. 제 생각엔 ‘조금’ 부족한 듯 싶은데···.”

나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서, 내 몫의 홍차가 놓인 책상을 잠시 검지 끝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입을 열었다.

“대표, 나는 장 당 6 파운드라면 딱히 부족한 값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1 리브르면 평균적인 숙련공의 일당이고, 5 리브르면 꽤나 품질 좋은 양털 모자를 구매할 수 있다. 즉, 나는 지금 일반인의 25일치 노임을 인도산 고급 가죽 한 장 값으로 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뭐? 더 달라고? 바가지도 정도가 있지. 혹시 댁들이 길러서 잡는 가축 이름이 봉황이나 기린이라면 몰라.

그러나 내 말에도 불구하고, 동인도 회사 대표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허허, 때에 따라 다르지요. 총감 각하.”

“하하, 때에 따라 다르다니, 신선해야할 해산물 말고 싯가로 책정하는 물건을 보는 건 처음이군요. 무두질까지 한 가죽이 펄떡펄떡 살아 숨쉬기라도 하는 건가요?”

“허허, 뱅골에서 이곳 런던까지 우리 회사의 화물을 노리는 해적이 한 둘이 아니니 들어가는 해상 보험료가 한 푼 두 푼이 아니랍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해적 때문에 보험료를 낸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그렇습니다, 각하.”

동인도 회사 대표는 그렇게 말한 뒤, 어디 동화책에 나오는 인심 좋은 신선 마냥 허허하며 웃었다.

뭐? 해적? 동인도 회사 화물을 터는 해적? 하, 아무리 생각해봐도 얼탱이가 없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건가, 아니면 내가 정말 저걸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전자면 좆같고, 후자면 개좆같다.

현직 인도감시위원회 소속 리처드 웰즐리 경 왈, 동인도 회사가 가지고 있는 ‘경비원’ 규모가 6만에 달하고 ‘해상 경비원’은 군함 30척이라. 감히 해적 나부랭이들이 깝죽댔다간 인근 해역에 있는 물고기들이 포식하기 마련이라 하시었다.

그리고 그 30척의 군함 중, 현대로 따지면 항공모함이나 마찬가지인 80문 이상 1급 전열함은 무려 6척.

그런 전열함을 털어먹는 해적이 있다는 건, 소말리아 해적들이 양손에 AK 소총을 들고 ‘끼릭끼릭 휘요옷!’을 외치며 미해군 항공모함을 탈취한다는 소리와 똑같다.

아. 한 가지 말이 되는 케이스가 있긴 하다.

혹시 해적들이 꾸물꾸물 거리는 문어 촉수를 턱에 달고 있다던가, 거대한 심해 문어 괴물의 비호를 받고 있다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성이 ‘존스’고 이름이 ‘데비’라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뭐, 위협을 한다는 해적들이 그런 슈퍼내츄럴하고 초자연적인 해적이 아니라면, 실례하겠다. 좆이나 까라.

선원 700명을 태우고 다니는 동인도 회사 전열함이 고작해야 선원 50명 안 밖의 해적 샤락선의 위협 때문에 보험료를 낸다니, 이 새끼가 사기를 치려면 노력과 열정을 담아 그럴 듯 하게 쳐야지.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나는 화 때문에 파르르-하고 떨리는 양 쪽 눈두덩이에 검지와 엄지를 가져다 대고 살포시 문질렀다.

아, 왜 들이받지 않느냐고? 내가 무슨 짐승도 아니고 본능에만 충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나도 당장에 응접실 밖에 서있을 우디노 부장을 데려와서 눈앞의 이 얌생이를 반으로 갈라버리고 싶은 마음은 물론이고, 웰즐리 경과 하하호호 웃으며 저 놈의 목에 목줄을 채운 뒤 프리스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리처드 웰즐리 경과 마이어 로스차일드 씨를 이용해 동인도 회사의 목에 줄을 채우는 건 가장 마지막까지 아껴두어야 할 수다.

아무리 내가 국빈에, 리처드 웰즐리 경까지 가담했다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나는 영락없는 경제사범이다. 한 번 잘못 엮이면 보나마나 꽤 골치 아플 거란 말이지.

뭐, 사실 이중 삼중으로 꼬아놓은 차명투자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벌여서 혹시나 모를 안 좋은 사태를 만드는 건 사절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호구처럼 뜯기면서까지 감수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 누구냐, 어떤 위인이 했던 말 중에 ‘말은 부드럽고 격식 있게 하되, 허리에 차는 몽둥이는 제일 큰 걸 들고 다녀라.’라는 말이 있었다. 아아아주 마음에 드는 내용 아닌가.

나는 책상에 놓인 식은 홍차를 한 숨에 들이켜 속의 화를 가라앉힌 후 입을 열었다.

“그러면 대표는 얼마를 원하십니까?”

“장 당 80리브르 어떠십니까.”

“이런 ㅆ···.”

나는 서둘러 목젖 끝까지 올라갔던 조금 험악한 언어를 가까스로 목 뒤로 다시 넘겨 보냈다.

“이삭의 민족에서 구하는 최고급 가죽은 우리 동인도 회사의 도움 없이 구할 수 없지 않습니까.”

“···.”

“큼큼. 어흠. 흠.”

동인도 회사의 대표와 나 사이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오가면 오갈수록, 리처드 웰즐리 경은 자리가 불편한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후우, 그러면 계약은 일단 세 달 치 분량만 구매하고, 차후에 자금이 충분히 융통되면 그때 추가 발주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허허!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각하!”

동인도 회사 대표는 끝까지 날 향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또한 억지로 그에 맞춰 입꼬리를 뒤틀었다.

하... 내 끝내 뽑지 않으려 했건만...

내 흉중에는 이 새끼의 어디를 찔러야 칼이 더 잘 들어갈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

사회에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룰이 있다.

서로 싸워도 중요한 고간은 차지 말기라던가, 친구한테 돈은 빌려주되, 보증은 서지 말라던가. 초반 5분 하드코어 질럿 러쉬 금지라던가.

그리고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소위 ‘상도덕’이라는 게 존재했다.

단순하게 말하면, 해쳐먹어도 적당히 해쳐먹자.

그런데 동인도 회사 당신들에게는 상도덕이라는 게 없네?

어? 꼴 받네?

“사장님, 동인도 회사와 만남은 어떠셨습니까.”

“쯧, 말해봤자 기분만 더러워집니다. 아무래도 계획을 실행시켜야 할 듯 싶군요.”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파리에서 런던까지 빠른 배편을 타고 사무실로 온 마이어 로스차일드 씨에게 말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마이어 씨?”

“물론입니다, 사장님.”

나는 사무실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리처드 웰즐리 경이 준비한 세무회계법인 명함이 가득 든 통을 마이어 씨에게 건네며 말했다.

“좋습니다. 같잖은 동인도 회사 놈들에게 크게 한 방 먹여주죠.”

[세무회계법인 Price / 런던 리버사이드 7번가]

***

마이어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제일가는 은행가인 마이어 자신이 직접 가르친 금융 영재들이자 자신의 아들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암셸, 살로몬, 나단, 준비되었느냐.”

“““예, 아버지.”””

“명심, 또 명심하거라. 우리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상으로 내딛는 첫걸음이다.”

아버지의 말에, 세 아들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대인인 로스차일드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둘도 없을 기회, 이런 어마어마한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어디 가서 ‘나는 유대인이오, 나는 금융가요’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을 터였다.

“동인도 회사 30주, 매수 하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원보증금은 가지고 있소?”

“시티 오브 런던, 프라이스 회계 법인에서 나왔습니다.”

“시, 시티 오브 런던! 어서 들어오시지요. 헤헤헤!”

첫째인 암셸은 포츠머스 항구로.

“허커베리 양조사 90주, 주 당 4 실링!! 주당 4 실링!! 다음 매물은 동인도 회사!! 동인도 회사 20주, 주 당 15 실링!! 주 당 15 실링!!”

“프라이스 회계법인, 동인도 회사 20주 매수 하겠습니다.”

“15 실링, 동인도 회사 20주! 프라이스!”

둘째인 살로몬은 런던 증권거래소로.

“몇 번이나 와서 사정해도 나는 안 팔 거요. 다른 사람 알아보시오.”

“증권거래소보다 주 당 5실링 더 쳐드리겠습니다. 300주를 보유하고 계시니 꽤 거금일 텐데, 안 파시렵니까?”

“···5 실링이면, 75 파운드? 으음...”

“뭐, 선생님께서 거절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누, 누가 거절한다고 했소?! 큼큼, 내가 돈 때문이 아니라 당신 정성이 갸륵해서 팔아주는 거요.”

셋째인 나단은 맨체스터로.

유대-기욤의 마수가 동인도 회사의 숨통을 차근차근 죄여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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