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3)
대영제국, 그레이트브리튼.
내 21세기 기억 속에서 영국에 대한 이미지는 딱 이빨 빠진 늙은 사자이자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었다.
자기가 애써서 만든 EU인데 주도권을 독일한테 뺏기질 않나, 그거에 삐져서 홧김에 탈퇴를 하질 않나, 또 탈퇴해놓고 줏대도 없이 ‘다시 EU에 가입할까?’ 하는 추한 꼴을 보면 딱 이빨 빠진 늙은 사자 이미지랑 찰떡궁합 아닌가.
하지만 18세기 지금의 영국은 21세기의 그 이빨 빠진 늙은 사자가 아니다. 이빨도 발톱도 모두 쌩쌩한 백수의 왕이란 말이지.
그런 영국에 사업을 펼 수 있는 기회? 21세기로 따지면 미국 진출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아, 내 나라보다 돈 많은 나라에 빨대 꼽을 기회라니? 이건 사업가로서 못 참지. 어떻게 참아 이걸.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하는 거죠.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그냥 프랑스에서 한 거처럼 간편식사나 만들어 파는 거 어떻습니까, 사장님?”
“글쎄요. 간편식사가 거기선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는 일이죠.”
마음에 걸리는 건, 생전 처음 가는 외국에서 과연 프랑스에서 먹혔던 사업 아이템이 먹히느냐는 거다.
물론 아주 다행히도 지금 유럽의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건 프랑스이니 완전 개박살이 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시장의 형태가 이곳과 아예 똑같진 않을 테지.
“으음. 꼭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 사는 게 죄 엇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뭐, 조금 귀찮을 지라도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단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유비무환, 이쪽 말로는 ‘금고는 항상 단단하게’.
가장 간단한 철칙 아니겠나.
“일단 잡지와 신문은 내다 팔 상품에서 제외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진출해 봤자 <타임즈>가 먹고 있는 시장을 갉아 먹을 뿐이니, 해가 되면 됐지 결코 득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옳으신 말입니다, 사장님.”
이미 영국 신문 시장의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의 결연회사 <타임즈>에 오사를 때릴 건덕지를 만들 수는 없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로열티가 쭉쭉 뽑혀 들어오는데 굳이 벌집을 헤집어 놓을 이유는 없지.
“사장님, 가스등을 팔아먹는 건 어떻습니까?”
“으음. 글쎄요.”
번쩍번쩍 빛나는 가스등이야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거기에 대한 인프라를 쭉 깔아야 하는데, 막 개발하는 우리 프랑스도 아니고 런던 한복판을 그렇게 개조할 수 있을까?
아마 잡다한 규제에 허가를 받는 시간만 한 세월일 걸.
“그건 나중에 영국인들이 직접 찾아왔을 때 로열티를 떼먹는 걸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굳이 우리 프랑스인 노동자들이 런던에 가서 땅을 파 봐야, 현지인들에게 프랑스인들이 자기들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느낌만 줄 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가스등 건은 일단 보류해 놓겠습니다.”
플로리앙 씨는 펜을 들어 수첩에 쓰인 사업목록 중 하나에 X표를 쳤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 페시옹 씨가 날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사장님. 생도맹그 산 사탕무나 커피를 파는 건 어떨까요? 이번에 투생 씨가 새로운 생도맹그 총독으로 임명되셨으니 우리에게 기꺼이 협력해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재무부가 할 일이지, 우리 이삭의 민족이 할 일은 아닙니다. 보류하죠.”
내가 아직도 재무총감이라는 감투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면 영국에 갖다 팔면서 뽀찌를 조금씩 주워다 주머니 속으로 챙길 수 있었겠지만, 야인이 된 지금은 어렵다.
뭐, 사실 재무부 직원들에게 언질을 주면 가능하지 않겠느냐마는, 난 뒷구멍으로 사기업과 국가가 짜고 치는 그런 인상을 굳이 얻고 싶지는 않다.
기업의 이미지라는 게 꽤나 중요하단 말이지. 한 번 망가지면 복구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니 말이야.
유명 패션브랜드들을 동네 양아치들이 입고 다녀서 가치가 떨어진 일이 한 두 번인가.
나는 이삭의 민족이 깨끗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기업이 되길 원하지 내 뒤통수를 쳤던 대기업 같은 쓰레기 이미지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이것도 안 되겠고, 저것도 안 되겠고... 할 수 있는 건 음식장사 뿐이군요. 이걸로 뽕을 뽑을 수는 있을까요?”
“쓰읍. 일단 영국행까지 남은 시간이 상당하니 그때까지 대책을 강구해보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사장님. 좋은 저녁 되십시오.”
“그래요. 다들 내일 봅시다.”
어쩐지 하는 일마다, 올리는 보고서마다 퇴짜만 놓는 악질 부장님이 된 기분이지만, 어디 사업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쉽게만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도 자국이 아니라 외국 일이라면 더 까다롭게 봐야할 일 아니겠는가.
“아, 어디 하늘에서 일감이 뚝하고 떨어지면 좋겠다.”
직원들을 모두 집으로 귀가시키고서, 나는 홀로 남은 회의실에서 펜을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가만히 읊조렸다.
똑똑똑.
“사장님, 아직 회의실에 계십니까?”
“누구시죠?”
“저 프랑수아 바뵈프입니다.”
“아, 들어오세요. 바뵈프 씨.”
문에 달린 경첩이 삐그덕 소리를 내자, 어째 내가 한참 야근에 찌든 시절보다 더 퀭해진 얼굴을 한 바뵈프 씨가 천천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하다... 분명 바뵈프 씨는 아침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 아니었나? 왜 사람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푸석푸석해지는 걸까.
“왜 제 얼굴을 그리 뚫어져라 보시는지요...?”
“아, 아닙니다.”
나는 볼드모트처럼 생기 잃은 바뵈프 씨의 눈동자를 마주치자마자, 눈을 바로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한 일주일 쯤 휴가를 줘서 고향에서 요양하라고 해야겠다. 저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 일 나겠어.
“아무튼 사장님, 사업 건으로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누구죠?”
“카를 아우구스트 뵈머(Charles Auguste Boehmer)라는 자입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뵈머? 뵈머라?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마침 회의도 끝났으니 잠깐 얼굴만 보는 거야 쉽겠군요. 안내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나는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바뵈프 씨의 뒤를 따라서, 1층에 자리한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곧 예순을 앞두었을 듯 한 남자는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 벌떡 일어섰다. 그 덕에 가지런했던 남자의 정장에 잔주름이 잡혔지만 남자는 그런 건 상관하지 않는 듯 날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 총감 각하십니까?!”
“이제 총감은 아닙니다만, 뭐. 반갑습니다.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입니다. 사업 건으로 절 만나보고 싶으시다고...”
“무궁한 영광이옵나이다, 각하!”
“어, 어, 왜, 왜 이러세요?”
아니, 왜, 왜, 무릎을 꿇는데?
***
6시간 전.
프랑스 파리, 샹 드 마르스 광장.
“아이고... 아이고오...”
불과 3년 전만 해도 가게 앞이 사람으로 붐비고, 온 프랑스의 귀족들이 자신을 찾았건만... 겨우 3년 만에 이리되다니, 참으로 덧없는 인생이었다.
- 비바 라 레볼루숑! 인민의 자유를 짓밟고 제 배를 불린 탐욕스러운 귀족을 처단하라!!
- 우와아아!! 탐욕스런 귀족들을 처단하라!!
- 뵈, 뵈머 경! 내가 달아놓은 루비 구매는 없던 일로 해주시오!
- 아니, 남작 각하! 구매취소라니요!! 그, 그러시면 최소한 루비 대금이라도 치르고 가셔야지요!!
- 대금은 무슨! 지금 당장 스페인으로 뜨지 않으면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는데, 무슨 얼어 죽을 대금?! 나중에 혁명인지 뭔지 저 역도들 목이 잘리면 그 때 돌아와서 치르리다!
- 남, 남작 각하! 어디가십니까 각하! 야! 야!! 야 이 개새끼야!! 돈은 내놓고 가란 말이다아!!
예순 평생을 귀족들의 보석을 깎으며 산 뵈머로서는, 그런 프랑스의 풍경이 정말로 낯설었다.
화려한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루비로 드레스와 정장을 장식하던 귀족들은 죄다 스페인이니 네덜란드니, 미국이니로 도망 가버리고, 숱하게 예약되어있던 보석 명세표들은
돈을 낼 사람들이 사라졌으니 한낱 휴지쪼가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 산악파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매일 흑빵과 우유만을 먹는답니다! 우리 모두 사치 대신 합리적인 소비를 합시다!
- 와아아!!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
“이 나쁜 놈들아... 그러면 이 뵈머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대신 보석을 사줄만한 돈이 있는 자들은 죄 계몽주의니 로베스피에르니 하는 혁명에 홀려 다들 멋대가리도 없는 검은 정장만을 차려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세상에 검은 정장이라니, 멋을 아는 프랑스인이 맞긴 한 건가? 뵈머는 한탄스럽기 그지 없었다.
결국 뵈머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아직 세공되지 않은 보석이 한 가득 쌓여있는 창고는 보물이 아니라 뵈머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차라리 혁명이니 뭔지가 시작됐을 때 옆 나라로 나를걸 그랬어.”
뵈머는 광장의 벤치에 앉아 한숨만 쉴 뿐이었다.
더 이상 보석을 값비싸게 사줄 사람이 없다면, 자신은 막대한 빚을 진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손님, 신문 하나 사시겠습니까?”
“···기분 안 좋으니 저리 가라, 이놈아.”
뵈머는 하늘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자신의 어깨를 툭툭 건드는 어린 신문팔이 소년을 향해 말했다.
젠장, 이 빌어먹을 세상은 어떻게 된 게 벤치에 앉아 묵상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단 말인가.
“체, 돈 꽤나 있어보여서 말 걸었더만, 완전 꽝이었잖아.”
“뭐, 뭐 이놈아?! 내가 왕년에는 말이다! 국왕과 왕비까지 의뢰를 넣던 전설적인 보석상이란 말이다!”
“신문 한 부도 안사면서 무슨 보석상? 헹, 거짓말 치지 마쇼. 할배.”
“이... 이 놈 새끼가... 당장 한 부 내놔라 이놈!!”
“시발... 이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일이냐, 뵈머. 하아아...”
신문팔이 꼬마 놈의 상술에 걸려들어 홧김에 신문 한 부를 사버린 뵈머는 눈두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외쳤다.
젠장, 가뜩이나 쪼들리는 생활인데 신문은 무슨 신문인지. 돈 때문에 정기 구독하던 <포브스>도 저번 달로 구독을 끊지 않았나.
“그래도 기왕 샀는데, 안 볼 수는 없지...”
뵈머는 신문을 펼쳐 1면에 커다랗게 쓰인 활자를 읽어내려갔다.
[대영제국 국왕, 조지 3세.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을 국빈으로 초청!]
이런 썅.
욕이 절로 나왔다.
하다못해 자신이 외국에 나가면 돈이라도 조금 모아볼 수 있겠건만. 누군 그 외국에 갈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누군 왕실 초청이라니.
뵈머는 신문을 가지런히 포개 무릎에 얹어놓고, 고개를 들어 공활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 평생을 바쳐 일구어 놓은 사업이 쫄딱 망하게 생겼는데, 누군 왕실의 초대를 받아 승승장구하다니. 인생이란 이렇게 덧없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휴 차라리 저기 따라갔으면 좋으련만...”
···.
잠깐만. 왜 뵈머가 저기 따라갈 수 없다는 건가.
프랑스 최고의 보석 세공가인 자신이 왜?
기욤 드 툴롱은 사업가다. 이득이 되면 먹고, 해가 되면 뱉고 하는 사업가.
그런 사람이 외국으로 나가는데 용돈 벌이할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뱉을까?
“어차피 이대로 죽으나, 뭐라도 하고 죽으나. 매한가지 아닌가.”
뵈머는 선선한 가을 공기를 있는 힘껏 폐 속 가득히 들이마시고는, 광장 한 편에 마련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상담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삭의 민족 사무실은 어디로 가야하오?”
파산한 예순 살 보석 세공사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