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왕관의 보석 (1) (157/341)

왕관의 보석 (1)

기욤 드 툴롱의 선언 이후 이삭의 민족 명품관 앞에 있는 귀족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흥, 어디 얼마나 대애애단하신 옷을 맞춰주시길래 우리가 이따위 대접을 받아야한단 말이오?”

“암! 당신 말이 백 번, 천 번 옳소!”

“여보, 프랑스 개구리 놈에게 창피를 당했는데 저런 놈 걸 사줘야 되겠소?! 그냥 돌아가시구려. 내 저런 놈이 만든 거보다 배는 아름다운 옷을 사주리다!”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혔다고 생각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 머리를 돌려 집으로 향하는 귀족들.

“허, 그래. 어디 한 번 가게를 봐야겠구만.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러는지 말이야!”

“쯧, 데번에서 여기까지 삼일을 달려 왔는데 이걸 돌아갈 수도 없고 참...”

“공주 전하께서 극찬을 하셨다니 딱 한 번만 참아보지. 이잉, 쯧.”

런던까지 오는데 들인 수고와 시간 때문에, 얼마나 잘나셨길래 이런 대접을 하는지 꼭 보고자 하는 분노 때문에, 로열패밀리가 극찬을 했다는 소문 때문에 애써 마음을 다잡고 정말 9시까지 기다리는 이들.

“여보, 문을 안 연데요?”

“오전 9시에 연다는군. 부인은 어찌하는 게 좋겠소?”

“맨체스터까지 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아찔한데...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마차에서 조금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 내 부인 말에 따르리다.”

맨체스터에서 온 자작은 개중 후자에 속했다.

자작 내외는 그렇게 마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선잠까지 조금 자고는,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선잠을 자느라 뻐근해진 목을 이리저리 풀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삭의 민족, 명품관. 지금 개점합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사환이 종을 울리며 굳게 닫혔던 가게 문을 열고, 귀족들이 마차에서 내려 하나 둘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자작 또한 부인과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 젊은 사환의 안내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허.”

가게로 들어간 자작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고 말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품격이 흘러넘친다고 해야 할까.

자작이 발을 들은 가게의 모습은 유럽 여느 왕궁에 비견될 정도로 ‘호화’와 ‘사치’가 가득하면서도, 결코 손님들에게 가벼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천장에 황금을 바른 듯 영롱하고 찬란한 금빛이 햇살과 함께 쏟아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라는 단어와 일맥상통하는 듯 했다.

뭐, 사실 기욤 드 툴롱이 인부들에게 정말 겉에 황금빛이 나게만 도금을 하라고 했으니 황금을 발랐다는 말이 맞긴 할 터였다.

‘천장은 어차피 사람 손 안 탑니다. 겉에만 쬐끔 도금하죠?’

정말 쌩으로 황금을 가져다 놓지는 못했어도 그 정도라면 입에 침 좀 바르고 황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돈을 꽤나 바른 티가 나는구려. 안 그렇소, 부인?”

“그러게 말이에요.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윈저 궁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겠어요.”

“아버지! 아버지! 참으로 호화스러워요!”

물론 그런 걸 알 리 없는 고객들은 그 장엄한 모습에 자신들이 한 시간 동안 기다렸다는 사실조차 저 멀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무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런 자작 내외를 향해, 한 사람이 다가와 품격 넘치는 프랑스어로 물었다.

이 시대의 교양인이라면 프랑스를 배운 사람이 다수. 자작 또한 네이티브처럼 유창하지는 않아도 꽤 완성도 있는 프랑스어로 되물었다.

“아, 사환인가?”

“예, 그렇습니다. 무엇을 구매하시고 싶으신가요?”

“우리 가족끼리 한 벌을 맞추고 싶은데.”

“음, 잘 알겠습니다. 무슈.”

금테로 된 외눈 안경에 검은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사환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작 일가를 매장 한 편으로 데려갔다.

“여긴 무엇이오?”

“가죽과 옷감입니다. 직접 만져보시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신다면 저희 가게의 장인에게 말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환은 싱긋 웃으며 벽을 드르륵 열어 젖혔다.

“허어. 이게 다... 가죽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무슈.”

색, 질감, 패턴, 거기에 두께까지. 아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의 가죽은 이곳에 모아 놓은 듯 싶었다.

“대, 대단하구려.”

자작은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수백 개의 가죽과 옷감의 파도에 아까처럼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궁금하신 가죽이나 옷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무슈.”

“이건 무슨 가죽인가요?”

“아, 그건 인도 코끼리입니다. 어디보자, 촉감을 보니 대략 2년 정도 된 것 같군요. 이런 건 지갑이나 가방으로 만들면 제격입니다. 부인.”

“이건 뭐죠?”

“예, 도련님. 그건 아프리카 코뿔소 가죽입니다.”

무얼 물어보든 청산유수로 답하는 사환의 모습에, 자작 내외는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가죽과 옷감을 모두 고르셨다면, 이번에는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사환은 자작 가족을 데리고 매장 정반대 쪽으로 향했다.

어떻게 된 가게가 단순히 이동하는 통로에도 곳곳 번쩍이는 가방과 시계, 그리고 가발들까지 놓을 수 있는 건지. 역시 사치하면 프랑스인인가?!

자작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하-하고 벌리며 걷고 있었다.

“이번엔 고객님들의 치수를 잴 겁니다. 부인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이삭의 민족은 여성 사환도 고용하고 있으니.”

“허. 실로 대단하구려...”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여러분에게 프랑스 왕족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해드리는 것 뿐 입니다.”

“왕, 왕족?”

왕족과도 같은 대우라니?

“그, 그러면 우리가 대접받는 방식이 부르봉과 같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우리 이삭의 민족은 전직 왕실 세공인은 물론 왕실에서 의뢰받던 모든 장인들이 모여 만든 곳입니다. 고객님들께 드리는 모든 건 왕실과 같은 방식으로, 같은 급으로 제작합니다.”

“허, 허허!! 이거 돈 주고도 못 살 기회로군!”

자작은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귀한 경험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그때, 매장 한 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서! 당신 이 정도도 못 낸다구요?!”

“그, 그게... 내, 내가 꼭 돈을 구해보겠소! 레이디!”

“됐어요! 하여간 오라버니 말을 들을 걸 그랬어!”

“레, 레이디! 레이디!”

“···실례했습니다, 손님.”

“음? 무엇을 말이오?”

사환은 자작에게 고개를 숙인 뒤, 연인에게 다가가 손으로 매장 밖을 가리켰다.

“나가십시오.”

우리 이삭의 민족은 고객들에게 최고의 경험만을 제공합니다.

***

나는 샌드위치 백작의 추천을 받아 만나게 된 리처드 웰즐리 최고위원의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전(前) 프랑스 재무부 임시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반갑습니다, 웰즐리 위원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총감님. 현 인도감시위원회 최고위원이자 모닝턴 백작, 리처드 콜리 웰즐리라 합니다. 자자하신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자자한 명성이요?”

“프랑스의 핼리팩스(George Savile, 1st Marquess of Halifax. 명예혁명을 주도한 영국 정치가) 아니십니까. 총감님을 모르면 어디 가서 정치인이라 말할 수 없지요. 하하.”

으음. 글쎄요... 전 그냥 막 나가지 않게 뒤에서 잡아끈 거뿐인데.

“그래요. 총감님께서 오늘 이렇게 절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아, 웰즐리 경, 이삭의 민족 명품관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서로 입을 열었다.

“아, 이곳저곳에서 귀동냥으로 들었습니다. 총감께서 운영하시고, 샬럿 공주 전하께서 끼고 계신 반지를 만들었다고 런던에 소문이 자자한 그곳 말이지요. 안 그래도 제 애인까지 그곳에 가자고 한사코 절 졸라대서 참 고민이 많습니다.”

웰즐리 경의 말대로, 이삭의 민족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곧, 재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고.

“알고 계신다니 얘기가 빨리 진행될 것 같군요. 전 이삭의 민족에서 사용하는 가죽과 보석을 웰즐리 경의 도움을 받아 공급받고 싶습니다.”

“으음. 제 도움을 받고 싶으시다면, 동인도회사··· 말씀이시겠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웰즐리 경?”

“하하, 제가 앉아 있는 이 인도감시위원회라는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아신다면 제가 이렇게 쓴웃음을 짓는 이유를 이해하실 겁니다.”

웰즐리 경은 한숨을 크게 내쉰 후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인도회사 놈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글러먹은 건지, 항상 일을 개판으로 벌려놓고 제 놈들이 수습하지 못할 지경까지 일이 커지면 그제야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우리 행정부 눈치를 보며 책상 위에 슬그머니 보고서를 올리기 일쑤입니다.”

“자기들이 멍청하게 차를 팔아서 누구도 차를 안사니까 ‘차법(Tea Act)’을 통과시켜달라고 징징, 결국 ‘차법’이 통과되고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신대륙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막중한 손해로 이어졌지요!”

“게다가 시티 오브 런던의 금융가에 돈은 자꾸만 꿔가면서 어디 쓸 건지 짐작도 안 가는 군대는 왜 유지를 한답니까?”

“군...대요?”

“자그마치 5만입니다. 5만! 어떻게 국왕폐하를 지키는 호위병보다 그 같잖은 뱅골 요새를 지키는 병사가 수십 배란 말입니까!”

“미친놈들, 제깟 놈들이 저지른 멍청한 짓을 왜 우리 행정부가 사사건건 해결해줘야 하는 건지! 총감님도 재무부 수반이셨으니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아시겠지요?!”

“그으... 좀 좆같긴 하죠.”

“좆같음이라! 아주 딱 맞는 말이군요. 그래요, 좆같습니다!”

어우, 이 사람 화끈하구만.

웰즐리 경은 행정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설움을 토해내듯 장장 몇 분 동안 내게 속사포를 쏘아댔다.

“후우, 죄송합니다. 매일 이 답답한 런던 사무실에서 갇혀 지내다가 오랜만에 좀 터놓고 말을 하려니 흥분했군요. 그것보다 가죽과 보석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흐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요. 동인도회사 녀석들이 보통 덕성을 가진 놈들이 아니라...”

“···그렇습니까?”

쓰읍. 여기서 막히면 안 되는데...

그 순간, 웰즐리 경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뛰쳐 들어왔다.

“형님!! ···아, 손님이 있으셨군요. 실, 실례했습니다.”

영국 육군 특유의 붉은 장교복을 입은 젊은이는 날 보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큼큼. 죄송합니다, 총감님. 제 동생 되는 녀석입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동생 분께서 웰즐리 경에게 볼일이 있으신 거 같은데. 전 잠시 생각하지 말고 동생 분과 대화하시지요.”

“역시 신사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웰즐리 경은 내게 감사하단 제스쳐를 취하고, 동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서. 무슨 일이냐.”

“아, 아닙니다. 나중에 형님께서 편하실 때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음. 알겠다. 가보거라.”

웰즐리 경은 자신의 동생이 밖으로 향하자 혀를 끌끌 차며 내게 말했다.

“후우, 동생 녀석이 돈이 떨어졌나보군요.”

“돈이요?”

“예, 우리 웰즐리 가문이 쌓인 빚이 좀 많아서 말입니다. 영지를 판지 오래되었거든요. 하하.”

웰즐리 경은 씁쓸하다는 듯 얘기했다.

나는 그런 웰즐리 경에게 천천히 입을 열고 물었다.

“···웰즐리 경, 혹시 저와 돈 좀 벌어보실 생각 있으십니까?”

“돈 말이십니까?”

“저와 일 하나 같이 하시지요. 겸사겸사 동인도회사에게 목줄도 채울 겸.”

“이거, 흥미가 동하는군요. 총감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