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9)
“허미... 이게 다 뭔...”
“하하하! 생도맹그 총독부를 싹 긁어 왔습니다, 사장님! 오랜만에 몸을 좀 움직이니 시원하더군요.”
나는 수백 장이 넘는 종이를 상쾌한 표정으로 가져다 놓으며 얘기하는 우디노 씨의 얼굴을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나는 건데, 예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내게 해준 말 중에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 뜻은 무엇이냐? 바로 평안감사가 그렇게 꿀이 줄줄 흐르는 꿀보직이란 말이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찾아보니까 평안도가 장사로 돈을 많이 버는 바람에 수령이 빨대를 꼽아도 꿀 농도가 다른 지역하고 차원이 달랐다고 하더라고.
생도맹그 총독도 그 평안감사와 딱 궤가 같은 보직이다.
아. 왜 생도맹그가 궤가 같은지 잘 이해가 안 간다고? 좋다. 한강다리에서 담배를 줍다가 떨어지던 21세기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자 임기찬의 기억을 짚어보자.
21세기 현대사회의 대한민국에는 아주 많고 많은 기업이 있었지만 전 세계 70억 인구가 귀로 한 번쯤 들어본 초거대 글-로벌 기업은 손에 꼽을 수 있었다.
LG, SK, 한화, 두산 기타 등등 모두들 좋던 싫던 TV나 신문에서 들어본 굵직굵직한 기업들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첫째가는 기업은 바로 삼성이고.
그래, 대한민국 1년 GDP 총액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초거대 기업 삼성 말이다.
간첩에게도 물어보면 ‘아 거기요? 당연히 알죠. 그거 모르면 간첩이게요?’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인들의 상식 중 상식으로 자리 잡은 삼성.
저기 파키스탄 시골에서 양을 치는 압둘라 씨는 삼성 스마트폰으로 유투브를 키고 소소한 일탈을 즐기질 않나, 미국 텍사스 댈라스에 살며 텍사스 레인저스를 응원하는 존슨 씨는 삼성 노트북으로 계약금을 먹튀한 모 외국인 용병 야구선수에 대해 분노의 키보드 워리어 짓을 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연하게도, 명실상부한 1등 기업이 삼성인 건 모든 한국인들의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식 커뮤니티에서 삼성은 불패(不敗)한다, 뭐 이런 말도 있었으니 말 다했지.
자, 이제 생도맹그를 보자. 있는 게 고작해야 야자수 뿐 인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섬은 무려 프랑스 GDP의 40퍼센트를 넘나드는 꿀단지였다.
뭐? 잘못 들은 것 같다고? 아니. 잘들은 거 맞다. GDP의 40 퍼센트.
삼성 두 개를 합치면 생도맹그 하나! 와! 삼성이 복사가 된다구!?
즉, 1 + 1 = 1 이 되는 기적의 방정식을 생도맹그는 해내고 말았다.
저어어기 툴루즈에서 열심히 농장을 가꾸는 장 모 씨의 쟁기질보다, 생도맹그에서 화물선을 타고 프랑스로 오는 사탕수수 한 줌이 더 값어치 있는 게 바로 지금 세상이란 말이다.
‘사탕수수와 커피가 곧 반도체나 다름없는 위치라는 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며, 그 중 프랑스 산 사탕수수와 커피가 가장 우수하고 이는 미각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달달하고 아름다운 생각인지.
아무튼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 삼성 두 개짜리 노다지에 부임 받은 부패관료가 만들어낸 서른 두 권의 비밀장부를 감식하게 된 나로서는 그저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시발. 이번 일 끝나면 진짜 그만 둬야지.
다음 적임자로는... 그래. 나랑 잘 아는 사람 한 명 있지 않나.
똑똑하고, 또 인성도 좋고 마치 호호 할아버지 같은 그 분이라면 우리 재무부를 잘 이끄실 수 있을 거야!
“기욤 군. 자네... 또 무슨 흉악하고 사악한 계획을 꾸미는 겐가?”
“흉악하고 사악한 계획이라니요. 콩도르세 후작님. 누가 들으면 제가 나쁜 사람인 줄 알겠어요?”
“아, 일손 모자라다고 조폐국에 쳐들어와서 조폐국장과 직원들을 끌고 오는 건 나쁜 짓이 아니었군?”
“어차피 다 재무부 아래 한 식구 사이 아닙니까. 상부상조하시죠! 하하!”
“한 식구 사이? 자네는 가족을 이틀 동안 일로 붙들어 놓은 채로 퇴근도 안 시켜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이, 우리는 프로페셔널이지 않습니까. 아마추어처럼 왜 이러세요.”
우리 콩도르세 후작님께서 왜 이러신담.
“기욤 군! 난 신혼이란 말이야! 어서 날 집으로 보내달란 말일세!”
“신혼은 무슨, 결혼한 지 2년이 넘었으면서 무슨 신혼타령이세요? 어서 감식이나 끝내시죠. 아직 서른 권이나 더 남아있습니다.”
“아아, 소피... 내 사랑! 이 콩도르세는 여기서 과로로 죽나 보오. 부디 내 비석에는 기욤 군 밑에서 개처럼 구르다 천국으로 갔다고 써주시오...”
“진짜 과로로 죽기 싫으시면 어서 일 다 끝내고 침대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어허. 저랑 원수지신 것도 아니고, 눈을 왜 그렇게 뜨십니까.
자꾸 그러면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러 올 지도 몰라요?
“기욤 군. 내가 생각하는 건데, 자네는 죽어서 천국에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네.”
“아니 또 왜요?”
“자네 눈에는 밖에 저 친구들 얼굴이 안 보이나 봐.”
콩도르세 후작님은 책상에서 연신 커피를 들이키고, 다크 서클 때문에 퀭해진 얼굴로 펜대를 놀리는 우리 착한 재무부 직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 잘 해주고 있구만. 왜 그러세요?”
“저 친구들이 자네 원망을 그렇게 하는데, 하느님도 참 무심하시지.”
“어허 원망이라니.”
하. 이게 다 블랑쉐랑드 그 놈 때문이다. 그 놈이 수작질을 부려놔서 재무부 직원들이 모두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어.
아 아무튼 블랑쉐랑드 총독 때문임. 아무튼 그럼!
사실, 내가 조오오오금. 아주 쪼오오오오끔 원망 받을 짓을 하긴 했지만...
“뭐, 뭐에요! 가게 해주세요!”
“히히! 못 가!”
“왜, 왜 이러세요!”
“너희들은 여기서 기욤과 함께 일하는 거야.”
이게 다 눈물을 삼키며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씨...발... 집에 가고 싶어...”
“대체 삼시 세끼가 왜 간편식사입니까? 우리도 따듯한 밥! 따듯한 고기! 맛있는 와인으로 멋있는 식사를 하고 싶단 말입니다!”
“총감님. 저 이제 사람 얼굴에 숫자가 겹쳐 보입니다.”
첫째 날에는 모두들 날 원망하더라. 내가 재무부 정문을 잠궈버린 다음에 내 의자 밑에 깔고 앉았거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 여러분! 비몽사몽하시죠!?”
“······예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총감님?”
“여러분, 제게 그러시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왜 거지꼴로 이렇게 밤을 지새우고 있을까요?”
“총감님 때문이죠.”
“각하, 정말 혁명당하고 싶으십니까?”
“저도 여러분과 같이 거지꼴로 커피를 들이키지 않습니까. 그러지 말고 진짜 원인이 뭘까 한 번 생각해보시죠!”
“······뭐, 일감이 있으니까 하겠죠?”
어우 그런 답 너무 좋아. 딱 내가 원하는 답을 말해주시네. 인사고과에 플러스 5점을 더해주겠어용.
“그러면 그 일감은 누가 만든 거죠?”
“······생도맹그까지 배를 보내서 서류를 가져온 총감님?”
씁. 이 사람들 나한테 왜 이래.
최소한 나는 여러분을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아니.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봅시다 여러분.”
“······생도맹그 총독부?”
“아, 좋아요! 우리가 이렇게 개처럼 일하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생도맹그 총독부가 일을 좆같이 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기, 기욤 군. 윗사람이 비속어는 쓰지 않는 게 좋지 않겠나...?”
“우리가 존나게 일하는 이유! 바로 생도맹그 총독부가 일을 존나게 만들어 놨으니까!”
“······말을 말지...”
“그으으런가...?”
내가 미리 직원들 사이에 심어놓은 바람잡이들이 일어난다.
- 선생님 잠깐만요.
- 예, 총감님.
- 이번에 딸아이를 낳으셨다면서요? 벌써 넷째네요! 축하드립니다.
-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총감님.
- 그런데 아이만 넷이면 지금 봉급으로 기르기 좀 어렵지 않을까요?
- 쉽...지는 않지요... 하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 아유 적임자가 여기 있었네!
- 적... 적임자요?
- 제가 원하는 거 하나만 해주시면 1계급 승진이야 껌이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물론입니다, 총감님!
“우우우!! 타도 생도맹그!! 타도 부정부패!!”
“우... 우우...!!”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집에도 못 들어가고 개처럼 일하는 이유는 바로 생도맹그 놈들 때문입니다! 타도 생도맹그! 타도 부정부패! 타도 블랑쉐랑드!!”
씹을 거리를 찾는 저 하이에나들이 혼미해지도록 옆에서 속닥여준 보람은 정말 확실했다.
내가 예전에 자동차의 연료로 가장 적합한 게 석유라면, 사람이 가장 잘 연소할 수 있는 연료는 분노라고 한 거 기억나나?
“우릴 존나게 일하게 만든 생도맹그를 타도하자!! 와아아!!”
“과장님! 여기 이거 뇌물수수로 엮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씨발! 말해 뭐해! 당장 혐의에 추가해버려!”
로베스피에르 의원이 재판장을 자신의 신전으로 만들기까지 1시간이 걸렸더라면, 나는 피곤에 찌든 재무부를 부정부패를 타도하는 내 신전으로 만들기까지 단 10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보다 왜 자꾸 절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콩도르세 후작님?
***
“이보게 유제프.”
“예, 장군님.”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아닌가. 안 그래도 앞날이 어두운데 조국의 등불을 짊어진 청년들의 낯까지 어두워지면 큰일일세. 하하하!”
속이 타는 자신과 달리 넉살 좋게 웃어넘기는 선배의 모습에, 유제프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내일이라도,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태인데 어떻게 사람이 저리 초연할 수 있단 말인가.
“···장군님,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지 않으시렵니까? 장군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폴란드에서는 더 이상 항전을 할 여력이 없습니다!”
“유제프.”
“예, 장군님.”
“누군가는 이 땅에 남아 왕관을 쓴 저 압제자들에게 폴란드인의 기상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비록 누군가는 쓸모없는 죽음이라고, 미약한 발버둥이라 할 수 있을지라도, 그 발버둥이 반향(反響)이 되어 고요한 호수에 조그마한 파동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난 족하네.
선배 장교는 유제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며 뒷붙였다.
“그러니 자네는 어두운 생각 말고 부디 기회를 기다려주게. 프랑스에서는 이번에 흑인들에게까지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보여주었으니. 폴란드인이라고 괄시하지는 않을 걸세. 그러니 그 점을 파고 들어 프랑스인들의 존경과 조력을 얻게나. 기회는 오기 마련이네.”
“···그런 기회가 정말로 오겠습니까?”
“물론이지! 자네 날 모르나? 난 이미 영국 해적 놈들에게서 신대륙을 해방시켜본 적이 있다네.
그러니 기회를 기다리게. 언젠가 찾아올 단 한 번의 기회를 말이야.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엔 꼭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걸세.”
“신과 명예와 조국을 위해(Bóg, Honor, Ojczyzna).”
“신과 명예와 조국을 위해(Bóg, Honor, Ojczyzna).”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는 그렇게 프랑스로 향하는 마지막 폴란드 국적의 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