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7)
혹시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를 본 적 있는가? 왜, 전 세계를 씹어 먹고 우리의 마음에 영원한 로망으로 남은 반지의 제왕이라던가, 왕좌의 게임이라던가 하는 거 있지 않나.
거기 보면 굉장히 많은 종족이 나온다.
잘난 지들 외엔 다 하찮은 미물로 보는 제국주의자 엘프, 무언가 흉계를 꾸미는 인간, 그리고 수염을 북슬북슬하게 기르고 술잔과 도끼를 휘두르는 드워프까지.
개중 제일 괴팍한 건 뭐니뭐니해도 땅속에 처박혀서 광질만 하느라 성격을 다 버린 게 분명한 드워프들일거다.
아, 왜 갑자기 헛소리냐고? 드워프 마냥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호위병 수백 명들과 도버에서 런던까지 약 120km에 가까운 거리를 부대끼며 이동하면 그런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거든.
마차창문 밖에서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 난쟁이 김리처럼 생긴 사람 수백 명이 치마를 입고 행군한다니깐?
한 번은 잠깐 행군을 멈추고 휴식하던 중에 물어봤었다.
“중령, 그렇게 입고 다니면 안 춥습니까?”
“하하, 저희 스코틀랜드인들은 이거보다 추운 곳에서도 킬트만 입고 산답니다!”
아마 톨킨은 스코틀랜드인들을 보고 드워프라는 종족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실존인물하고 겹치면 안 되니까 키는 좀 작게 만든 거고.
근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차 안에 처박힌 내가 한창 헛소리를 머릿속에서 주워섬기며 시간을 녹이고 있을 때, 마차 창문 너머로 누군가 다가와 창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각하, 곧 버킹엄 궁에 도착합니다. 국왕 폐하를 알현할 준비를 하시지요.”
“고맙습니다, 중령. 이제 헤어지겠군요. 일주일 간 고생 많았습니다. 나중에 프랑스로 올 일이 있다면 우리 회사로 찾아오세요. 제가 책임지고 파리 풀코스를 대접해드리겠습니다.”
“하하, 예. 꼭 찾아가겠습니다, 각하.”
당장에라도 저 울끈불끈한 몸으로 사람을 반으로 접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스코틀랜드인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쓰읍, 이제 더 작별이라고 생각하니 저 덥수룩한 수염과 치마가 의외로 나쁘지 않은 패션 아이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정이라는 건가?
버킹엄 궁을 지키는 근위병들이 나와 하얀색 창살을 열고 내 마차를 통과시키고, 개화 시기가 끝나고 잎이 떨어져 조금은 미를 잃어버린 장미 밭과 정원을 지나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각하, 대영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국왕 폐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으로 보이는 귀족의 안내를 따라 버킹엄 궁 안으로 들어가니, 그 말처럼 금색 옷을 두른 장년의 남자가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총감 각하, 국왕 폐하십니다.”
“그레이트브리튼에 온 걸 환영하오, 프랑스인. 짐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인 조지라고 하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영국의 왕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모습에 조지라는 국왕은 흥미롭다는 듯 조그마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허허, 다행히도 시종장이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구려.”
“폐, 폐하...!!”
날 여기까지 데려온 시종장은 왕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글쎄, 이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 아오? 왕정을 혐오하는 기욤 총감이 날 공격할 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더군!! 하하하!!”
나는 왕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데려온 시종장을 흘겨보았다.
“큼, 큼큼...!!”
“허허, 그보다 두 명의 루이를 날려버린 자가 고개를 숙이다니, 생각해보니 짐도 이제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싶구려!”
“폐, 폐, 폐하...!!!”
“농이오, 농. 하여간 자네들은 사소한 일에도 웃어넘길 줄 모르니 원. 안 그렇소, 기욤?”
어우. 어디 정신이 좀 회까닥 돌은 것도 아니고 이 아저씨 농담 수준이 아찔하네.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야.
***
1792년 10월 25일.
대영제국, 런던.
버킹엄 궁전.
“프랑스왕국의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각하의 대영제국 방문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나는 웨이터가 따라준 위스키를 목 뒤로 삼키며 말했다. 다만 다 털어 넣는 건 아니고 아아아아주 쬐끔만.
첫날 국왕이라는 자를 알현한 다음날, 날 위해 준비했다는 환영행사에 내가 빠질 수는 없으니 참석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면 실수가 나올 수도 있으니 자제해야하지 않겠나.
“어떻습니까, 각하. 위스키도 상당히 먹을 만하지요?”
“이야, 웬만한 프랑스 와인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아니. 사실 별로 맛없다.
너희 영국인들 땅에는 포도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술은 포도주가 최고고, 개중 최고는 프랑스산이거든. 쯧쯧 포도주가 없다니, 이 얼마나 가엾은 영국인들인가.
“이번엔 이것도 한 번 드셔보시지요. 우리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가 만든 요리입니다.”
“······어, 음, 예. 정말 맛있겠네요. 재료가... 뭔가요?”
“하하하! 직접 음미하면서 알아 맞추시는 건 어떠십니까? 자자! 어서 드셔보시지요!”
‘아잇 씻팔!! 그딴 음식조무사 당장 저 멀리 치우지 못해?!’
나는 목젖 끝까지 올라온 화를 꾹꾹 누르고, 그 대신 혀를 입안에서 요리조리 풀었다.
“어, 우, 정말, 웬만한, 프랑스 요리보다, 맛, 있는, 데요?”
뭐, 물론 약간의 위기가 있었지만, 이 정도면 누가 봐도 훌륭한 립 서비스일 테지.
아니, 근데 감히 저따구 음식으로 프랑스에 비비려 하는 게 말이 되나? 내 안의 맷돌 손잡이인 어이가 가출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프로페셔널한 사업가 아닌가. 속으로는 사이다를 내뱉고 싶어도 겉으로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거랑 자존심 굽히는 데에는 이 세상 전체에 날 따라올 사람이 없다. 나처럼 참을성 많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암, 그렇고말고.
이게 보통 기회도 아니고, 실수하면 저어엉말로 큰일 난단 말이지.
서로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은 현대의 높으신 정치인들과 정재계 거물들에게 조용한 최고급 한정식집이 있다면, 18세기의 높으신 귀족 분들에게는 바로 이런 사교모임이 있다.
서로 하하호호 웃으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한 잔하고.
‘아, 우리 집 아들 녀석이 이번에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어디 좋은 처자 없습니까, 자작님?’
‘듣자하니, 모 백작님 집 딸이 이번에 혼처를 구한다고 하더군요. 그 분은 어떠십니까?’
‘좋군요! 제가 이 빚은 다음에 넉넉하게 갚겠습니다.’
혼사도 구하고.
‘안녕하십니까, 숙녀 분. 너무 아름다우셔서 그대에게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맛, 그래도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뜨거운 사랑에 불타는 남녀들의 만남의 장이기도 하고.
‘저 치들 입은 꼴 좀 보라지! 저렇게 멋을 내팽겨치고 다녀서야 어찌 귀족이라 할 수 있겠나?’
‘이하동문입니다, 공작님. 이잉 쯧쯧쯧.’
험담도 뒤에서 좀 까주고.
그 모든 걸 꾹꾹 눌러 담은 게 바로 이 사교모임이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교모임,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교모임에 오신 모든 신사, 숙녀 분들이 모두 우리 명품 사업의 고객님이시자 쓸 만한 정보를 가진 분들 아니겠나.
나는 위스키가 담긴 잔을 하나 들고,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무도회장을 거닐며 타겟을 찾기 시작했다.
말이 많고, 소문을 팍팍 퍼트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뭐, 겸사겸사 위에 줄이 좀 많거나 동인도회사 쪽에 연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저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그래서 이번에 캔터버리 공작이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저번 무도회 때 만났던 신사 분 있잖아요.”
“···다음에 전열함을 더 만들자고 하면 웨스트민스트에서 결투 신청을 받지 않을까?”
음, 위스키를 든 채 이리저리 남들 말을 엿들으러 다니니까 007같은 스파이가 된 기분이네.
그렇게 한참 동안 무도회장 전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내 귀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아들 녀석을 왕실에 장가보내려 하는데, 뭔가 뾰족한 수가 있겠나?”
“엘리자베스 공주님께요?”
“무슨 소리? 엘리자베스 공주께는 이미 청혼자가 드글드글한데, 성공률을 높이려면 아무래도 샬럿 공주께 보내야하지 않겠나.”
“음... 그도 그렇겠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흠. 공주에게 청혼을 할 만큼 명망 높은 귀족가라.
빙고.
나는 목을 두어 번 이리저리 꺾어서 풀고, 혀도 허공에서 몇 번 굴린 후 천천히 무도회장 구석에서 사담을 주고받던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큼큼.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시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자네와 연이 있는 사이인가?”
“아니오. 전 모르는 분입니다만... 혹시 누구신지?”
나는 날 향해 의문을 표시하는 두 귀족 나리들을 향해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오! 이 행사의 주인공이셨구려! 반갑소!”
“만나서 반갑습니다, 각하.”
두 귀족은 날 향해 나란히 손을 내밀었고, 나 또한 두 사람의 손을 순서대로 맞잡고 반가움을 담아 세차게 흔들어주었다.
“그런데, 주인공이신 분께서 어찌 이런 구석까지 오셨소?”
“아니, 뭐. 사람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서 말입니다.”
“허허, 보기와 다르게 취미가 이상하시구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분께서 왜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와 인사를 하시는 게요?”
아들을 공주에게 장가보내겠다는 말을 내뱉은 높은 귀족 나리께서는 날 향해 물었다.
“듣고자 해서 들은 것은 아닙니다만,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음, 혼담이야 그리 귀한 말도 아니지 않소?”
귀족은 내가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게 이상하다는 듯, 턱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혼담이야 흔하지만, 왕가와의 혼담이 오고가는 일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허허, 그렇소이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 상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나는 두 귀족이 앉은 테이블에 있는 여분의 의자를 빼서 그 위에 앉으며 말했다.
자고로 최고의 광고는 바로 드라마, 그 중에서도 로맨틱 드라마 아니겠나.
***
같은 시각, 시티 오브 런던.
램버스 공업 단지.
“근데 형씨는 뭔데 우리한테 그런 걸 물어보는 거요? 퇴근 시간이 언제니, 출근은 언제 하냐니, 밥은 뭘 먹느냐니. 뭐, 옆 동네 공장장이 시키기라도 했소?”
“뭐, 이러던 저러던 변하는 건 없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무튼 돈 고맙수다. 오늘 저녁엔 럼주 한 잔 곁들일 수 있겠구만.”
“내일도 한 번 더 물어보러 오겠습니다.”
“나야 그러면 고맙지. 헤헤!”
영국인 노동자는 검댕이가 묻은 얼굴을 소매로 닦으며, 플로리앙이 준 동전을 주머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