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자유, 평등, 박애 (10) (146/341)

자유, 평등, 박애 (10)

쓰으읍... 이상하다...? 숫자가 이렇게 나올 리가 없는데?

거의 일주일 째 이 골방에 처박혀 있어서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악덕 노예주 기욤 드 툴롱의 사육장에서 실시간으로 갈려나가는 한 재무부 직원은 펜을 놓고 자신의 눈을 두어 번 벅벅 문질렀다.

“···왜 똑같지?”

자신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서류에 쓰인 숫자는 계속해서 헛소리를 나불대고 있었다.

“과장님. 이거 아무리 봐도 숫자가 이상합니다.”

“왜? 숫자가 안 맞아 떨어지나?”

“안 맞는 정도가 아니라... 제가 말씀드리는 거보단 한 번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흠, 알겠네. 어디보자.”

과장은 부하직원이 건넨 [1791년 생도맹그 작물 수확량] 장부를 찬찬히 읽어나가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하긴 하네.”

“그렇지요? 저도 방금 전까지 제가 허깨비를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지 뭡니까.”

“이거... 아무래도 총감님께 직접 보여드려야겠어.”

***

1792년 8월 30일.

창밖 저 멀리 세느 강 너머로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갈 시간.

“끝이다! 끝이야! 이제 침대에 누울 수 있어...!”

“오, 끝나셨습니까?”

“예, 각하! 제 분량은 다 끝냈습니다!”

내일 있을 재판을 대비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던 재무부 직원들은 하나 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끓여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은 뒤, 내가 깔고 앉은 방석 밑에서 열쇠를 꺼내 정문을 열어주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한 일주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까 집에서 푹 쉬세요.”

“총감님도 내일 재판 건승하시길 빕니다!”

날 향해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불끈 쥐어 올리는 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 후, 나는 다시 열쇠를 내 방석 아래 넣고 자리에 앉았다.

요즈음 가끔 날 악덕 노예주로 보는 듯 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이 기욤 드 툴롱은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올린 자에게는 한 없이 너그럽답니다.

“총감님.”

“음? 아직 퇴근 안하셨습니까, 과장님?”

“이거, 장부가 조금 이상합니다. 한 번 봐주시지요.”

“죄 비밀 장부인데 이상한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 류로 이상하다는 게 아닙니다.”

심상치 않다는 듯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는 과장의 말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건 생도맹그 총독부가 내부적으로 만든 1790년 수확량 보고서입니다.”

“흐음.”

나는 과장이 내민 보고서를 슥-하고 읽어나갔다.

확실히 그 내용이 맞네.

“총감님, 흑인들의 저항운동이 91년 말부터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그 전까지는 90년과 수확량이 근접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걸 한 번 봐주십시오. 1791년 수확량 보고서입니다.”

“······수확량이 갑자기 확 줄었군요. 거의 30퍼센트가 날아간 거 같은데.”

겨우 1년 만에 이 정도로 흉작이 들었다-라. 그러고 보니 분명...

- 각하, 뭔가 조금 이상합니다요. 원래는 화물선이 가면 커피와 사탕무를 화물칸 가득 채워 넣고 돌아왔었는데 요 근래에는 그 반이나 겨우 싣고 돌아옵니다.

어떻게 부정과 부패의 고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오는지.

“이 비밀장부 말고 재무부로 올라온 정식 보고서를 가져와주시겠습니까?”

“예, 총감님!”

과장이 가져온 ‘정식’ 보고서는 생도맹그 ‘내부’ 보고서와 상당한 차이가 나타났다. 뭐, 애초에 지들이 해쳐먹은 거 티 안 내려고 올려 보낸 정식 보고서니 당연하지.

그보다 한 가지 확실해진 건 내부 보고서는 확실하게 거짓이 아니라는 거다. 굳이 두 번이나 장난질을 칠 이유도 없고 자기들이 볼 장부에 칼질을 할 이유도 없지 않나.

그렇다면 칼질이 의심될 정도로 급격한 생산량 감소가 일어날 원인이 있었다는 건데.

“···과장님.”

“예, 총감님.”

“단기간에 생산량이 이렇게 급감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어... 일단 기후가 안 좋을 경우가 있지요.”

“90년과 91년 기후는 거의 엇비슷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제외하도록 하죠.”

“흠, 두 번째 연유로는 실무자의 착복이 있습니다.”

“그것도 제외. 이건 제 놈들끼리 씹고 뜯고 맛보자고 만든 문서 아닙니까.”

“그렇다면 동원하는 노동력이 감소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동원하는 노동력의 감소라.”

투생의 말로는 오히려 학살당한 게 백인이 아니라 흑인들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30퍼센트의 수확량 감소, 학살당했다는 흑인들.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내 추측이 맞다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에이, 총감님. 설마 그랬겠습니까? 아무리 그 작자들이 인간말종이라도 그건 아닐 겁니다.”

“···과장님. 생도맹그의 흑인 노동인구가 몇 입니까.”

“총감님!! 아닙니다! 그건 정말 아닐 겁니다!”

“제 기억에는 약 7만 내지 5만 정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내게 서류를 전해주던 재무부 과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변하고 면면에 경악이 서렸다.

“과장님, 제가 말한 수치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으로 어느 정도 대강 때려 맞춰보면 희생자는 1만 명 정도 되겠군요.”

“···세상에 신이시여. 신이시여.”

평생을 파리에서 지낸 공무원은 도저히 문명인이 저질렀다고 믿을 수 없는 끔찍함에 몸서리쳤다.

우리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지키다가, 동시에 하늘을 향해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성자와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 멀리 높은 곳에 있을, 이름 모를 사람들을 향하여.

***

1792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혁명법원.

“······하아.”

“어째 혁명 중일 때보다 지금이 훨씬 피 말리는 것 같소.”

“그러게 말입니다.”

세 명의 판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재판장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 투생이 어떻게 무죄인가! 깜둥이가 어떻게 사람인가!

대서양과 동인도의 섬들에 노예와 농장을 가지고 있는 일부 식민지 사업주들.

- 어떻게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처럼 먹고 자고 감정을 지닌 생물이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까! 혁명이여! 마리안이여! 투생을 구원해주오!

산악파와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글 꽤나 읽었다는 식자들.

- 그래서 죄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 신문마다 논조가 다르니 원.

일반인들까지.

온 프랑스의 관심사가 이곳 혁명법원에, 이 세 사람의 판사봉이 누굴 향해 휘둘러질지에 쏠려 있었다.

“후우. 그러면 8월 30일, 피고인 투생 브레다의 마지막 3심을 시작하겠소이다.”

땅. 땅. 땅.

세 번의 둔탁한 소리가 재판장 안을 빼곡하게 채웠다.

***

“우리 재무부는 지난 일주일간의 감식을 통하여 프랑스 역사 상 가장 큰 비리를 밝혀냈습니다! 이는 시민과 정부를 기만한 것으로···!”

“총독부, 사실이오?”

“···일부 부정이 있었던 건 인정하는 바입니다.”

“흐음. 재무부의 보고서를 변호인 측의 증거물로 채택하겠소.”

“이건 재판 논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블랑쉐랑드 총독, 말조심 하시오!”

우리 재무부 직원들이 몇날 며칠 밤을 지새운 결과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증인, 기욤 드 툴롱은 이리 나오, 아니. 나와 주십시오.”

“예. 재판장님.”

“재무부에선 생도맹그 총독이 심각할 정도로 혁명의 정신을 훼손했다고 말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예. 재판장님, 들으신 바와 같이 우리 재무부는 생도맹그 총독부가 약 1년 간 막대한 수의 흑인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판사는 턱을 쓸어내리며 내게 물었다.

“그렇다면 재무부는 몇 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 있습니까?”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8···.”

“8백 명?”

“8천 명에서 1만 명 사이로 추정됩니다.”

“···지금 재판장이 잘못들은 거지요?”

“1만 명 맞습니다.”

세 명의 법관이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재, 재무부 측, 그 말인즉슨 흑인 1만 명이 총독부에게 맞아죽었다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총독부! 그게 사실이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 놈들은 반란군입니다! 우리 총독부는 반란군에게 즉결처분을 내린 것 뿐 입니다!”

“허, 사실이라는 거로군.”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가톨릭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 문명인이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블랑쉐랑드, 당신이 사람이오?”

“본 재판부는 세 번 간의 재판 동안 입법부와 시민을 기만하고 거짓 증언을 일삼은 블랑쉐랑드 총독에게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하는 바이며, 억울한 피해자인 투생 브레다에게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한다.”

“끝으로 본 재판부는 투생 브레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또 다시 둔탁한 소리가 세 번 법정을 가득히 메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뒤 피고인석에 선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8월의 파리가 내보내는 따스한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 검은 눈동자는 나를 향해 초승달을 그리며 투명한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초병을 보고 입을 열었다.

“열쇠를 주세요.”

“예, 각하.”

“이게 수갑 열쇠입니다.”

초병은 허리춤에서 절그럭-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쇳덩어리를 빼내 내 손으로 넘겨주었다.

나는 초병이 건네준 쇳덩어리를 딱딱한 목재 수갑에 뚫린 구멍 안으로 넣고 돌렸다.

달카닥!

한 사람을 수개월 동안 얽매던 억압의 상징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생, 고생이 많았습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정말 허상이 아니었구려. 정말 허상이 아니었어. 정말로...”

생도맹그에서 7314킬로미터를 거쳐 파리에 다다른 위대한 혁명가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아니, 모든 프랑스인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

“이 놈들! 손 대지마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누구냐니, 사형수지.”

“거, 조용히 하고 빨리 빨리 들어가기나 하쇼. 우리도 이제 밥 먹으러 가야하거든.”

두 부사관은 코를 팽하고 풀더니 축축한 돌 바닥에 블랑쉐랑드를 던져놓고 유유히 밖을 향해 나갔다.

“이 놈들! 날 내보내란 말이야!!”

“뒤ㅁ···에, ···무ㄹ에···.”

“무, 무슨 소리야, 거기 누구 있소!? 누가 있다면 말해주시오!”

“뒤무리에, 뒤무리에, 날 왜 배신한 거지? 날 왜 배신한 거지? 날 왜 배신했느냔 말이다, 날 왜 배신했느냔 말이야.”

“이보시오! 거기 누구 있소!?”

“······흐흐흐흐.”

뭘까 대체.

“노ㄷ···, 만ㅅ···.”

“어, 이보시오! 당신은 누구요!”

“난 틀리지 않았다. 난 틀리지 않았어! 노동자 농민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이건 또 무슨...?”

파리 4구, 탕플 탑의 새로운 입주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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