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10)
그레이트브리튼에서 가장 면직물 산업이 발달한 도시인 맨체스터.
그 맨체스터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피그 디스트릿에 자리한 거대한 사냥터는 오늘도 사슴 사냥철을 노리고 왼손에는 말고삐, 오른손에는 라이플을 꼬나 쥔 귀족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타-앙!
또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지천을 울리고, 저 멀리 숲을 나다니던 사슴 한 마리가 붉은 선혈을 흘리며 땅에 털썩 쓰러졌다.
“명중! 명중입니다, 자작님!”
“이야 오늘따라 총이 잘 맞는군! 하하!”
자작이라 불린 귀족은 명중탄을 내고 뜨거운 훈김이 올라오는 총을 자신을 따라온 사환에게 건네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보게, 자네 이번에 신문 보았는가?”
“사냥하다 말고 웬 신문? 갑자기 또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혹시 런던 정치얘기라면 난 질색이니 다른 놈 찾아보게.”
자작은 눈을 찌푸리며 친우의 말에 답했다.
총을 들고 사냥터에 왔으면 얌전히 사슴 사냥이나 할 것이지, 굳이 시끄러운 세상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건 없지 않나.
그러나 자작의 친우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납탄을 총에 재며 자작에게 말했다.
“정치얘기에 해괴한 소리라니. 자네는 날 뭘로 보는 겐가? 하여간 자네가 그렇게 까탈스러우니 이튼스쿨에 케임브리지까지 나왔는데도 나 말고 친구가 없지.”
“뭐야?”
“아무튼 샬럿 공주 전하가 받으셨다는 그 보석 말일세, 프랑스 장인들이 만든 거라더군! 그것도 왕실 출신 장인들 말일세!”
“프랑스? 웬 프랑스?”
“···자네는 눈도 닫고 귀도 닫고 사나? 지금 런던에 기욤 드 툴롱이 와 있는 건 알지?”
“아, 그 왕을 두 번 갈아치운 미친 혁명가 나리? 그건 알고 있네.”
아무리 자작이 북부 맨체스터에서 사슴 사냥 놀이만 한다고 해도, 프랑스에서 대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 귀족이고 상류층인데, 왕을 두 번이나 내쫓아버린 희대의 혁명가 이름을 모르면 말이 되겠는가.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영국에 오면서 데려온 프랑스 장인들 솜씨가 기가 막힌다더군! 공주 전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말 다한 거 아니겠나. 역시 확실히 프랑스 개구리 놈들이 사치스러운 거 하난 잘 만든단 말이야. 난 아직도 애덤 스미스 선생님 따라 프랑스 여행을 갔을 적에 본 베르사유 궁전을 잊지를 못한다네.”
“으음...”
“사실 난 이미 일정을 잡아놨다네. 자네도 이참에 안사람하고 한 번 가보는 게 좋지 않겠나? 잘못하다간 사교모임에서 창피를 당할 게 분명하니 하는 말일세.”
“하아, 이거 또 한바탕 돈이 깨지겠구만.”
자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사환이 장전한 총을 받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비록 조지 3세께서 보위에 오르신 이후 왕실에서는 사치가 줄었다고 해도, 귀족들의 생태란 사치의 생태나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유행에 뒤떨어지거나 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입고 다니는 순간 뒷담화의 대상이 되어버리니, 결국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매 분기마다 억 소리 나는 돈을 사치에 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실 세공인? 그것도 프랑스인? 자신이 아는 귀족들이라면 모두들 ‘이걸 어떻게 참아!’라고 외치며 런던으로 달려갈 것이다.
“쯧, 옷과 장신구를 다 맞추려면 또 몇 주간은 아예 런던에서 생활하게 생겼군.”
사실 뭐... 돈이야 좀 낼 수 있다. 이래 보여도 맨체스터에서 큰 면직물 공장을 차린 자작이 아닌가. 돈 몇 푼이야 노동자들을 좀 더 굴리면 충분할 터였다.
제일 짜증이 나는 건, 자신은 물론 아내와 아이들 몫까지 옷과 장신구를 맞추려면 수일간을 런던에 처박혀서 지내야 한다는 것.
상의, 하의, 모자, 구두, 가방, 악세사리까지. 한 번 뭐 사러 가는 것도 힘든데 그걸 다 언제 돌아다니면서 구한단 말인가. 총이나 말이라면 바로 딱 사버리면 되는데 말이다!
시대 불문하고 장보러 가는 아버지들이 으레 그렇듯, 자작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에 걸린 방아쇠를 세게 잡아당겼다.
타-앙!
“빗나갔습니다! 위로 2인치 올리십시오!”
“이런...”
싱숭생숭한 마음 탓일까 이번에 쏜 탄은 안타깝게도 사슴이 아니라 애먼 땅을 파고 튀어 오르고 말았다.
“쯧, 짐을 꾸려라. 오늘은 사냥할 맛이 영 안 나는구나.”
“예, 자작님.”
기욤 드 툴롱이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잔잔해졌던 영국 귀족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
“어우, 잘 잤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뭉친 어깨를 휘휘 돌려 풀고, 나무가 타들어가는 벽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그리고는 주전자에 든 물이 끓는 동안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미리 계량해놓은 커피콩을 갈아 체 위에 얹었다.
“삐이이이이익!!”
곧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고, 나는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벽난로로 다가가 펄펄 끓는 주전자에 든 뜨거운 물을 커피콩이 담긴 체 위로 조금씩 떨어뜨렸다.
마침내 주전자에 든 뜨거운 물을 몽땅 따라내자, 그 베르사유와 파리의 괴물들 아래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갈려가던 바람에 이제는 먹지 않으면 좀이 돋을 정도로 루틴이 되어버린 기욤 드 툴롱제 커피가 완성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정성스레 만든 기욤 드 툴롱제 커피를 들고 내 침실을 나와 미리 출근해 있던 이삭의 민족 직원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레샬 선생님.”
“좋,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가죽공.
“좋은 아침입니다, 바쉐론 선생님.”
“예, 각하.”
시계공.
“좋은 아침입니다. 호로록.”
“각, 각하! 일어나셨습니까!”
마지막으로 뵈머 씨까지.
나는 현대인의 필수품이자 모닝커피를 후후 불어 한 모금 삼키고, 사무실이자 내 숙소로 사용하는 이삭의 민족 런던 임대건물 2층 창문의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오우. 뵈머 씨, 저건 뭐죠?”
“뭐긴요, 각하! 분노한 손님들 아닙니까!”
“오, 그래요? 재밌네.”
“예, 예? 재··· 미요?”
호로록.
나는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하는 뵈머 씨를 옆에 두고,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또 다시 한 모금 목 뒤로 넘겼다.
이삭의 민족 명품관 앞은 말 그대로 볼 만 했다. 문전성시라는 말이 이런데 쓰이는 구나.
“내가 어디서 온 줄 아오!? 무려 리버풀이오! 리버풀!”
“허, 리버풀에서 온 주제에 무슨 젠체요!? 난 당신의 배는 먼 선덜랜드에서 왔다고!!”
“문 열어!! 문 열란 말이야!!!”
“여, 여러분 이삭의 민족 개점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개점 시간은 무슨! 손님이 왔으면 응당 문을 열어야하는 거 아니오!?”
키야, 역시 마케팅의 힘이란.
아직 입장시간도 아닌데, 이삭의 민족 명품관의 문 앞에 줄을 선 저 높으신 귀족 나리들을 보라지. 이야, 어떻게 보면 저게 다 돈다발 아닌가.
신은 존재하며, 그 이름은 마케팅이며 돈다발의 형태로 세상을 살아간다!
당장에라도 배 터지게 먹은 것만 같아서 흡족한 웃음을 흘리자, 내 옆에 있는 뵈머 씨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 지금이라도 어서 문을 여시지요, 각하!”
“뵈머 씨, 자화자찬이긴 한데. 저 커피 되게 잘 타는 거 같지 않습니까? 아마 에티오피아 왕도 저보단 커피 못 탈걸요.”
“각하, 저 분들은 모두 귀족 아닙니까! 저러다가 기분이 상해서 돌아가면 어찌하시려구요!”
“호로록.”
“아이고! 내가 미쳐!”
뵈머는 이 목석같은 젊은이의 말에 당장에라도 미칠 것만 같아,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자신마저 넋 놓고 있다간 오늘 장사를 공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뵈머는 고개를 세차게 몇 번 흔들어 정신을 차리곤 다시 젊은 사장에게 말했다.
“각하! 이러다간 손님들이 가게 문을 부수고 들어올 지경이라니까요! 이를 어찌합니까?!”
“와. 나 이런 거 좀비영화에서 본 거 같아.”
“각하! 영문 모를 소리만 하지 마시고, 어서 문을 여시지요!!”
“문을 열다니? 그러지 말고, 개점 시간까지 할 거 하고 계십시오.”
“예, 예?!”
손님이 찾아왔는데 문을 열질 않겠다니,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야!! 사장 나와!!”
저렇게 손님들이 화가 났는데?
아니다. 이건 아니다.
뵈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국에서 쫓겨나 눈물을 뚝뚝 흘리며 프랑스행 배에 오르는 자신과 동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각하, 차라리 각하께서 손님들께 한 번 말이라도 해주시지요! 개점 시간에 오픈하시겠다고!”
“뭐, 뵈머 씨께서 그러신다면야.”
나는 다 마신 커피 잔을 창문 밑 공간에 놓고, 뵈머 씨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들어올렸다.
“잠시 담판 좀 짓고 오겠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입니다.”
“드디어 나오셨군! 우리는 저 멀리 선덜랜드에서 왔소!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빨리 들여보내주시구려.”
“우린 데번에서 왔소!”
“난 백작 가문이오!”
이야 환영인파가 참 어마무시한데.
“여러분. 이삭의 민족 명품관은 매일 오전 9시에 열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 주변을 구경하시다가 다시 오시는 걸 부탁드립니다.”
“손님이 왔는데 어떻게 사장이 된 자가 그럴 수 있소?!”
“개점시간은 모든 고객 분들과의 약속이자 사원들과의 약속입니다. 약속을 깨트릴 순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허, 우리는 고객이 아니란 말이오?!”
“물론 고객님들이지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사원들과의 약속이기도 하다고. 그리고 몇 번이나 말씀하셔도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똑같습니다. 9시에 오십시오.”
“아주 배짱장사로군!”
그래.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나는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고, 내게 쏘아붙인 한 귀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배짱장사면 뭐 안됩니까?”
“···뭐요?”
“우리 이삭의 민족 명품관은 유럽,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도 최고급으로 꼽는 재료와 최고 수준의 장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우리 회사만큼의 품질과 멋은 뽑아낼 수 없어요.”
“하, 그런 걸 어떻게 장담한단 말이오? 프랑스인답게 허풍이 심하군!”
“흠, 샬럿 공주 전하도 보는 눈이 없으신 거였군요. 우리 장인들이 만든 루비 은반지를 끼고 다니시던데.”
“···큼.”
난 거짓말 한 적 없다. 최고급 재료(이제 곧 협상으로 공급받을), 최고의 장인이 모여 한땀한땀 만드는 이삭의 민족이라고.
“우리 이삭의 민족은 입는 분의 모든 점을 보고 고객으로 받아드립니다. 지위, 재산, 그러나 그 중 가장 우리가 많이 보는 건 바로 품격이지요. 남을 존중하는 품격 말입니다. 뭐, 이렇게까지 얘기해드렸는데도 계속 고집을 부리신다면야 저희는 안 팔겠습니다.”
본래 명품장사는 다 배짱장사다.
‘당신들이 급에 안 맞으면 안 팔아.’
이런 마인드가 있어야 브랜드의 품질과 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돈 몇 푼 건져보겠다고 제품을 양아치들 손에 팔아넘긴 명품 브랜드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생각해보자.
자, 아시겠습니까? 꼬우면 니들이 만들어 입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