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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4) (150/341)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4)

“총감 각하께오서 미천한 소인의 말을 직접 들어주시고자 친히 오시다니, 이 뵈머는 그저 각하의 은혜에 감개무량할 따름이옵나이다!”

딱 봐도 집에 나만한 손자가 있을 법한 카를 아우구스트 뵈머 씨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마치 왕을 접견하는 신하마냥 고개를 조아리며 날 향해 말했다.

“어... 그, 예에.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적어도 나이차가 마흔 살은 넘을 것 같은 노인에게 갑자기 절을 받게 된 나는, 내면의 유교 탈레반이 움찔거리는 걸 막아내고서 뵈머라는 노인을 향해 손을 건넸다.

“총감 각하, 망극하옵니다!”

“······미치겠네.”

그만! 그만해!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자꾸 그러시면 수직적인 한국식 유교사회에 길들여진 내 또 다른 자아가 불편함을 호소한단 말입니다.

“그, 그냥 기욤 씨라고 부르시지요. 이제 전 재무총감이 아니라 그냥 일개 사업가일 뿐입니다.”

“아니, 기욤 씨라니요! 어떻게 각하에게 그런 막돼먹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디 청을 거두어주십시오!”

뵈머 씨는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다시 무릎을 꿇으며 내게 간곡히 말했다.

“각하, 청을 거두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냥... 원하는 대로 부르십시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감사하옵나이다, 각하!”

우리의 뵈머 씨는 저 말을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릎을 땅에 철썩 붙이고 있었다.

젠장, 최소한 무릎을 떼거나 고개라도 들고 말해주시면 참 좋을 거 같은데 말이지.

“일단 일어서시고, 의자에 앉으시죠. 앉아서 얘기합시다. 제발.”

“황공하옵나이다!”

“······.”

시발. 그만해.

***

“그러니 참으로 각하의 은혜는 하늘과 같아 온 프랑스의 만민이 넓게 우러러···.”

“······예에.”

나는 이제 머리를 완전히 의자에 기대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끔찍하다.

뵈머 이 사람. 사실 사업가가 아니라 음유시인이거나 기자 아닌가?

어떻게 된 게 자리에 앉고서 거의 근 한 시간이 될 때까지 나에 대한 찬가만을 읊어댈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유선 옆에 있던 희대의 간신 황호조차도 이 정도로 용비어천가를 부를 수는 없지 않았을까.

“그, 그만하시고. 무슨 일 때문에 절 찾아오셨는지부터 얘기합시다. 뵈머 씨.”

“···아, 예. 각하. 여부가 있겠나이까.”

방금 전까지 용비어천가를 읊어대던 뵈머 씨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 각하께오서 이번에 영국에 방문을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사옵니다.”

“아, 벌써 시내에 소문이 퍼졌습니까? 그런데 제가 영국에 가는 것과 뵈머 씨가 절 찾아온 거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요?”

“혹시 이 뵈머도 각하의 여정에 동행할 수 있을지 해서...”

“예?”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뵈머 씨는 대경(大驚)한 얼굴로 서둘러 말했다.

“결, 결코 악한 마음을 품거나 삿된 목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옵나이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아니, 제가 무슨 사신도 아니고 왜 자꾸 무릎을 땅에 박으려 하십니까? 다만 영국에 무슨 볼 일이 있으시길래 그러는 건지 조금 궁금하군요.”

“그것이...”

“뵈머 씨, 전 솔직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내 말에 뵈머 씨는 잠시 쭈뼛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실 보석 세공인이라는 빛나는 직함과 영광스러웠던 과거, 혁명이라는 희대의 사건 이후 손님이 뚝 끊겨버린 자신의 고급 보석가게, 그리고 창고 한편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재고까지.

“영국에 가면 그래도 재고라도 어떻게 처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사옵니다. 각하.”

“그렇군요. 진즉에 이렇게 탁 다 털어놓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 그러면 영국에 데려가 주시는 것이옵니까?”

“당장에 답변을 드리긴 어렵고,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렇사옵니까.”

밝아졌던 뵈머 씨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나도 다른 사람 얼굴이 썩어가는 걸 보는 취미를 가진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사업이라는 게 그리 쉽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니.

그리고 왕실 보석 세공인이라는 꽤 희귀한 카드를 손에 거머쥘 기회를 놓치기에도 조금 마음이 걸린다. 조금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뵈머 씨, 혹시 저녁 드셨습니까?”

“아, 아직 먹지 않았사옵니다. 각하.”

“그러면 저도 잠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겸 해서 조금 이따가 같이 드시지요. 식사 시간이 되면 부를 테니 옆방에서 잠시 머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되겠사옵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한편에 자리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바뵈프 씨를 흔들어 깨웠다.

“바뵈프 씨? 바뵈프 씨.”

“어, 으? 저희 부모님은 모두 살아계십니다!”

“바뵈프 씨? 정신 차리세요!”

“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잠꼬대라니 추한 꼴을 보여드렸군요.”

“잠, 잠꼬대요?”

세상에 대체 상담소에서 사람들에게 뭘 얼마나 시달렸으면 잠꼬대로 저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역시 서비스업은 시대불문하고 3D업종인건가?

“···바뵈프 씨, 뵈머 씨를 옆 방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예. 사장님.”

“좋습니다. 그러면 이따 뵈지요, 뵈머 씨.”

나는 두 사람을 응접실에 남겨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

“아이고오 죽겠다아.”

마치 다큐멘터리나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구수한 소리를 내면서, 나는 넥타이를 풀고 단추마저 풀어 답답했던 셔츠를 헐겁게 만든 뒤 푹신한 의자에 쑤욱 몸을 뉘었다.

마이 프레셔스, 마이 홈, 마이 룸.

내가 베르사유 궁전, 저어기 오스트리아 호프부르크인가 뭔가 하는 궁전, 트리어에서도 지내봤지만 역시 내 방만큼 심신이 편해지는 곳은 없단 말이야.

“보석상이라. 이참에 럭셔리 쪽에도 한 번 발을 뻗어볼까?”

그리고 심신이 편해지면 당연히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기 십상.

내 머릿속은 벌써 새 사업구상으로 꽉 들어찬 상태였다.

럭셔리 사업.

보석, 시계, 의류, 악세사리 등의 명품을 취급하는 사업인 럭셔리 사업은 시대에 불문하고 항상 사회 상류층의 수요를 어마어마하게 빨아들인다.

21세기에 있던 럭셔리 사업체 중 가장 유명한 에르메스는 가방 하나에 억 소리가 나는 게 즐비하지만 공급은 항상 수요보다 모자랐고, 루이비통, 구찌 이런 친구들이야 워낙에 유명하다보니 설명할 이유조차 없다.

다만 내가 마음에 걸리는 건, 그 럭셔리 사업에 과연 이삭의 민족이 진출해서 뽕을 뽑을 수 있을까-라는 거지.

“아마 당분간 프랑스에서 럭셔리 사업을 펼치긴 힘들 텐데...”

농민들은 당장 먹을 빵이 없는데, 귀족 나리들은 번쩍번쩍 반짝반짝 우윳빛깔 보석들을 차고 다녀서 열 받은 평민들이 엎어버린 게 바로 프랑스 혁명 아니겠나.

그런데 혁명한지 3년 만에 럭셔리 사업을 펼친다? 아무리 내 이미지가 시민들 사이에 좋더라도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프랑스 외, 다른 나라의 럭셔리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건데...

“일단 자본금은 충분하고...”

매 달 몇 만 리브르가 넘는 돈이 자본금으로 쌓이고 있으니 이제 슬슬 새 사업을 펼 때도 됐지.

“자본금 걱정은 없고, 그러면 생각해볼 건 이제 생산인가?”

나는 비스듬히 앉아 펜에 잉크를 먹인 후 새하얀 종이에 적당히 몇 글자를 써내려갔다.

[어디서 어떤 원자재를 공급받아서 어떻게 만들고 뭐가 결과로 나오며, 무슨 용도로 그 결과가 쓰이나.]

일단 기존에 왕실 보석 세공인이라는 직함까지 달고 있었던 뵈머라면 무조건 자신에게 보석을 대주던 원자재 공급처가 있을 거다.

게다가 세공 작업 자체에 도가 튼 사람이니 ‘어떻게 만들고’에 해당하는 공정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건 물론, 아웃풋마저도 상당히 높은 퀄리티로 만들어 낼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나중에 뵈머의 몫을 확실히 챙겨주며 밑에 장인들을 받아 교육까지 시키면 퀄리티나 생산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해지 않아도 될 테지.

그렇다면 보석 사업을 한다 치면 뵈머를 우리 회사에 묶어놓는 게 가장 최선책이고, 차선책은 뵈머와 협업하는 식으로 묶어놓는 것, 최악은 뵈머를 잡지 못하는 걸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럭셔리 사업을 한다 치고 겨우 보석 하나가지고 놀면,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한참 모자라지 않나.

생각해보자, 번쩍번쩍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뜻 구매하는 돈을 가진 부자 나리께서 과연 명품 정장, 명품 가방, 명품 악세사리를 마다할까?

절대 마다 안 할 거다. 그러니 21세기에 가면 백화점에 아예 ‘명품관’이라고 써넣은 곳이 존재하는 거겠지.

“팔 거면 아예 다 모아놓고 세트로 파는 게 제일 돈이 팍팍 벌릴 테지.”

나는 다시 몸을 기울여 흰 종이에 단어 몇 개를 써넣었다.

[보석, 의류, 악세사리, 시계]

온 유럽 유행을 선도하는 프랑스인이라면 이런 거 한 번 멋지게 해볼 차례 아니겠어.

***

“뵈머 씨.”

“예, 예. 각하.”

뵈머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젊은이의 부름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며 대답했다.

손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쿵대며 울린다.

“제 영국 행에 같이 따라가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잠시 생각을 해봤습니다.”

“···예.”

저 젊은이의 혀끝에 뵈머 자신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노쇠한 심장이 덜컥 멈출 것 같았다.

하지만 뵈머 자신이 누군가. 루이 15세와 루이 16세를 보필하며 수많은 보석을 깎아온 프랑스 최고의 세공인 아닌가.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셨다. 어떤 말을 듣더라도, 이 뵈머가 해내지 못할 쏘냐.’

뵈머는 속으로 자신이 가장 많이 본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혹시 우리 이삭의 민족에 입사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푸우우웁!!”

목뒤로 삼켰던 음식이 빠져나와 코 속으로 들어갔다.

“쿨럭! 쿨럭! 죄, 죄송합니다 각하.”

“그...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사옵니다! 쿨럭!”

젠장할, 입으로 삼켰는데 왜 코로 들어간단 말인가.

그보다 이삭의 민족 입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 각하, 이삭의 민족 입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나이까?”

뵈머의 황당하다는 질문에도 젊은이는 포크와 나이프를 든 손을 으쓱 들어올리며 별 것 아니란 듯 입을 열었다.

“아, 뭐. 이번에 뵈머 씨의 말을 듣고 럭셔리 부분에 한 번 진출을 해볼까 하는데, 유능한 뵈머 씨가 절 도와주신다면 영국 시장 개척에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거든요.”

뵈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한 번 입사해 보시겠습니까? 대우는 왕실 급은 아니더라도 업계 최고로 드리겠습니다.”

이게 웬 떡인가. 단순히 여행에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이삭의 민족 명함을 가지고 갈 기회라니!

“합니다! 무조건 하지요!”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뵈머 씨.”

“예, 예?”

“혹시 잘 아는 의류, 악세사리 장인이 있다면 다 데려와 주십시오. 가능합니까?”

뵈머는 젊은이가 혹시라도 마음을 달리 먹을까봐 서둘러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예, 예! 각하! 그 친구들도 일감이 없어서 힘들 테니, 제가 부른다면 모두 달려올 겝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뵈머 씨의 입사를 기념하며 건배하시죠! 건배!”

“황공하옵니다,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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