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5)
“여보, 오늘도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아침이라도 든든히 먹고 가요.”
“여보, 내가 지금 한가롭게 밥 먹을 때가 아니야. 이번 일이 잘 안 풀리면 이 저택도 담보로 넘어갈 판 아닌가. 뭐라도 해야지.”
카를 아우구스트 뵈머는 신발 뒤꿈치에 구둣주걱을 넣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예순 살인 뵈머 자신의 생애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긁어모아 영국행 배에 태워야 하지 않겠는가.
“늦어도 저녁 10시까지는 들어올 테니 걱정 말게.”
“조심해서 다녀와요.”
“그래, 나 다녀오리다.”
뵈머는 아내의 손을 한 번 따스하게 잡아주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크게 숨을 들이키자 가을의 선선한 공기가 뵈머의 폐 속을 상쾌하게 훑고 지나갔다.
“어디보자, 어디부터 가야하나?”
뵈머는 옛 왕실 세공인 시절, 친우들의 주소를 적어놓은 수첩을 펼치며 말했다.
“몽고트로이가 31번지부터 가봐야겠군. 이보게, 마부! 나 좀 태워주시게!”
***
“······자네, 그게 참말인가? 기욤 총감이 우릴 원한다고?”
“당연하지! 왕실 보석 세공인 뵈머가 한 입으로 두 말 하겠는가?! 어서 짐 챙기게!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영국에 가서 우리가 ”
뵈머는 근 5년 만에 보는 친우의 손을 세차게 흔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가게를 비워놓는 게 맞는 건가 싶네만.”
“싫으면 말게,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대신 나중에 왜 안 데려갔냐고 말이나 하지 말게.”
“아, 아니 이 사람아. 내가 안 간다는 게 아니고오...”
“10, 9, 8···.”
“거, 거기 딱 기다려보게! 내 바로 짐을 꾸려오겠네!”
보석.
“아니, 뵈머 선생님 아니십니까? 용케 안 굶어죽으셨군요!”
“오, 마레샬(monsieur marechal)!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지냈는가?!”
“하하... 뭐, 죽지 못해 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일거리 하나를 받았는데, 자네가 여유롭다면 같이 하고 싶어서 왔네.”
“여유는 무슨, 당장 굶어죽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래? 그러면 할 수 있는 게지?”
“그럼요. 뭘 마다하겠습니까.”
“자네 혹시 총감 각하와 일 하나 해보지 않겠나?”
의류와 잡화.
“어서옵쇼! 어디로 모셔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손님!”
“혹시 우편배달도 가능하오?”
“물론입죠! 돈만 주시면 바다 건너 영국만 빼고 다 가드립니다요.”
“이 편지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장 마크 바쉐론(Jean-Marc Vacheron) 선생께 전해주시오. 제네바에서 가장 큰 시계판매점을 찾으면 될 거요.”
“예이!”
“누구시오?”
“바쉐론 선생 맞으십니까?”
“맞소만.”
“프랑스 파리에서 뵈머라는 분이 보내서 왔습니다. 여기 편지입니다.”
“뵈머? 아, 그 보석 세공인 선생 말하는 게로군. 어디보자, 허?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이 고급 부띠끄 사업을 구상 중이라! 이거 보통 일이 아니로군! 알렉상드르, 내 잠시 파리에 갔다 오마.”
시계.
뵈머는 수십 년간 왕실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모든 인맥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
세상에나. 이거 보통 동아줄이 아니었나봐.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뵈머 씨의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하... 하하!! 뵈머 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허허, 과찬이옵나이다. 각하.”
“정말 어마어마하군요. 어마어마해요.”
내 책상 가득히 쌓여 있는 저 많은 신상명세서를 보게 된 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으로 거의 백 명에 달하는 인재를 긁어모아오다니, 역시 학연 혈연 지연 다음은 동종 업계 종사자라 이건가.
나는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와인 잔 두 개에 나란히 따른 뒤 한 잔을 뵈머 씨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받으시죠. 수고가 정말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나와 뵈머 씨는 나란히 잔을 들어 올린 후 목 뒤로 동시에 포도주를 넘겼다.
“어떻습니까, 품질이 꽤 괜찮죠?”
“각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정말 좋은 상품이군요. 허허!”
그렇게 한동안 우리 두 사람은 향긋한 와인 향을 맡으며 포도주 한 병을 말끔히 비워냈다.
본디 술이 좀 들어가야 진솔한 이야기가 되는 법. 나는 두 번째 포도주의 코르크 마개를 딴 뒤, 뵈머 씨의 잔에 따라주며 입을 열었다.
“뵈머 씨.”
“예, 각하.”
“뵈머 씨가 생각하시기에 이 중 우리가 반드시 품고 가야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저 사람들을 모두 고용하면 그 월급만 어마어마한 값이 나갈 게 분명하지 않나.
딱 일당백, 최고 수준의 전문가만 뽑아서 꾸리는 게 제일 상책이지.
“으음. 다들 실력이 출중한지라, 쉽게 우열을 가릴 수는 없겠지만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명품관’이라는 틀을 맞추시고자 하신다면 의류 쪽에서는 마레샬, 잡화와 시계 쪽에서는 바쉐론 선생을 무조건 모셔 와야 합니다.”
“마레샬, 바쉐론이라.”
나는 잠시 책상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다가 천천히 뵈머 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뵈머 씨. 그 두 사람 실력이 그렇게 말하실 만큼 훌륭합니까?”
“마레샬은 파리 최고의 가죽장인이자 디자이너입니다. 바쉐론 선생은 스위스를 통틀어 유럽 최고의 시계장인(cabinotier)이지요.”
“오호. 무조건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신 이유가 있군요.”
가죽장인에 의류 디자이너, 시계장인이면 무조건 데려와야 할 값어치가 차고 넘치지.
저 두 사람은 반드시 따로 중요대상이라고 메모해놔야겠어
나는 다시 책상을 톡톡 두들기다가 뵈머 씨에게 얘기했다.
“그러면 뵈머 씨, 이제 우리가 인재 문제는 해결된 겁니까.”
뵈머 씨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날 향해 말했다.
“그렇지요, 각하. 저 사람들이라면 각하께서 상상하시는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기 충분할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업에 걸림돌이 될 만 한 일은 모두 끝난 겁니까?”
뵈머 씨는 내 말에 움찔하더니,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합니다. 각하.”
“뭔가요?”
“기존에 우리에게 보석이나 고급옷감을 공급하던 유통망이 혁명 이후 없어지다시피 했습니다.”
유통망이 없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청천벽력인가.
“···유통망이 아예 없습니까?”
“있었는데, 이제 없어졌습니다.”
아, 이건 좀 골치 아픈데.
나는 콧잔등이 스트레스 때문에 뻐근해지는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
혁명 이전 대부분의 무역상이나 유통업자들은 모두 담합을 밥 먹듯이 했다. 물건이 싸면 담합해서 올려버리고, 물건이 비싸서 원성이 자자해도 절대 안 내리는 당연, 어차피 모든 상인들이 담합을 하니 소비자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값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스크루지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악독한 담합 끝에 폭발한 프랑스 평민들은 앵발리드 무기고에서 소총을 탈취한 뒤, 이 돈에 미친 자들이 사는 집으로 쳐들어갔고.
결국 담합에 가담했던 악명 높은 상인들과 유통업자들은 시민들의 불꽃 죽창과 정의의 납탄에 맞아 명을 달리한 사람이 부지기수, 대충 몸과 패물만 챙겨 국외로 도망간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이제 정국이 안정되면서 많은 유통망이 복구되긴 했지만 대부분은 생필품 위주, 사치품은 언감생심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사치품을 실어 나를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밀 한 섬, 귀리 일 그램이 모자란데 말이야.
게다가 특히 사치품 유통을 하던 작자들의 대부분은 구체제 귀족, 봉건제를 지지하던 소위 ‘반동’들이었으니 혁명 이후 3년이 다되도록 사치품 원자재들에 대한 유통망은 아직도 혁명 이전처럼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유통망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 유통망이 없다-라는 건 곧, 안정적인 원자재 수급이 어렵다는 뜻이다.
안정적인 원자재 수급이 안 된다면, 생산과 판매라는 톱니바퀴가 때때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고. 그러면 기업은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임금과 시간은 계속해서 들어가는데 생산과 판매가 안 되니 당연히 손해를 보기 마련이니 말이다.
럭셔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한 이상, 어떻게 해서든지 이 유통망을 확보하거나 아니면 새로 개척해야할 터.
그나마 다행인 건, 일단 한 번 가져다가 팔정도의 재료는 뵈머 씨의 창고에 남아있었다는 거다. 이제 그 재료를 모두 소진한 뒤가 문제지.
기껏 루트를 뚫어놨는데 원자재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한철장사로 이 사업을 끝낼 수는 없지 않나.
그렇죠? 플로리앙 씨?
“아니.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업도 아니고, 이제 처음 해보는 일인데 유통망까지 구하자구요? 쌩으로 맨바닥에 머리를 가져다 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게 가능한 겁니까. 사장님?”
우리의 플로리앙 씨는
“그러니까 플로리앙 씨와 제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보자. 이거지요.”
“아니, 왜 항상 일은 사장님이 저질러 놓으시고 저한테 일을 떠맡기십니까?”
“우린 전우조잖아요. 전우조.”
“전우조는 또 무슨 빌어먹을 헛소리이십니까?”
플로리앙 씨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내게 쏘아붙였다.
“큼큼. 부사장 월급 받아가려면 사장을 열심히 보좌하셔야죠.”
“···젠장, 반박할 수가 없군요.”
방금 전까지 댓 발 튀어나왔던 입을 도로 들어가게 만들다니, 역시 돈은 위대하다.
돈의 힘을 이용해 가볍게 사내반란을 진압한 나는 플로리앙 씨와 함께 재무부에서 빌려온 무역장부를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고급 옷감 기타 등등.
“이것도 저것도, 대부분의 보석 산지들이 영국 동인도회사 소유군요.”
“인도에서 워낙 막대한 부를 빨아들이지 않습니까.”
무역장부와 세계지도를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다.
이 영국 해적 놈들은 마치 전염병마냥 전 세계 곳곳에 꿀자리란 꿀자리에 다 알을 박아놓고 값비싼 물건에 모두 그 흉측한 유니언 잭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국 산 보석과 옷감을 공급받는 게 제일 쉬울 것 같습니다. 아니, 애초에 영국 산 보석을 제외하면 안정적인 수급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쓰읍. 일 났네.”
아무리 생각해도 안정적인 원자재를 받아내려면, 답이 한 가지 뿐이다.
나는 플로리앙 씨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영국에 가서 동인도회사 쪽과 거래를 터야겠습니다.”
“그건 좋습니다만, 뵈머 씨를 제외한 장인들 중 재료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재료를 나누기에는 안 그래도 빠듯하지 않습니까.”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플로리앙 씨. 혹시 카탈로그 판매라고 들어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