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자유, 평등, 박애 (8) (144/341)

자유, 평등, 박애 (8)

로베스피에르가 재판장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대를 뒤집어 놓았다 해도, 아직까지 일반 시민들의 여론은 낙관적으로 볼 수만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해보자.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길가다가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보면 최소한 호기심이 동해 눈길을 주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불과 얼마 전까지 전제정치가 먹히던 18세기에 연설 한 번 했다고 여론이 홱홱 바뀌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럼 뭐, 이대로 앉아서 투생이 죽는 걸 보겠다고?’

그건 아니고. 이런 여론을 반전시키려면 상당히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는 거지.

일단 까놓고 말해서 사람들은 낯선 걸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그게 적게는 음식일수도 있고 크게는 물건일수도 있고, 더 크게 본다면 사람일 수도 있고.

우리가 야구 볼 때 아무리 노쇠했어도 10년 넘게 본 조선의 4번 타자가 타석에 서는 걸 바라지, 쌩 신인이 타석에 서는 걸 원하지는 않잖나.

우리가 거실에 앉아 보던 TV는 처음 나왔을 때 ‘바보상자’라고 불렸고, 스마트폰은 전화기에 쓸데없이 컴퓨터를 넣어 놨다고 군소리가 나왔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떻게 됐었지?

노쇠한 베테랑 타자 대신 타석에 서던 신인은 팬들이 가장 연호하는 선수가 되고, 바보상자인 TV는 효도상품이 되었으며, 스마트폰은 인간의 필수품이 되었다.

낯설면 내키지 않지만 낯이 익으면 모두가 내켜하는 게 바로 사람의 본성이란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온 평생을 백인과 함께 살던 파리 시민들이 난생 처음 보는 흑인을 껄끄러워 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거랑 이 면회가 무슨 상관이 있소?”

“상관이 당연히 있지요. 투생.”

나는 품 안에서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투생을 구원하려면 무조건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 법.

그러려면 투생이 괴물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이 깨달아야 한다.

파리에 사는 장 씨나 생도맹그에 사는 투생 씨나 모두 빵을 먹고, 밤에는 자고, 가족과 가끔 나들이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건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리고 그런 인간적인 공통점이야 말로 시민들에게 피력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될 거다.

“그러니까 투생 씨가 생도맹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쭉 읊어보시죠.”

“어...”

“뭘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면 가족 얘기부터 해보세요. 부인이나 아들, 딸 얘기 같은 거.”

감성을 팔 때 제일 잘 먹히는 건 뭐니뭐니해도 절절한 가족애 아니겠나.

[포브스 단독 인터뷰, 투생 브레다의 삶]

“투생 브레다면... 그 학살자인가 뭔가 하는 흑인 아냐?”

다음 날. 사람 투생과 그의 아내 수잔느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와 눈물 나는 부성애가 담긴 소책자가 마차의 짐칸에 실려 파리와 프랑스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

1792년 7월 30일.

프랑스 혁명왕국, 툴롱 항.

“이야. 여기가 사장님 고향이구만?”

“어우 비린내야, 하여간 항구 아니랄까봐.”

“다들 잡담은 그만하고 짐이나 빨리 내리지.”

저번 <늙은이 뒤셴> 진압 때 역할을 톡톡히 했던 흉갑부터 권총에 납탄, 검, 수류탄, 거기에 화약심지까지.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보다도 더 많은 물자를 연장 삼아 챙긴 듯 한 이삭의 민족 소속 직원들은 점검을 마치고 짐들을 어깨 뒤로 짊어졌다.

일반인이라면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마차를 타고 파리에서 툴롱까지 오느라 몸이 보통 곤혹스러운 게 아닐 테지만, 수년 동안 행군으로 다져진 척탄병들의 다리는 그깟 피로는 우습기 그지없을 뿐이었다.

“허허, 아주 대장부들이 따로 없구만.”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니콜라 우디노입니다.”

이삭의 민족 민간경호기업 부장, 니콜라 우디노는 생전 처음 보는 노인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어서 오게, 젊은 친구! 파리에서 여기까지 먼 길 달려왔구만! 그래, 기욤 그 아이는 잘 지내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사장님께서는 무탈하십니다.”

“허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만!”

노인은 오랜만에 듣는 막내아들의 소식에 싱글벙글 웃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사내의 어깨를 기쁜 마음으로 토닥였다.

“아,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지? 늙은이가 괜스레 시간만 빼앗았군. 이리 오게. 자네가 저 멀리 생도맹그까지 타고 갈 배편을 보여주겠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키가 180대에 달하는 장정 서른과 우디노는 노인의 안내를 따라 항구 한 편에 정박된 30미터짜리 쾌속함 앞으로 향했다.

“18문 급 코르벳함 탐험가(Expédition)호네. 웅장한 프리깃이나 전열함에 비하면 작긴 해도 그만큼 빠르니 이번 일에 적합할 걸세.”

“역시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어르신.”

“그래, 출발은 언제 할 건가?”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사장님께서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셨으니 그에 응당 따를 뿐입니다.”

“아주 호방한 친구로구만.”

항만장 샤를은 껄껄 웃으며 마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내들을 이끌고 배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빌뇌브 함장! 자네가 기다리던 승객이 왔소! 우디노 부장, 저쪽은 탐험가 호의 함장이네.”

“안녕하십니까! 이번 항해를 맡게 된 해군 대령 피에르 실베스트르 빌뇌브라고 합니다. 생도맹그까지 빠르게 보내드리지요.”

“반갑습니다. 이삭의 민족 민간경호기업 부장 니콜라 우디노라고 합니다.”

전직 육군 대위와 현직 해군 대령은 두 손을 맞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우리 배는 출발준비가 끝났습니다. 출발하시고 싶으시면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바로 갑시다.”

“바, 바로 말씀이십니까?”

“머뭇거릴 틈이 없소.”

***

3주에 달하는 항해 끝에, 우디노와 이삭의 민족 직원들이 탄 코르벳 함 원정대 호는 무사히 생도맹그 항구에 입항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전쟁으로 다져진 우디노의 감각은 주인에게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곳곳에 야자수가 자라나 한 눈에 보기에도 유럽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생도맹그의 풍경을 본 우디노는 아무 말 없이 허리춤에 찬 권총과 검을 어루만졌다.

뭔가, 뭔가가 꺼림칙하다.

전쟁터에서 느꼈던 기분 나쁜 살기가 이곳에도 느껴지는 듯 했다.

“제군들 모여 보게.”

“““예. 부장님.”””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장교와 병사, 부사관으로 부르던 서른 명의 전직 척탄병들은 이제 서로를 부장, 사원, 대리로 부르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건 생도맹그 지도다.”

우디노는 자신이 직접 골라 부대에서 이삭의 민족으로 데려온 서른 명의 전우가 모두 볼 수 있게 지도를 벽에 걸며 말했다.

“부장님, 이미 다들 몇 번이나 본 내용 아닙니까. 갑자기 왠 회의입니까?”

“예감이 영 좋지 않아서.”

전쟁터에서 같이 구른 상관의 말 한마디에 모두의 눈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더라도 그냥 확 힘으로 엎어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깟 놈들이 우릴 어떻게 당해낸답니까?”

“맞습니다. 식민지 치안군 따위는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지 말입니다.”

“수류탄 준비할까요?”

하여간 거친 척탄병 중에도 왈가닥만 뽑아놓은 거 아니랄까봐 벌써부터 총독부 문을 곡괭이로 까버리자니, 수류탄을 던져 넣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렇게 처음부터 과격하게 하지는 말고, 차라리 뺨 한 대 맞아주고 밀어버리는게 어떤가?”

“역시 부장님이십니다!”

“하하! 그렇지?”

역시 귀찮게 시말서니 경위서니 쓰는 것보단 화끈하게 정당방위가 낫지 않겠나.

***

“여긴 출입금지 구역이오! 걸음을 돌리시오.”

“글쎄.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이곳은 총독부 건물이오! 당장 나가지 않으면 군법에 따라 유치장에 가두겠소!”

“재무부에서 나왔소. 비키시오.”

“······재, 재무부?”

푸른색의 군복을 입은 초병은 재무부라는 한 단어를 듣자 움찔하고 얼어붙었다.

“1분대는 1층을, 2분대는 2층을 뒤지도록.”

“““예, 부장님.”””

“어...? 어...? 그러면 안 되는데...”

“형씨,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있지 말고 그 몸뚱이 저리 치우지?”

“걱정하지 마쇼, 조금 둘러보다가 나가줄 테니.”

재무부에서 나왔다는 작자들은 초병의 어깨를 장난치듯 툭툭 두드리곤 킬킬 대며 총독부 안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저놈들은 뭔가!”

“어, 어, 어떻게 합니까, 중위님? 재무부에서 왔다는데?”

“뭐? 재무부? 이런 씨발... 씨발!”

난데없는 소란에 달려온 식민지군 중위의 낯빛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했다.

“지금 총독부 건물 안에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설마... 저 작자들을 치시려구요?”

“왜? 겁나나?”

“파, 파리에서 우릴 가만 놔두겠습니까?”

“어차피 장부가 저 재무부 놈들 손에 들어가면 끝나는 건 매한가지야.”

“무, 무기고에서 머스킷을 꺼내올까요?”

“아니. 소란이 일어나면 안 되니 총 대신 검으로 조용히 처리하자고. 덩치야 좀 있지만 그래봤자 재무부 샌님들 아닌가. 깜둥이 반군 놈들과 치고받는 우리에게 한 입 거리나 되겠어?”

식민지군 중위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정문을 걸어 닫게.”

***

“중사, 아니. 대리님. 저 새끼들 영 수상하지 않습니까?”

“어. 마침 나도 존나게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얼굴에 딱 우리 등에 칼침 박겠다고 적혀있는데요.”

“쓰읍. 이거 먼저 쳐야 되냐?”

“부장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한 번 물어보지 뭐.”

콧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대리는 2층 총독 사무실을 뒤지고 있는 니콜라 우디노에게 가서 물었다.

“우디노 부장님. 저 새끼들 우리 뒤통수 칠 준비 중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우린 사장님과 재무부 명령을 따른다. 독단적인 행동은 금지야.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괜스레 명분 주지 말고 차라리 머리를 대주도록.”

우디노는 무거운 나무 책상을 번쩍 들어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 대 맞으면 그때부터는 정당방위 아닌가.”

“역시 부장님! 정말 옳으신 말입니다!”

***

“제군들! 쳐라! 상대는 책상물림들이야!”

“와아아아아!!”

“아이고 나 죽네에.”

“엄마야.”

파리에서 온 재무부 샌님들은 희번덕거리는 장검을 들고 난데없이 들이닥친 식민지군을 보고 질겁하며 외쳤다.

좋아. 이걸로 기선제압은 확실히 됐을 터!

“너희들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다. 다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을 뿐. 지금이라도 검을 내려놓고 투항한다면 고통 없이 보내주마. 그렇지 않는다면 산 채로 정글에 던져 넣어 맹수들의 밥으로 줄 것이야!”

병사들을 몰고 온 식민지군 중위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앞에 나가 파리 출신 샌님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숫자 놀음뿐인 샌님들은 곧 엉엉 울며 자지러질 터.

이제 남은 건 저 놈들이 타고 온 배를 먼 바다에서 격침시키는 것 뿐 인가.

중위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깔끔한 일처리에 입 꼬리가 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중위의 귀에 들려온 샌님들의 목소리는 공포는커녕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이야 고맙네! 시원하게 엎어버릴 기회를 줘서.”

“······뭐?”

역시 샌님들처럼 조용하게만 지내는 건 우디노의 성미에 영 맞지 않았다.

“제군들! 이제 우리가 검을 뽑아도 정당방위 아닌가!”

“““부장님 말이 맞습니다!”””

“무, 무슨 소리...”

자신을 미친놈 쳐다보듯 보는 중위의 시선을 즐기며, 우디노는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외쳤다.

“척탄병!! 돌격!!”

“와아아!!”

“끼릭휘릭 휘요옷!!”

“으, 으아아!! 샌님들이 미쳤다!!”

어느새 대열의 앞에 선 우디노는 다른 식민지군은 부하들에게 맡긴 채 중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본토방위군이 아니라 식민지군은 아무리 잘 쳐줘도 제 2선 폐급 부대들이다. 그 말인즉슨 대가리만 따면 저절로 와해될 오합지졸이라는 것.

“이...! 이...! 날 뭘로 보는 거냐 이놈!!”

그 발칙한 생각을 꿰뚫어 본 중위는 검을 있는 힘껏 뻗어 우디노의 가슴팍을 찔러나갔다.

그러나 우디노는 가볍게 중위의 검 끝을 살짝 쳐내고 가깝게 붙어 오른발로 가슴팍을 있는 힘껏 차버렸다.

“억!!”

180센티에 달하는 거한의 발차기에, 중위는 손에서 검을 놓치고 뽀득뽀득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 저 멀리까지 우당탕 소리와 함께 구르고 말았다.

“뭘로 보긴? 이런 촌구석 장교라 봤자 시골 골목대장밖에 더 하나?”

“악!!”

“파리에서 파견된 재무부 직원들을 해하려 한 죄와 더불어 증거은닉 죄로 체포하겠다.”

우디노는 쓰러진 중위의 뒤통수를 군화로 밟으며 말했다.

“부장님! 여기 금고열쇠 같은 게 있습니다!”

“그래? 어이. 이봐.”

“왜, 왜 그러시오...”

“저 열쇠. 어디 쓰는지 아나?”

우디노는 자신의 군화 밑에 엎드려 있는 식민지군 중위를 보며 말했다.

“난, 난 몰라...”

“하아... 이봐, 잘 생각하라고. 난 지금 네 놈에게 선택을 하게 해주는 거야.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지 아니면 감방에서 한 10년 20년 썩기만 할지. 혹시 아나? 잘만 협조해주면 재판장에서 네 형량을 좀 깎아줄지?”

“······.”

식민지군 중위는 땅에 처박힌 상태로 눈을 이리저리 뒤룩뒤룩 굴리기 시작했다.

“아아악!!”

“이 새끼가 어디서 눈을 굴려.”

“할, 할게요! 하겠습니다! 하게 해주십쇼! 제발!”

식민지군 중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외치기 시작했다.

우디노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위의 손에서 군화를 떼며 입을 열었다.

“좋아.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겠나.”

3주 후, 8월 24일.

파리의 재무부로 수많은 비밀장부가 배송됐다.

물론 다소의 기물파손 경위서가 그와 함께 섞여있었지만. 뭐, 누가 신경이라도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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