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1) (147/341)

영어로는 윌리엄, 불어로는 기욤 (1)

1792년 9월 중순.

대영제국 런던.

“세상에, 프랑스에서 깜둥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줬다지 뭔가!”

“뭐, 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으... 딱히 말이 안 될 건 없지 않나?”

“하여간 소싯적에 파리에 좀 머물러 봤다고 프랑스 편들긴. 자네는 도대체 런던 사람인가 아니면 파리 사람인가?”

“그러게나 말일세. 자네 사실 프랑스 첩자인거 아니야? 자네 국왕 폐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 어디인지 한 번 대보게.”

“당연히 버킹엄이지! 이 사람들이 참!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하는가!?”

전 프랑스를 뜨겁게 달궜던 투생 브레다, 아니.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제 투생 투베르튀르(Louverture, 길을 여는 자) 사건으로 불리는 희대의 생도맹그 스캔은 18세기의 특유의 무료함으로 늘어지는 도버 해협 너머의 영국인들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다.

아니, 뜨거운 감자라기보다는 편하게 씹고 뜯고 맛 볼 좋은 가십거리라고 하는 게 정확한 비유렷다.

- 계몽주의 만세! 혁명 만세! 이성과 시민 만세!

- 조용히 하세요!

- 으겍!

그도 그럴게 1789년 이후 국내의 불순분자 -라고 쓰고 식자라고 읽는다- 는 모두 한 번씩 경찰들의 곤봉에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경험이 있었으니 국외의 남 얘기만큼 눈치 안보고 내뱉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또 있겠는가.

결국 프랑스 파 드 칼레에서 연일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 포츠머스와 브라이튼에 전해지는 소식에 온 런던의 신문사들이 목을 매는 진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편집장님! 옆 잡지사 놈들을 혈투 끝에 누르고 제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이랴! 이랴! 달려라! 옆 신문사 놈들보다 무조건 먼저 찍어내야 해!”

“이런 젠장, 또 졌어? 이젠 아주 하루 늦게 소식을 내보냈다고! 취재부 놈들 싹 다 브라이튼 항구로 보내버려! 당분간 런던으로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마라 이놈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일장 연설!]

[희대의 생도맹그 부패 게이트, 역시나 나태하고 게으른 프랑스인들인가?]

[에식스 연대기 단독 취재!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인들이 부르짖는 그 세 단어는 대체 무엇인가!]

취재부가 여독으로 나가떨어지고, 인쇄부가 과로로 쓰러지고, 사업부는 스트레스로 쓰러지는, 그야말로 모두가 끔찍한 취재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딱 한 군데만 빼고.

***

대영제국 런던, 블랙프라이어즈(Blackfriars).

<타임즈> 인쇄소.

기욤 드 툴롱, 그는 신인가??

기욤 드 툴롱, 그는 신인가?!

기욤 드 툴롱, 그는 신이야!!

불과 1년여 전만해도 차가운 쇠창살과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유치장에서 신음하던 존 월터는 입꼬리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우둔한 놈들! 니들이 암만 재주를 부려봤자 우리 <타임즈>한테는 안 된다 이 말이야! 하하하하!!”

영국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의 잡지사인 <포브스>와 밀접한 결연을 맺고 있는 <타임즈>는 어마어마한 판매부수를 올리고 있었다.

<포브스>에서 대강 기삿거리를 긁어모아 쓴 잡지초고를 보내주면 불어를 영어로 수정하고 몇 가지 단어를 첨삭 및 편집하면 끝.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 효율적인 업무인가!

“하느님께선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고 하시더니, 정말로 그게 진실인 듯 싶구나!”

아마 온 영국의 사업체를 다 뒤져봐도 프랑스 회사와 결연을 맺은 건 <타임즈> 뿐이리라. 그게 다 하느님께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이 존 월터를 가엾이 여기사 내리신 은총 아니겠는가.

생각해보자. 왜 프랑스의 재무총감이나 되시는 분께서 런던의 조그마한 신문사 사장을 파리까지 불러서 면담을 하고 사업을 제의했을까.

반영정서가 어마어마한 미국에 영국신문을 가져다 팔며, 유럽 대륙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이권을 지닌 사업을 말이다.

물론 그 대가로 <타임즈>와 이삭의 민족 <포브스>는 영구 결연을 맺었고, <포브스>는 미국과 영국 내 판매부수에 관한 인세 일부를 챙겨가지만 조그마한 영세 신문사인 <타임즈>로서는 절로 굴러온 복덩이면 복덩이지 결코 아쉬울 것 없는 대가였다.

까놓고 말해서 존 월터 자신이 대대손손 고리대금을 하는 유대인도 아니고 이 <타임즈>라는 조그마한 신문사가 가봤자 몇 대를 가겠는가. 아들 대에 끊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께서 내린 은총 말고 존 월터는 도대체 기욤 드 툴롱이 자신에게 이렇게 호구마냥 베풀어주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 까짓 거 신께서 은총을 내린 걸로 퉁치기로 했다!

“으하하하하!! 아주 그냥 돈이 넝쿨째 굴러오는구나! 윌리엄! 이게 노다지가 아니면 무엇이냐?!”

“아버지! 지금 농담 나눌 시간도 없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노퍽에 3천부, 맨체스터에 1만부, 리버풀에는 1만 5천부나 보내야 한다구요!”

“씁하! 씁하! 으하하하!!”

“젠장할, 미치겠네.”

<타임즈>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존 월터가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파운드화와 실링에 코를 가져다 대고 돈 냄새를 맡을 동안, <타임즈>의 경영권 승계자로 꼽히는 장남인 윌리엄 월터(William Walter)는 이제 막 윤전기에서 나온 뜨끈뜨끈한 신문을 차곡차곡 쌓아 줄로 고정시켰다.

하얀 손의 이곳저곳은 이미 검게 말라붙은 잉크로 엉망이 된지 오래였지만, 열심히 뽀득뽀득 씻어봤자 윤전기 몇 번 만지면 금방 또 더러워지는 게 일쑤였다.

“빌어먹을, 이곳저곳에 잉크나 튀게 만드는 멍청한 기계 같으니.”

월터는 빌헬름인지 윌리엄인지 기욤인지 하는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이삭의 민족에서 협력사인 자신들에게 가져다 준 첨단 인쇄 기계를 한 번 노려보곤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윤전기인지 뭔지 지금은 아주 그냥 블러디 헬이란 단어가 입에서 떠날 일이 없지만, 이 기계가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좋았다.

- 그래요,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실을 기계가 짜주는 이런 현대사회에서 아직까지 인쇄공들은 하루 종일 인쇄기를 팔로 누르고, 잉크를 채우고 또 틀을 맞추고 하는 건 너무 구시대적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 암! 그렇구 말고! 이제 아주 조그마한 힘으로도 팍팍 찍어낼 수 있겠지!

- 그러게요! 이제 저도 피카딜리에서 연애 좀 해보겠어요!

- 음? 무슨 소리니? 인쇄공은 이제 윌리엄 너 하나로 족하다는 건데?

-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 생각해보거라, 다른 인쇄공들을 싹 다 잘라내면 임금이 얼마나 우리 이윤으로 남니? 생각만 해도 배부르지 않느냐? 으하하!

- ···Bloody hell.

***

대영제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

프랑스인들이 흑인을 해방시켰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상관저로 쳐들어오다니. 역시나 대학교 시절부터 여태까지 정의로운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 올리고 정열적으로 임하는 친구 아니랄까봐.

“하, 하하!! 하하하!!!”

1면에 대문짝만하게 T I M E S 다섯 철자를 박아놓은 신문을 또 다시 쉴 새 없이 읽어나가던 토리당의 젊은 의원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자신의 맞은 편에 앉은 친우를 향해 소리쳤다.

“이보게 피트! 이건 인류 역사 상 가장 큰 대사건 중 하나야!”

“···윌버포스. 자네가 모를까봐 얘기해주는 건데, 자네의 친우 윌리엄 피트는 아직 귀가 먹지 않았다네.”

수상 윌리엄 피트는 중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차를 음미하며 교양 있는 목소리로, 흥분한 자신의 친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장 우리도 프랑스처럼 노예제를 없애 버려야해! 자네도 알지 않나. 언제까지 이 글러먹은 노예제를 이 그레이트브리튼에 남겨둘 겐가! 노예는 그 자체로 원죄나 마찬가지일세. 이 친구야!”

“으음.”

분명 방금 전에 자신은 귀머거리가 아니라고 말한 거 같은데, 피트의 눈앞에 앉은 친구는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는 듯 했다.

신사답게, 피트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품위 있게 내려놓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보게, 윌버포스.”

“듣고있네, 피트!”

“이 대영제국의 수상은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 죽을 지경이야. 더 일을 만들지 말아주게나.”

“피트!!”

“우린 더 이상 혈기왕성한 대학생이 아니라, 한 나라를 책임지는 정치인들이야. 자네의 정의감은 알겠지만, 세상일에는 현실감이란 게 필요하다네.”

“기욤 드 툴롱은 그걸 실제로 해내지 않았나!”

“영국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현실에서 해낸 거지.”

노예 해방이라, 좋다. 노예가 쓰레기 같은 제도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노예들을 해방시키면, 콧대 높은 귀족 분들과 노예주 분들께서 가만히 있으실까.

“윌버포스, 난 영국을 둘로 쪼개버린 크롬웰처럼 역사에 남고 싶은 마음은 없네.”

“······후우. 알겠네.”

“내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언젠가는 꼭 이루어 주겠네. 사람들의 이성과 수준이 점차 오르고 있으니 앞으로 십 년 안에는 꼭 이룰 수 있지 않겠나.”

“그래. 그래. 미안하네. 내 너무 흥분했나보이.”

하여간 윌버포스, 이 너무나도 착하디착한 친구야.

“그런데 이만 집에 들어가 보는 건 어떤가. 안 그래도 이 수상자리에 앉으니 할 일이 너무 밀려있어서 말일세.”

“아, 미안하네. 내 자네의 상황을 알면서도 흥분해서 붙잡고 말았구만. 다음에 또 놀러 오겠네.”

“그래, 그래. 잘 살펴가게나.”

피트 수상은 친우를 떠나보낸 후 뒷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마차 위에 올라탔다.

“수상 각하, 얘기는 끝나셨습니까?”

“잘 끝냈네. 그보다 자네를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한 것 같군. 미안하네.”

피트는 코트와 우산을 마차 안으로 넣은 뒤, 자리에 앉고 입을 열었다.

“마부, 외무부로 가지.”

“예, 수상 각하.”

덜커덩거리는 마차 안에서, 수상 피트는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할 게 머릿속에 한 가득이었다.

1792년 올해에는 무슨 마가 끼었는지,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 레오폴드 2세가 급사하질 않나. 프랑스에서는 흑인 해방이 이루어지질 않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폴란드를 찢어죽이고 입가에 쑤셔 넣질 않나.

그리고 그 중 제일 경계요소로 삼는 건 딱 하나.

“기욤 드 툴롱 이 자는 지금 프랑스의 도제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굵직굵직한 사건에 죄 이름이 얽혀 들어간 그 젊은이의 속이, 피트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오늘 외무부로 가는 이유도 바로 요주의 인물인 ‘기욤 드 툴롱’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세울 지에 관한 회의 때문이었다.

“뭐, 일단 스파이들이 물어온 내용을 보면 뭐라도 답이 나오긴 하겠지.”

그러나 스파이들이 물어온 내용은, 피트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이 심한 내용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욤 드 툴롱이 재무총감 자리에서 사임했다니!”

***

“아 저 할 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 할 거라구요!”

“에이 총감, 그러지 말고 딱 1년만! 딱 1년만 더 해주게!”

“아잇 씻팔 안 한다고!”

이거 놔 이 인간 거머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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