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6)
고등법원, 아니. 혁명 이후엔 파리 혁명법원으로 이름을 바꾼 파리 6구와 5구 사이의 고풍적인 건물은 이른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검사장님, 이 자료는 어디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1호부터 4호는 재무부로, 5호는 베르사유로 보내게.”
일손이 딸리는 바람에 수석 검사장부터 말단 검사까지 서류를 수레에 얹고 이곳저곳 쏘다니는 건 물론.
“뭐하고 있어! 판례 싹 다 뒤져서 가져와!”
“제기랄... 그날 후배랍시고 그 작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평소라면 의자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던 판사들도 무거운 벨벳 법복은 의자에 걸어놓고서 양팔을 걷어 올린 뒤, 두꺼운 판례기록을 한줄, 한줄 뒤져나갔다.
“서기님, 할 일도 태산인데 이게 대체 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까라면 까야지 뭐.”
서기보는 사수의 말에 땅이 꺼져라 한 숨을 쉬고는 자신이 맡게 된 300년 전 판례가 담긴 책을 폈다.
이게 다 그 투생 브레다라는 흑인 하나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니.
그래, 행정부 재무총감이 판사를 들이 박아버리는 희대의 사건이 다른 것도 아닌 겨우 흑인 목숨 하나 때문에 일어났다면 믿겠는가?
며칠 전 사건을 기억하면 할수록 서기보는 심장이 쫄깃해지고 몸이 덜덜 떨렸다.
- 아, 답답하네. 나가라니까?
- 예, 예!
“이야, 먼지 봐라.”
“윽! 콜록콜록!”
젠장, 그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손을 달달 떤 바람에 낡은 책에 붙어있던 먼지가 마치 봄날의 꽃잎들 마냥 자기가 앉은 자리 위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얼마나 오랜 시간 책을 서고에 처박아 놨으면 책을 열자마자 텁텁하고 꿉꿉한 양피지 냄새가 진동을 한단 말인가.
분명 공부할 때는 ‘법대만 가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니까?’라는 소리를,
법대에 들어가고 나서는 ‘법률시험만 통과하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니까?’라는 소리를,
그런 소리들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는데 정작 여자들이 아니라 고조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듯 싶은 양피지가 줄을 서잖아?
‘이게 뭐야! 내 청춘을 돌려줘! 흑흑!’
그러나 이제 막 법률시험을 치르고 발령받은, 법원이라는 먹이사슬 맨 아래에 자리한 젊은 서기보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책에 쌓인 먼지를 날리지 않게 신경 써서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먼지털이기인지 아니면 먼지털이기가 나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한참을 집중하던 서기보는, 누군가 자신의 책상 앞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를 위로 치켜들었다.
수수한 정장에 앳된 얼굴의 남성.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고하러 왔습니다만.”
“상고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피고인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서기보는 책 때문에 옆으로 치워놓았던 펜에 다시 잉크를 묻히며 물었다.
“투생 브레다.”
시바아아알. 또? 대체 그 깜둥이가 뭐 그리 소중하다고 이 난리인가.
“하아, 알겠습니다. 변호인은 누구십니까?”
“막시밀리앙 프랑수아 마리 이지도르 로베스피에르. 변호사 자격증은 아라스 법원 시절에 땄습니다.”
······로베스피에르? 그... 산악파 당수 말하는 건가?
“······본인이십니까?”
“예.”
서기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자신의 사수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두 배 쯤 커진 눈동자에, 달달 떠는 입술,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멈춰선 손.
완벽하게 자신과 같은 자세다.
‘빌어먹을... 제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시련을 내려주십니까 하느님?’
서기보는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책상에 고정시키고서 상고 서류에 천천히 철자를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미치겠다. 펜이 이렇게 미끄러웠나?
“아참, 이지도르에서 두 번째 철자는 s이니 잘 기입하시길. 아라스 법원에 있을 시절을 돌이켜보면 서기보들이 그 부분에서 많이 실수하더군요.”
“예, 예!”
난데없이 폭탄을 터트리고서 저리 자상하게 말하다니, 병주고 약주고 하는 건가?
아니다, 병주고 약도 안주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암.
“흐음, 오귀스탱?”
“예, 형님.”
“내 이번 달 일정 중에 비는 날이 있나?”
“다음 주 수요일이 빕니다.”
“수요일이라, 좋군. 서기보 선생?”
“예, 예?!”
“다음 재판 날짜를 그날로 잡아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게 통보지 무슨 부탁인가. 내가 비록 말단 서기보여도 엄연히 법관이고 사법부의 일원이란 말이다. 이런 외압에 굴할 것 같은가?
“물론입니다, 의원님 일정에 맞춰야지요! 하...하하하...”
“아주 좋군요. 감사합니다.”
기욤 드 툴롱에 이어 두 번째 폭탄을 기폭 시킨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그렇게 싱긋 웃으며 법원을 나섰다.
자코뱅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는 옆자리에 앉은 형이자 당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님, 다 좋은데. 여론은 어떻게 하시려구요?”
“음? 여론이라? 무슨 말이냐, 오귀스탱?”
하여간에 답답한 형 같으니.
“시민들은 투생을 죽이길 원하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간 우리 산악파에 대한 지지가 와해될 지도 모릅니다!”
“음. 그래?”
“하, 시발! 막시밀리앙 형! 알 만한 사람이 왜 자꾸 모르겠다는 것 마냥 그래?”
절로 손이 허리춤에 가고 팔자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러나 속이 타들어가는 오귀스탱과 달리, 형인 막시밀리앙은 별 걱정도 안 되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오귀스탱, 기욤 재무총감이 날 보러 온 순간 여론은 이미 우리 편이 된 거나 마찬가지란다.”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형님.”
“대담한 용기, 예리한 통찰력, 사람들을 다스리는 웅변력까지.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여론이 그렇게 흘러가는 걸 가만 두고 보겠냐는 거야.”
모두가 숨죽여 분노할 때 총대를 메고 왕의 앞에서 삿대질을 날린 자.
고작 나이 열여섯에 파리 시민들이 먹는 점심의 반을 대는 전무후무한 사업을 성공시킨 자.
궁시렁대면서도 혁명 이후 거의 2년 간 매일 같이 시민들이 웃고 즐길 수 있게 광장의 연단에 오르던 자.
자신을 까는 세력과 신문이 있는데도, 탄압은커녕 언론의 자유를 줘야한다느니 말하던 자.
그런 기욤 드 툴롱이 이런 광기어린 여론을 그대로 두고 볼까?
절대 아니지. 아마 지금쯤이면 이삭의 민족 잡지사에서 작가들에게 당장 반박 기사를 쓰라고 들들 볶아댈 거다.
“그래도 세상일에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뭐, 오귀스탱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막시밀리앙은 마부석으로 연결된 창문을 두드려 마부를 불렀다.
“예, 당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자코뱅 수도원 대신 샹 드 마르스 광장으로 갑시다.”
“예, 당수님.”
갑자기 샹 드 마르스 광장은 왜? 오귀스탱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오귀스탱, 네가 이 세상에 100퍼센트는 없다고 했었지.”
“그렇죠.”
“가끔씩은 기정사실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
- 여러분. 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묻겠습니다. 우리가 3년 전 바스티유를 무너뜨린 그 날 결의했던, 모두가 목 놓아 외쳤던 그 날을 향해 묻겠습니다.
민중이 압박을 받고 있을 때, 민중에게 몸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을 때, 그들에게 봉기를 권하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비겁자들입니다.
노예라는 말을 염치없이 입에 담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자들은 혁명 전에 폭군과 전제정치에게 시민의 피를 빨게 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투생 브레다는 자신의 고향인 생도맹그에서 온갖 종류의 억압과 탄압, 그리고 살인이 총독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다시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민중이 봉기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일체의 법률이 파기되고 억압이 절정에 달하고 선의와 도덕이 유린된 때입니다.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면 봉기는 시민 전체에게도, 시민 각자에게도 그 의무 중 가장 신성하고 불가결한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투생의 증언이 맞다면, 투생은 봉기했어야만 했고, 투생은 봉기하여 의무를 다한 거나 다름없으며, 우리는 3년 전 바스티유 요새를 향하던 시민들에게 대포를 쏜 반혁명분자들과 똑같은 짓을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우리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행사한 권리와 의무를 무시하고, 변호사도 없이 졸속으로 재판을 받는 건 이치에 맞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손으로 일구어낸 혁명을 스스로 죽이는 일입니까?
우리가 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원칙이 통하고, 원칙이 존중받고, 누구나 원칙 아래 평등한 세상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민중이여! 내가 묻겠습니다! 혁명이 묻겠습니다! 투생의 재판이 유효합니까!?
“······.”
“후우.”
오늘 아침 나온 조간신문 1면을 모두 읽은 평원파의 당수, 시에예스는 신문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양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탁자 위에는 수북하게 쌓인, 오늘 아침 나온 잡지와 신문을 볼 때마다 관자놀이가 더 아파만 왔다.
[산악파 당수, 로베스피에르 의원 ‘학살자 투생 브레다’의 변호사가 되다!]
[투생 브레다는 무죄? 아니면 유죄?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뜻은 어디로 가는가.]
[포브스 선정,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졸속 재판 TOP 5.]
사실 로베스피에르 의원과 산악파가 북을 치며 노래를 불던 말던 상관없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건 평원파와 산악파 모두가 동의한 내용이니 말이다.
노예제는 쓰레기 같은 봉건잔재이고 그걸 모두 함께 쓰레기 통으로 처박자는 내용을 불과 1년 전에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않았나.
희대의 사법 스캔이 나도 입법부인 자신에게는 상관없다.
그런데.
“플라티에르 법무부 장관.”
“······듣고 있습니다, 시에예스 당수.”
법무부 장관이 평원파에서 임명한 자라면 얘기가 달라지고 만다.
“이러시면 제가 의회에서 로베스피에르 의원에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책임을 절절히 통감하는 바입니다.”
“법무부 장관직을 맡으신 지도 2년 째 아닙니까. 조금 더 신경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려.”
“······예, 당수.”
내무부 장관직을 산악파에게 주고 얻어온 법무부 장관직인데, 이렇게 일이 터지다니.
시에예스는 또다시 아파오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둥글게 둥글게 문질렀다.
“그래요. 우리 평원파에서 법무부 장관 자리를 가져왔는데 이런 꼴이 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옳으신 말입니다.”
“후우. 좋아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당수. 살펴 들어가십시오.”
시에예스 당수가 나간 자리, 홀로 남은 플라티에르 법무부 장관의 꼴은 볼만 했다.
당장에라도 이마 곳곳에서 푸슉-하면서 터져나갈 듯 한 핏줄들.
분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덜덜 떨리는 파이프를 든 손.
“이...이 개씨발 새끼들!! 니들이 법관이야!!”
법무부 장관 플라티에르는 30년의 법관생활 동안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느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