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7)
“하사님,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점심? 난 저번에 받은 쿠폰인지 뭔지 쓰려고.”
“간단하게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말입니다.”
“어, 야. 저기 민원인 왔나보다.”
혁명법원에 휘몰아친 두 번의 광풍(狂風) 때문에 연일 몸이 갈려나가는 법관들과 다르게 경비들을 오늘도 하릴없이 법원 앞을 지킬 뿐이었다.
애초에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고, 또 평소에 거드름 피우던 높으신 판사 분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도 꽤 볼만 하지 않은가.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그래 뭐 무슨 일이야 있겠나.
“아, 초병! 여기 법관들을 모두 모아주지 않겠나?”
“예?”
집에 손주도 있을 듯 싶은 이 할아버지는 누군데 갑자기 높으디 높으신 법관나리들을 옆집 강아지처럼 부른단 말인가.
“그... 실례지만 누구신지 신원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신원? 아, 그러지. 롤랑 드 라 플라티에르. 파리 2구 시민이자 법무부 장관일세.”
“장, 장관님...?”
이야... 무슨 일이 있어나네? 재무총감에 산악파 당수에 이번엔 법무부 장관?
참으로 스펙타클한 군생활 아닌가. 고향에 간다던 필리프 그 놈처럼 예비역 신청을 했어야 하는 건데. 젠장할... 과거의 자신이 한 없이 저주스럽다.
“사, 사수님께 잠시 물어보고 와도 괜찮겠습니까?”
“음! 그러도록 하게! 나는 담배나 한 모금 피고 있지. 하하하!”
왠지 모르게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는 자칭 법무부 장관은 파이프에 담뱃잎을 꾹꾹 쑤셔 넣으며 말했다.
“저... 하사님?”
“왜? 뭐하는 작자래?”
“법무부 장관님이시라고...”
“······흐흐흐, 이야 재무총감님 다음은 법무부 장관님이야? 기가 차는구만 진짜.”
한숨만 나온다. 먹고사는 직업을 때려치울 수도 없고.
다음 보직신청 때는 그냥 야전으로 가야지. 러시아 훈족 놈들과 시원하게 나뒹구는 게 이 숨이 턱턱 막히는 법원 경비보다 몇 백 배는 더 나을 거다.
***
“좋아, 다들 모였나?”
“““예, 장관님.”””
“그래! 다 모여야지! 아무렴! 이 난리를 쳐 놓고 어디 도망갈 구석을 찾을 인간군상이 있겠나?”
“““······.”””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연신 독설을 날려대는 까마득한 선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후배들은 식은땀만 주륵주륵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미래의 기상예보 같은 게 지금 있었다면 이 날 파리의 강수량은 평일보다 상당히 높게 나왔으리라.
“쓰으읍... 후우... 행정부 수반이나 다름없는 재무총감, 입법부 양 당수까지 죄 벌집 쑤시듯 쑤셔놓은 우리 사법부의 용사들! 어디 한 번 그 입으로 씨부려··· 아니, 말해들 보게나.”
30년 동안 검사장으로 재직한 법무부 장관은 화창한 여름날 파리의 공기 성분비에 니코틴 한 모금을 더하며 이어 말했다.
“아, 그런데 말일세. 십자군 영웅 고드프루아처럼 용맹한 자들이 왜 반혁명과 싸우는 전선에는 안 나가고 법정에서 말따먹기만 하는지 이 사람은 도통 이해를 하지를 못하겠단 말이야.”
세상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런 말까지 한단 말인가.
초임 법관들은 모두들 눈을 저 아래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이야 법원 바닥 무늬는 이렇게 생겼었구나.’
‘대리석을 저렇게 깎으려면 정이랑 망치로 몇 번 정도 두드려야 할까?’
‘어머, 나뭇결이 참 예쁜데? 이건 무슨 나무지?’
모두들 평소에는 별 관심도 없이 구두로 즈려밟고 다니던 바닥에 호기심이 동했다.
“이보게들, 왜 아무 말이 없나?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
“이런 마굿간 말똥 같은 놈들!!”
법무부 장관은 입을 다물고만 있는 갑갑한 후배들을 보고, 파이프에 다시 한 가득 담뱃잎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긴 말 안하겠네. 투생 브레다라는 흑인 재판을 맡았던 법관은 이리 나오시게나.”
“예, 예...”
기숙학교 학생들이 사감에게 체벌 받는 것 마냥 횡대로 서 있던 법관들 중 하나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자네인가?”
“예. 그, 그렇습니다...”
다음 순간, 둔탁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법관이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악!!!”
“곪디 곪았던 봉건제 시절에도 법관들 나름의 도덕이라는 게 있었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이런 식으로 부패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타다만 담뱃재가 허공으로 흩뿌려지고, 귀한 참나무 담배 파이프에 금이 갔다.
하루 세 끼 흑빵에 우유만 먹고사는 산악파의 로베스피에르마냥 성인(聖人)놀음을 하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 이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법관 같은 작자들이라면 받을 거 안 받을 거 구별은 해야 될 거 아닌가.
그날 파리 혁명법원에서 법무부 장관은 담배 파이프 세 개를 부러뜨리고 나서야 마차를 타고 돌아갈 수 있었다.
***
1792년 7월 19일.
파리 혁명법원.
“로베스피에르 의원ㄴ···아니지. 로베스피에르 변호사, 말해보십시오.”
판사의 말에 변호사가 일어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님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생각 중에 하나는 시민이 무장해서 시민을 공격해 자신의 생각을 강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장한 선교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생도맹그에 무엇을 들고 갔습니까? 바로 총과 검을 들고 갔습니다! 법전과 도덕이 아니라 총검을 가지고 갔단 말입니다!”
변호사는 재판장 한 가운데에서 손에 든 서류를 펄럭이며 자신을 둘러싼 청중들을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그에 대한 증거로 지난 10년간 생도맹그에서 본국에 요청한 화약, 머스킷, 포탄의 수량을 제시하겠습니다! 투생 브레다는 억압에 맞서 싸운 것이지 제 이기심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닙니다!”
판사석 가운데에 앉은 판사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은 다른 판사를 쳐다보았다.
- 증거물로 채택하는 게 나을까요?
- 안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아무래도 그렇지요?
“본 재판부는 변호사 측의 증거물을 정당한 증거로 채택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판장님.”
첫 번째 재판과 다르게 변호사, 그것도 아라스 시에서 승률 90퍼센트를 찍던 변호사가 변호를 맡고, 변호 측의 증거물이 채택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배심원님들, 범죄는 원하는 바를 얻으려 결백을 도살하고 결백은 범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우는 법입니다. 본 변호인은 과연 블랑쉐랑드 총독과 생도맹그 총독부가 그토록 졸속으로 첫 번째 재판을 진행한 이유가 무엇일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보시오! 변호인! 그건 생도맹그 총독부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오!”
“정숙하시오! 정숙! 아직 변호인의 발언 시간이 끝나지 않았소이다!”
젠장, 그렇게 뇌물을 퍼다 먹인 판사 놈이 휴가를 내고 집에서 은둔하는 게 말이 되나?
사실은 눈두덩이에 새파란 반점이 생기는 바람에 밖으로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알리없는 블랑쉐랑드 총독은 이를 북북 갈았다.
“자, 총독부 측. 입론하시오.”
“감사합니다, 재판장님.”
‘제기랄, 이대로 있으면 무조건 죽는다.’
그러나 그걸 생도맹그 총독부가 두고만 볼 생각은 아니었다.
비록 재무부에서 생도맹그 재무보고서를 감식한다고 하지만 이리저리 숨겨놓은 횡령액을 찾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터.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저 깜둥이 놈을 단두대 밑으로 보내야 한다.
“우리 총독부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피고인 투생 브레다는 노예 출신의 흑인이며, 같은 처지인 노예들을 이끌고 프랑스에 대한 일체의 테러를 기획 및 획책했으며 그 때문에 생도맹그에 살던 수많은 선량한 백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주인을 무는 개는! 당연히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판장님, 배심원님들, 창조주께서는 모든 인류를 사랑과 행복의 한없는 고리로 묶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감히 신의 고리를 파괴하는 압제자들을 타도해아 합니다! 그들이 더럽혀 놓은 지상을 다시 정화하고 회복하는 일은 제가, 우리가,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자유와 선은 하느님의 가슴에서 동시에 태어난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노예는 무엇입니까?! 노예에게 자유가 있습니까? 선이 있습니까? 노예라는 것에게 있는 건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압제의 상징이라는 의미 뿐 입니다!”
총독부가 무슨 말을, 무슨 주장을 들고 오던지 로베스피에르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아라스에서 제 1신분과 2신분들에 대항해 제 3신분들을 변호할 적을 생각하면 이런 류의 재판이야 수도 없이 겪은 로베스피에르로서는 그저 애들 놀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수년 전의 자신이 그랬듯 또 다시 청중들과 재판장을 향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여러분, 저는 내일이면 또다시 악과 같은 압제에 투쟁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그 날까지! 우리의 아들, 딸, 손자와 손녀가 마음껏 뛰놀 세상이 될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압제가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출 그 날까지!”
“노예니, 깜둥이니! 그런 말이 과연 하늘에 계신 절대자 앞에서 통할 듯 싶습니까?! 순수한 변명이나 투쟁 없는 승리를 기대하지 말고 운이나 타인의 악덕에 의존하는 어떤 기대도 하지 맙시다!”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 로베스피에르!”””
흑인 깜둥이 하나를 죽이기 위한 법원이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주창하는 로베스피에르의 무대가 되기까지는 불과 한 시간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
키야. 역시 무슈 단두대 로베스피에르,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로베스피에르 덕에 두 번째 공판에서는 재판 연기를 얻어낼 수 있었다.
물론 무죄가 아니어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판부가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겠지.
그러면 이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서인도 제도가 심상치 않다?”
“아이, 그러문입죠 각하! 지가 항해 때 똑똑히 느꼈습니다요!”
“어디가 어떻게 심상치 않았습니까?”
“평소대로라면 커피나 담배가 최소한 화물칸에 꽉 차야 하는데, 요 근래에는 그 근방을 왔다갔다하는 화물선에 실리는 화물이 반토막이 나버렸지 뭡니까? 아! 그리고···.”
“또 뭔가 있습니까?”
“식민지 총독부 항구에 있는 병사들도 그렇고 사람들 수가 확 줄어버렸습니다요. 원래는 항구 치안 때문에 최소 수십씩은 배치를 해뒀는데, 이번 항해 때는 다 합쳐서 여덟 일곱뿐이었지 뭡니까. 사람들도 잘 안보이고...”
“우디노 씨.”
“예, 사장님.”
“초병과 사람이 줄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무언가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구린 일이겠지요?”
“말해 뭐하겠습니까, 사장님.”
“음... 저기요. 생도맹그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아, 뭘 타고 가냐에 따라 차이가 있기야 하지만... 화물선 기준 대강 왕복으로 두 달 쯤이면 다녀옵니다요.”
나는 우디노 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디노 씨. 해군에 연락해서 코르벳함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대서양의 따스한 휴양지로 출장 한 번 다녀오시죠.”
가는데 드는 경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