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6)
1792년 10월 13일.
영불해협, 1급 104문 전열함 HMS 빅토리.
“도버 항이 보인다! 도버 항이 보인다!”
마스트 위에서 망원경을 든 채 견시를 보던 수병은 돛 아래를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영국 왕립해군 특유의 금색 테가 박힌 푸른 외투를 입은 항해 장교는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쟀다.
“어디보자. 출발한 지 약 2시간 반 가량 지났으니, 대략 3마일 안 밖으로 남았겠군.”
항해 장교는 회중시계를 다시 품 속으로 집어넣고 희끄무레한 해무로 뒤덮인 선상을 해치고 나갔다.
맑은 날 같았다면 맨눈으로도 도버에서 칼레를, 칼레에서 도버를 볼 수 있었겠지만, 이 바다라는 곳이 언제 그렇게 편안한 곳이었던가? 참으로 지랄 맞게 변화무쌍한 곳이 바로 바다였다.
“상사, 수병들에게 입항 준비시키게. 곧 도버 항이야.”
“예, 대위 님. 입항 15분 전, 입항 15분 전. 갑판병, 홋줄 준비하도록!”
수병들이 사람 몸통만큼 두꺼운 밧줄을 어깨에 이고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바다와 배의 ‘ㅂ’자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탄 HMS 빅토리를 지휘하는 해군 중장은 누구나 아는 그 사실을 꼭 나에게 직접 알려주고 싶었나보다.
“총감 각하, 곧 도착입니다. 일행 분들과 채비하시지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비스 경.”
“별말씀을, 대영제국에서 부디 좋은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군요. 아, 제가 여행 팁을 하나 드리자면, 런던 코벤트 가든에 해물요리가 일품인 곳이 있답니다. 런던에 도착하시면 한 번 방문해 보시지요. 이 존 저비스의 단골 레스토랑이랍니다.”
“따로 꼭 메모해놔야겠군요.”
음, 반짝 반짝 빛나는 작은 별을 세 개나 떡하니 견장에 얹은 제독이 직접 내 선실까지 찾아오다니. 이거 뭐랄까, 기분이 꽤 이상야릇하다.
대형마트에 장보러 갔는데 점장이 직접 내 카트 옆에 와서 ‘오늘 들어온 애호박 상태가 정말 좋답니다. 집에 가서 저녁으로 호박전을 부쳐 먹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라고 속삭이는 느낌이랄까.
역시 사람은 일단 출세하고 봐야하는 것 같다.
최전방 철책으로 갑자기 순찰을 온 무궁화 두 개에게 얼어붙었던 과거와 해군 제독에게 맛집 풀코스 추천을 받는 지금을 비교하면, 누가 봐도 후자가 더 나아보이지 않는가.
“저비스 제독님, 5분 후 입항입니다. 이제 슬슬 준비하시지요.”
“그래 알겠네, 부관. 각하, 그러면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회중시계를 열고 채근하는 부관의 말에, 제독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모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물론 나 또한 고개를 살짝 숙여 제독에게 예를 표했다.
“어디보자, 입항 5분 전이라.”
배에 타고 있는 우리 이삭의 민족 사원(진) 여러분에게 사장의 사랑과 관심이 담긴 훈화말씀 한 번 해줄 시간은 충분하겠어.
***
마라톤 코스 42.195 킬로미터.
프랑스와 영국 사이 도버 해협의 길이 약 42 킬로미터.
정말 딱 마라톤 코스만큼 떨어진 도버 해협 가운데에 둥둥 뜬 채로, 짜디 짠 바다내음을 두 시간 넘게 콧속 가득히 채워 넣은 이삭의 민족 명품관 사원(진)들의 감상은 가지각색이었다.
“이야, 저기가 영국이구만?!”
“듣기로는 영국 음식이 정말 더럽게 맛없다고 하던데.”
‘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 관심이 동한 이들.
“아이고, 이렇게 습할 줄 알았으면 가죽이 눅눅해지지 않게 솜이라도 넉넉히 챙겨오는 것을!!”
“흐음. 외국이라 그런가, 우리 프랑스식 건축물과 형태가 좀 다르게 생긴 거 같지 않소? 직선을 더 많이 쓴다고 해야 하나?”
‘외국’이니 뭐니 그런 것보단 일에 더 신경이 쓰이는 이들.
“젠장, 영국이고 나발이고 어서 빨리 육지에 내렸으면 좋겠구만!”
“우웨웩! 내 다신 배를 타나봐라!!”
사장 기욤이 그렇게 뱃멀미를 경고하고 친히 시중 가격보다 70퍼센트 싼 가격으로 멀미약을 팔아주었건만, 돈을 아끼겠다는 불측한 이유로 거절하고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받는 이들까지.
이잉... 그러게 내가 싸게 줄 때 곱게 사지. 쯧쯧. 여러분들이 선택한 멀미입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십쇼.
아무튼 이삭의 민족 소속 사원들이 있는 선실들은 각기 나름의 이유로 분주할 따름이었다.
“플로리앙 씨, 뵈머 씨, 사람들을 모두 제 선실로 모아주십시오. 배가 육지에 닿기 전에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갑시다.”
““예, 각하.””
나와 플로리앙 씨, 그리고 뵈머 씨의 부름에, 방금 전까지 각자의 사정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장인들은 다들 내 선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몇몇은 뱃멀미로 고통 받는 탓에 얼굴이 퍼렇게 질려있었지만, 근 3년 간 풀죽을 끓여먹고 벌어먹기 위해 막노동을 하던 대부분의 장인들은 앞으로의 일이 상당히 기대되는 듯,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마지막 사람이 선실 문을 닫고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다들 모이신 거 맞습니까?”
“““예, 각하!”””
“아주 좋군요.”
나는 구석에 미리 풀어놨던 두루마리를 선실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게 벽에 올려놓고 말했다.
활짝 펴진 두루마리에는 ‘카탈로그 판매’라는, 장인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와 함께 여러 개념들이 간략하게 적혀져 있었다.
이미 프랑스 파리에서 여러 번 교육해준 내용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머릿속에 때려 박아줘야 확실하지 않겠나.
나는 선실 책상에 놓인 깃펜 하나를 들고, PPT 발표 때 쓰는 레이저포인터처럼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판매방식은 여러분께 미리 얘기해드렸던 것처럼 ‘카탈로그’식입니다. 기존에 완성된 상품을 고객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판매하는 방식이 아니란 말이지요.”
카탈로그, 다른 말로는 팜플렛.
우리가 매일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힘겹게 출근하고 밤이 돼서야 집에 돌아오면, 현관문 손잡이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친구 말이다.
흔하게는 대형마트 광고단지부터 시작해서 드물게는 아울렛 광고까지.
기업은 굳이 물품을 코앞에 가져다주지 않아도 되고, 소비자는 집에서 간편하게 사고 싶은 물건을 고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카탈로그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재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많은 제품을 만들어 내다 팔수도 없고, 게다가 프랑스에서 영국까지 운송하는 운송비만 해도 상당한 운임이 동반됩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십니까?”
“““예, 각하.”””
좋아, 모두들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아하니 계속 이어 말해도 되겠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견본품을 만드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파는 게 아니라, 선전할 견본품 말이지요.”
비록 우리가 재료가 후달리긴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이 사람들이 창고에 조금씩 꼬불쳐둔 재료와 내가 어떻게든 구한 재료를 합하면 어떻게든 견본품 한 두 개씩은 만들어 볼 여력이 되더라.
“우리는 사람들에게 선주문 식으로 제품을 판매할 건데, 그러기 위해선 ‘아, 이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구나.’하고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견본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카탈로그 판매 방식이 익숙해진 현대와 다르게, 지금은 아직 그런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18세기다.
종이 책자만 들고 가서 ‘우리가 이런 제품을 만드는데 사실래요?’라고 말하면 당연히 ‘내가 뭘 믿고 돈을 주냐? 너 사기꾼이지?’라는 소리를 들을 게 불 보듯 뻔하다.
만약 프랑스였다면 ‘마, 니 재무총감 기욤 모르나!?’하면 ‘아, 총감님이셨습니까? 그럼 믿을 만하지요.’라면서 해결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엄연히 영국은 외국이다. 내 이름이 안 먹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단 말이지.
그러니 적어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견본품 정도는 들고 가야할 터.
견본품을 토대로 주문을 받고, 만들어서 판다면 재료를 극한까지 쥐어짜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총감 각하, 하지만 남은 재료마저 다 쓰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건 여러분이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그건 제가 동인도회사를 구워삶든 협박을 하던 무조건 가지고 올 테니, 여러분은 ‘우리 콧대 높은 영국인 귀족 나리 분들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우리 제품을 팔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하십시오.”
“예, 각하!”
“좋습니다, 이제 다들 하선할 준비 하시죠.”
***
대영제국, 도버 항구.
“국왕 폐하의 손님을 향해 경례!”
배에서 뭍에 댄 나무판자를 밟고 도버 항에 내리자마자, 스코틀랜드 척탄병인지 뭔지 치마 입은 남정네들의 경례를 받게 된 나는 그에 맞춰 손을 두어 번 흔들어주었다.
우리 일행이 모두 배에서 내리자, 딱 봐도 장교로 보이는 두어 명이 다가와 내게 입을 열었다.
“각하, 이 마차에 타시면 됩니다.”
“잠시 일행과 말 좀 나누고 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각하.”
나는 장교들을 잠시 마차 쪽에 세워놓고, 플로리앙 씨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님.”
“런던에 도착하고 나면 아마 전 이곳저곳 불려 다니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겠지요.”
플로리앙 씨는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국 국왕과 수상이라는 자는 나를 귀빈으로 초청했다. 그 말은 즉, 나한테 호기심이 있다는 거고. 그자들이 내게 품은 호기심을 풀기 전까지는 이래저래 행동하기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런데 내가 영국에 팔아먹고자 하는 건 일단 두 가지다.
첫째는 이삭의 민족의 근본인 간편식사 체인점, 둘째는 명품인데. 딱 보기에도 둘 사이의 괴리감이 굉장하지 않은가.
수상 나리 및 국왕, 그리고 높으신 귀족 분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같이 다닌다면야, 명품정도는 ‘아, 제가 이번에 써봤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하나 사실?’ 이러면서 넌지시 팔아먹을 건덕지가 있겠지만, 간편식사는 서민들을 공략해야 하는 거라 궤가 다르지 않나.
“그러니 미리 런던 서민들의 생태를 조사해 주시겠습니까?”
“음,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보고서까지 써서 올려드리죠.”
“아주 좋습니다.”
플로리앙 씨와 얘기를 끝낸 난, 다시 발걸음을 돌려 날 기다리던 척탄병 장교들을 향해 걸어갔다.
"자, 출발하시죠."
“각하, 얘기가 잘 끝나셨다면 지금부터는 저희 스코틀랜드 척탄병들이 안전히 런던까지 모시겠습니다!”
“귀국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한 척탄병 중령은 내 말에 고개를 숙이고, 대열의 앞으로 향했다.
“스코틀랜드 척탄병! 런던을 향해! 앞으로 가!”
“Yes, sir!!”
“어우 도저히 못 보겠다 이거.”
나는 마차에 탄 채, 치마 입은 남정네들을 보지 않기 위해 마차 창문을 천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