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2) (148/341)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2)

“여러분, 저 재무총감 직 그만하렵니다.”

“기욤 총감, 자네 방금 뭐라고...?”

“이제 그만 자리에서 내려오려구요.”

방금 전까지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며 덕담이 오가던 팔레 르와얄 앞의 고급 레스토랑은 내 말 한 마디에 달그락거리던 식기 소리가 멈추고 고요해졌다.

“왜들 그러십니까. 다들 식기 전에 어서 드시죠. 이 집 송아리 요리가 참 일품이랍니다. 소스도 뻑뻑하고 살코기도 많이 들었어요.”

나는 태연하게 말한 후, 주방장이 미리 먹기 좋게 썰어놓은 고기를 향하여 포크를 찔러 넣었다.

그런 내 모습에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은 서로를 향해 뭔지 모를 시선을 잠시 주고받더니 모두 날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총감 자네 대체 갑자기 왜 그러나?! 사임이라니!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게!”

“미라보 의장 말이 맞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임이라는 뚱딴지같은 단어를 말하는 겐가?!”

“미라보 의장님과 시에예스 의원 두 분 말씀이 옳습니다. 기욤 총감, 이러는 이유라도 알려주시지요.”

“아니, 저야말로 임기 끝나서 내려가겠다는데 다들 왜 그러시는지 저어어엉말 모르겠거든요? 2년짜리 임기 이제 다 끝났다 이 말입니다.”

사실 안다. 아니, 너무나도 잘 알지.

내가 좀 유능한 노예 춘식··· 아니, 공무원이거든.

나라도 갑자기 플로리앙 씨가 사직서를 제출하면 같은 수를 써서 마음을 돌려놓으려 할 텐데, 댁들이야 오죽하겠어.

“왜? 혹시 총감직 월급이 부족한 겐가? 하기야 자네에게 5천 리브르는 너무나도 적은 액수긴 하지.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임금 인상안을 의회에 상정해보겠네!”

“우리 평원파는 미라보 의장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산악파 또한 의견을 같이 하겠습니다.”

“아니, 임금이고 나발이고 임기 끝났으니 내려오겠다구요.”

“그런 쉬운 일이야, 법을 후딱 개정하면 끝날 일 아닌가. 몇 년을 원하나? 3년? 4년?”

“흐음. 미라보 의장, 아예 10년은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시에예스 의원님.”

“당신들 내 말 안 듣지?”

내가 2년 간 베르사유, 파리, 그리고 크고 작은 일로 이리저리 굴려지다가 요 근래에 계산기를 좀 튕겨봤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난 30살 이전에 온몸에 있는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장렬히 과로로 사망할 각밖에 안 나오더라.

“이보쇼. 여러분?”

“가만히 있어보게 총감. 지금 얘기 중이잖나.”

“차라리 재무총감실을 확장해서 안에 화장실에 침대까지 들여놓는 건 어떻습니까?”

“호오, 일리 있는 말이군요.”

“······.”

내 안의 맷돌 손잡이인 어이가 저 멀리 안드로메다를 향해 사라져버리고,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쏘아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라보, 시에예스, 로베스피에르 세 사람은 머리를 모아 서로 사악한 권모술수를 꾸며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지하 밑 연옥에 있을 사탄이 이 사람들보다 노동권을 더 잘 챙겨줄 거다.

이 인간들은 내가 삼일 째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모를 걸? 이런 악마들 같으니.

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삼국지 위인 중 하나인데, 혹시 제갈공명이라고 아는가? 촉나라의 명재상이자 어릴 적 삼국지를 읽는 우리의 마음속에 충신의 낭만을 채워 넣어준 그 사람 말이다.

꼬꼬마 시절에 오장원에서 별이 지는 걸 보고서,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꼭 제갈공명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단 말이다.

그런데 내가 재무부를 운영해본 지금, 그 일을 다시 떠올려보면 제갈공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로로 죽을 만 했겠더라고. 물론 위연이 촛대를 밀어버려서 7년을 더 못 살긴 했지만.

아무튼 난 제갈공명처럼 단명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전 창고에 돈을 쌓아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싶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휴먼?

“총감, 우리끼리 한 번 얘기를 해봤는데 말이지.”

“일단 전 재무부에 처박혀있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습니다.”

“에헤이, 이 사람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맡아주게! 응?”

“아잇 씻팔, 안 한다고.”

빌어먹을... 다시 보니 미라보, 시에예스, 로베스피에르 당신들은 악마가 아니라 위연이였구나.

네 이놈들, 조조와 사마의가 시켰느냐? 어쩐지 반골의 상이다 싶었어. 아, 아니구나. 혁명을 일으켰으니 진퉁 반골이 맞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꽃다운 내 20대를 칙칙한 재무부 책상에서 서류에 둘러싸인 채 끝내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다.

그러려면 이 반골 위연들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는데. 과연 어떻게 명분을 쌓아야 이 작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 여러분?”

“총감, 혹시 생각이 바뀐 겐가?”

“···일단 제 말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고, 세 명의 반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투생 투베르튀르 사건에 관해 굉장히 많은 책임을 느꼈습니다. 누군가는 제가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두둔할지 몰라도, 어떻게 보면 행정부의 수반이 사사로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법부의 일원에게 사적인 압력을 가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다행히도 세 명의 반골은 모두 헌법에 환장하는 헌법박이들이다. 그 말인즉슨 법을 방패삼아 운신하면 저 작자들도 날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할 수는 없을 거 아닌가.

“따라서 그런 사적인 압력을 행사했으니 그에 대해 마땅한 책임을 지고 당분간 자숙하고자 합니다. 음음. 그렇고말고요.”

“아니... 그런 조그마한 허물쯤이야···.”

“어허! 삼권분립! 헌법수호! 혁명만세! 비바 라 레볼루숑!”

““······.””

이제 힘겨운 공무원 생활은 끝, 행복 라이프 시작이다.

“아, 차기 재무총감으로는 콩도르세 조폐국장님을 추천합니다.”

왜, 콩도르세 국장님도 나 3신분위원인가 뭔가로 추대했었지 않나. 나도 똑같이 돌려주는 것뿐이다.

***

대영제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가 외무부.

“후우...”

수상인 윌리엄 피트는 외무부 회의실에 앉아 요즘 들어 부쩍 푸석푸석해지는 콧잔등을 손으로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참으로 좆같은 수상이란 자리 때문이었다.

웨스트민스터에서는 휘그당 꼰대들과 삿대질을 주고받고, 해군부에서는 걸핏하면 새 전열함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배박이 -자기들은 배가 늘어날수록 제독자리가 늘어나니 당연하겠지만- 들과 씨름하고, 동인도회사는 또 뱅골에서 난리를 피우고.

제기랄, 평소에는 ‘우린 정부의 컨트롤을 받을 이유가 없는 회사입니다만?’이라면서 일만 터지면 ‘우에엥, 의원님들! 수상님! 우리 좆 됐어요! 도와주세요!’하고 울부짖는 꼴이라니.

거기에 면전에서는 하하호호, 뒤에서는 더럽고 추잡하기 그지없는 외교라는 일까지.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라도 피트에게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불과 십 여 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스물네 살의 혈기왕성했던 멋진 젊은이는 이제 또래 친구들보다 오년 내지 십 년이란 시간은 더 먹어버린 듯 했다.

그리고 오늘 윌리엄 피트의 얼굴에 주름 한 줄을 추가하는 영광을 가지게 된 건 바로 저 도버 해협 너머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 건지 궁금한 프랑스인 젊은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게... 기욤 드 툴롱 이 자는 좀 잡을 수가 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수상.”

“정말 기욤 드 툴롱이 재무총감직에서 사임했다고 합니까?”

“확실합니다. 여기 보시지요.”

외무부 차관은 피트에게 소책자 하나를 넘겨주었다.

“<포브스>라.”

“어제 파리에서 발행된 건데, 보시면 기욤 드 툴롱이 재무총감 직에서 사임했다고 합니다.”

“씁. 이 정도면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군요. 외무부에서는 기욤 드 툴롱 이 자를 어떤 인물로 보고 있습니까.”

차관은 잠시 턱을 쓸어내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외무부 모두가 오늘 전까지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 같은 속이 시꺼먼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과 똑같군요.”

“입법부와 행정부를 동시에 손으로 주무를 수 있는 권력자 아닙니까. 또한 우리 외무부는 이번 투생 투베르튀르 사건도 기욤 드 툴롱이 사법부를 조련하고자 만든 일이라고 분석했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게 합리적인 생각이지요. 그런데...”

기욤 드 툴롱 이 자는 왜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걸까.

“프랑스라는 거대한 나라를 제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위인이 왜 그 자리를 굳이 사임하고 야인으로 내려왔을까요, 차관.”

윌리엄 피트는 <포브스> 1면에 그려진 기욤 드 툴롱의 초상화를 손으로 짚으며 차관을 쳐다보았다.

“그으... 딱 한 사람, 기욤 드 툴롱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렇습니까? 누구지요?”

“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라고...”

“아, 대통령(President)이니 뭐니 하는 그 신대륙인들의 수반을 꿰찬 그자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도 전쟁 후 대륙군 사령관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습니다.”

“흠...”

조지 워싱턴이라.

“그래도 그 직후에 바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구설수에 얽히기 전에 허울뿐인 감투에서 내려온 거 아닐까 싶군요. 뭐, 아무튼...”

윌리엄 피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입을 열었다.

“그가 여태껏 우리가 상대하던 정치인들과는 꽤나 괴리감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혼란한 정국을 파악하고 막대한 돈을 쓸어 담는 통찰력, 사람들을 휘어잡는 대담한 웅변, 여태껏 볼 수 없던 대중을 감싸 안은 냉철하고 계산적인 지도자일까.

그게 아니면.

‘나의 친우, 윌버포스 같이 정의감이 투철한 이상주의자인가.’

윌리엄 피트는 회의실 책상에 놓인 잡지 초상화의 모델인 젊은 프랑스인에게 호기심이 동했다.

“차관, 프랑스 대사관에 한 번 언질을 넣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뭐라고 넣으면 되겠습니까, 수상 각하?”

“대영제국 왕실과 의회에서 프랑스의 명사 기욤 드 툴롱을 초청한다고 넣어주십시오.”

“그으... 과연 기욤이 이곳에 오겠습니까?”

“음... 기욤 드 툴롱이 혁명 전에 사업가라고 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도 사업체를 계속 운영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기욤 드 툴롱에게 영국 내 외국인 사업규제를 조금 풀어주는 대가로 초청하겠다고 말해주십시오. 사업가라면 영국만큼 돈 많은 나라에 사업을 할 기회를 놓치지는 않지 않겠습니까.”

“예, 수상 각하. 바로 대사관에 연락해보겠습니다.”

***

“······그러니까 저보고 영국에 와 달라, 이런 말씀이신, 거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이제 겨우 자유가 됐는데 또 멀리 나가라고?

난 외교관 당신들이 정말이지 너무 싫어.

“아니, 저를 왜?”

“왜긴요, 전 유럽에서 가장 뜨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시는 분 아닙니까. 국왕 폐하와 수상께서도 그런 각하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시답니다.”

“하아... 그... 알겠습니다. 이유는 이제 알겠는데.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내가 안락한 파리에서 칙칙하고 비만 오는 영국에 갈 이유가 뭐지?

“수상께서는 총감 각하가 영국에 잠시 방문하는 대가로 이삭의 민족의 영국 진출을 일부분 허가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배편은 언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아, 사업진출은 못 참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