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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9) (155/341)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9)

지금까지는 매우 순조롭다.

내 치밀한 계획 아래에, 이제는 런던 어디에나 ‘샬럿 공주의 혼사’라는 희대의 가십거리에 대한 얘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가십이던 계속 불탈 재료를 던져주지 않는다면 꺼지기 마련인 법.

그리고 본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산으로 들어가야 하고 적장을 사로잡으려면 적진으로 들어 가야하는 법.

희대의 스캔이자 로맨틱한 청춘 남녀의 연애드라마의 다음 편이 나오길 모두가 원하고 있으니, 이제 내가 마지막 관문을 활짝 열어젖혀야지.

“폐하, 차가 참 좋습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 한 기분이군요.”

나는 실로 수십 년 만에 느껴보는 레토르트 녹차 맛을 천천히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려, 이번에 동인도회사에서 새로 들여온 차인데 입에 안 맞으면 큰일 날 뻔했소.”

내 맞은편에 앉아 차를 음미하던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시작이 좋다.

거의 근 두 달에 이르는 조사 결과, 조지 3세는 소탈하기 그지없는 생활과 성격으로 영국 국민들의 신임을 받는 군주이며 가족애가 상당한 사람이었다.

나와 조지 3세가 앉아 만담을 나누는 이 버킹엄 궁만 해도, 자신의 아내인 샤를로테 왕비를 위해 사비를 들여 구매하고 증축한 곳이니 그 넘치는 가족애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나는 버킹엄 궁 별채에 딸린 응접실에서 국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기다가 마침내 샬럿 공주에 대한 얘기를 슬그머니 꺼낼 수 있었다.

사실 아까는 호랑이니 적장이니 말했지만, 그 정도 위험부담이 있는 일도 아니다. 그냥 한 번 찔러봤는데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수준.

“아, 그러고 보니 요즈음 런던에 샬럿 공주 전하에 관한 풍문이 떠돌던데.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폐하?”

“···샬럿 그 아이에 대한 풍문 말이오? 짐은 처음 듣소만?”

조지 3세는 자신의 위엄찬 황금 망토를 들고 있던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이보게, 시종장.”

“예, 폐하. 하명하실 것이 있으시옵나이까.”

“요새 런던 곳곳에 샬럿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다는데, 도대체 어떤 소문인가?”

“그것이···, 상당히 망측한 말이오라...”

“망측하다하여도 한 번 들어나보고 싶군. 대관절 무슨 소문인가?”

시종장은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제 주인의 질문에 답했다.

“한 청년이 샬럿 공주 전하를 연모하여 앓아누웠다고 하옵나이다.”

“···연모? 상사병이다, 이 말인가?! 하하하!!”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이 남에게 사랑받는 걸 꺼려하는 부모는 없듯, 조지 3세는 시종장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었다.

“하하! 그래, 샬럿 그 아이도 이제 스물다섯이니 슬슬 혼처를 구하긴 해야겠지. 시종장, 그 청년의 신분이 어떻게 된다던가?”

“향간에 떠돌기로는 기사 작위를 받은 가문이라 하옵니다.”

“오호.”

조지 3세는 잠시 눈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까지 말동무 삼던 날 향해 말했다.

“기사 작위까지 받은 가문이라면 꾀죄죄한 친구는 아닌 듯 한데, 기욤 총감은 어떻게 생각하오?”

“저야 폐하께서 초대한 객일 뿐인데 감히 폐하의 가정사를 헤아릴 수는 없지요.”

“하하, 프랑스인답지 않게 점잔피우지 말고 한 번 말해보시오.”

기회가 왔다. 집주인이 판을 깔아줬으니 조심스레 집주인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집주인을 구워삶아야 한다.

“프랑스인인 저로서는 꽤나 나쁘지 않은 혼사라 생각하옵니다, 폐하.”

“흐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턱을 쓸어내리는 조지 3세를 향해 말했다.

“사랑을 중시하는 우리 프랑스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상책인 결혼은 두 사람이 모두 사랑하는 결혼이고, 중책은 한 사람이 사랑하는 결혼이며, 하책은 모두가 사랑하지 않는 결혼이라고 말입니다.”

“···계속해보시오.”

“하책인 결혼의 예로, 러시아의 차르인 예카테리나와 표토르 3세를 생각해보시옵소서. 정략결혼을 한 그 두 사람의 생활이 어떠했습니까? 부부 간에 상대방을 내쫓고 추방하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오.”

“중책은 조금 애매합니다만, 사랑을 받는 쪽에게는 괜찮은 결혼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상책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미 폐하와 왕비님 사이야말로 상책에 제일 정확한 예시이니.”

“으음.”

나는 남은 차를 모두 들이켜 마른목을 축이곤 계속 이어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폐하. 샬럿 공주님은 지금 상사병에 빠졌다는 젊은이와 혼사를 치른다면, 중책과 상책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호오.”

“저 멀리 덴마크나 노르웨이에 있을 생면부지의 아돌프 왕자에게 시집보내는 것보단 샬럿 공주께서 행복한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조지 3세는 짧게 신음소리를 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오. 그냥 이곳, 버킹엄에서 평생 나와 왕비와 아이들이 오순도순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때 아니겠습니까, 폐하.”

“적절한 때라니?”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는 조지 3세를 향해 몸을 젖히며 말했다.

“사위를 외국인으로 삼으신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떠나 보내야하지만, 영국인을 사위로 삼으신다면 언제든지 자식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구설수가 나오지는 않겠소?”

“폐하와 제가 마침 동양 차를 마시니 하는 말입니다만, 동양에는 ‘하늘에서 이어준 연’이란 말이 있다더군요.”

“하늘에서 이어준 연이라?”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모습에 그 누가 불평불만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 아아아아주 못된 놈이죠, 암. 그렇고말고.”

씨앗은 뿌렸다. 이제 싹이 날 때까지 기다리면 될 뿐.

***

1792년 11월 초.

런던.

이삭의 민족 임시 사무실.

우리 이삭의 민족에서 주문한 붉은색 비단옷을 입은 귀족은, 왕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보고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John Montagu, 5th Earl of Sandwich)와 그 아들은 조속히 입궐하길 바란다, 라니. 내가 지금 허깨비를 보고 있는 거요?”

“이야. 역시 ‘이삭의 민족 명품관’에서 나온 옷을 입으셔서 그런가, 손을 떠는 모습도 멋지십니다.”

왕가의 사위를 노릴 정도로 명망 높은 귀족이자, 해군경을 배출한 해군 명가 샌드위치 가문의 당주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이를 어찌, 어찌 갚으면 되겠소. 총감!”

“갚을 방법이라?”

나는 예의 반지케이스를 백작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갚을 방법은 이미 제가 소개드리지 않았습니까, 백작님.”

“···정말 이거면 되는 거요? 내 아들놈이 이걸 쓰기만 하면 된다고? 아니, 당신 장사치잖소. 그걸로 입 닫을 리가 없지.”

“대체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내가 해군 생활하면서 본 장사치들은 두 부류였소. 첫째는 악착같이 두 배를 넘게 남겨먹는 인간들, 둘째는 웃는 얼굴로 빚을 지게 만들고 그 세 배를 남겨먹는 이들.”

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은데... 으윽, 라부아지에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도 있었어.

“아무튼 내빼지 말고 어서 말하시오. 내 나중에 세 배로 떼이긴 싫으니.”

샌드위치 백작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얼굴로 내게 쏘아붙였다.

“뭐, 정 백작님께서 마음에 걸리신다면 제가 필요한 사람을 하나 소개시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개라! 이 몸, 샌드위치 백작은 해군성과 토리당에 아는 사람이 지천이오! 누가 필요한지 말만 하시오, 내 모두 찾아드릴 테니!”

왕가와 사돈을 맺게 된 샌드위치 백작은, 기쁜 마음에 제 가슴을 팡팡 치며 내게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동인도회사 쪽에 연줄을 하나 놓고 싶은데, 찾아주실 수 있습니까?”

“···화약이나 초석 관계자처럼 국익에 해가 되는 건 알려줄 수 없소만, 그래도 괜찮소?”

샌드위치 백작은 조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초석은 무슨, 명품관에서 사용할 가죽과 보석을 공급받으려고 하는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야, 거리낄 건 없지. 내 지금 인도감시위원회에 있는 토리당 의원 하나를 알려주겠소.”

“이름이 뭐지요?”

“모닝턴 백작, 리처드 웰즐리(Richard Colley Wellesley, 1st Marquess Wellesley of Norragh). 현 인도감시위원회 최고위원이자 동인도회사에 대한 국정감사를 맡은 젊은 친구요. 우리 토리당에서도 차기 상원으로 몰아주는 사람이니 인물 하나는 확실하오.”

“리처드 웰즐리라.”

이름이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우리 한 번 잘 지내봐요.

***

1792년, 11월 중순.

나날이 추워지는 섬나라 날씨와 다르게, 런던은 화끈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 뭘로 타들어 가냐고?

말해 뭐해. 청춘남녀의 화끈한 연애사지.

런던 T모 신문사에 따르면 그 화끈한 연애의 시작은 이러했다고 한다.

“신,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신, 존 몬태규 주니어 또한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두 분 다 고개를 드시지요.”

““예, 전하!””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건 무엇이지요?”

“아들 녀석이 공주 전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옵니다.”

“어머나? 은에 루비라니.”

“올, 올해로 탄신하신지 25주년(실버 쥬빌리)이라 하여, ‘이삭의 민족’ 명품관에서 특별히 주문했나이다.”

“어머? 센스 있는 분이시군요.”

하여간 뱃사람 가문 아니랄까봐, 샌드위치 백작과 그 아들은 입궐하자마자 샬럿 공주에게 내게 건넨 그 반지를 바쳤더라.

무드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역시 해군보다는 육군이 최고다. 절대 내가 파리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하는 말은 아니야.

아무튼 이 희대의 연애사는 우리의 T모 신문사를 선두로, 파리 곳곳으로 퍼 날라졌고, 덕분에 런던 전역은 이에 대한 얘기로 불타기 시작했다.

[희대의 로맨틱, 샌드위치 주니어!]

[샬럿 공주 전하 만세! 만세!]

[실버 쥬빌리, 공주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다! 이삭의 민족 명품관은 도대체 무엇?]

“어휴, 참으로 다행 아닌가.”

“왜?”

“난 공주께서 스물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않으셔서, 혹여나 문제가 생기셨을까봐 전전긍긍했다네.”

그리고 그 신문기사와 사람들의 입소문이 런던을 불태운 다음날.

“번, 번호표를 뽑아가십시오! 번호표!”

“우리는 지금 두 시간이나 기다렸소! 대체 언제 들어갈 수 있는 거요!”

“삼, 삼십 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제발!”

“내가 누군지 아느냐! 켄싱턴에서 여기까지 밤새 마차를 타고 달려왔단 말이다!”

이삭의 민족 명품관 앞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생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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