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5)
“후우, 하여간 다른 계절은 몰라도 여름에 입는 법복은 좀 가벼운 재질로 만들면 안 되나? 어디 덧나기라도 하는 건지 원.”
고등 판사는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땀에 흠뻑 젖어 무거워진 법복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흐흐, 그래도 이 날씨에 고생한 보람은 있어서 다행이야.”
비록 몸은 땀 때문에 찝찝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런 불쾌함을 감수한 만큼 생도맹그 산 금화로 두둑해진 주머니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조금 눈 감아 주면 어디가 덧나겠나. 고작 깜둥이 하나 죽는 건데 말이다.
‘선금 5만 리브르짜리 어음입니다, 나머지는 판결 이후 드리겠습니다. 판사님! 꼭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큼큼. 인세에 둘도 없을 죄인을 단죄하고자 하는 총독님의 마음 씀씀이가 이렇게 크시다니! 법관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좌시할 수가 없군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런 놈이 세상 빛을 쬐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천국에 있을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크흐흡, 죄송합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군요!’
역시 정의를 실현하는 순간은 언제나 짜릿한 법.
며칠 전에 있었던 감격스러운 만남을 곱씹던 판사의 얼굴은, 어느새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가 있었다.
똑똑
“음? 누구시오?”
“판사님, 블랑쉐랑드입니다.”
“아이고! 총독님이셨군요!”
역시 프랑스의 젖과 꿀이라는 생도맹그를 다스리는 총독답게 상도덕은 확실하구만!
판사는 헐레벌떡 문을 열고 값을 치르러 온 귀하디귀한 손님을 사무실 안으로 들였다.
“판사님, 정말 훌륭하신 판결이었습니다! 하하하!”
기품 있게 자리에 앉은 귀한 손님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사무실 책상 위에 슥-하고 올려놓았다.
숫자가... 아니! 이게, 이게 얼마짜리냐? 10...10만! 10만 리브르!
당장에라도 입꼬리가 너무 올라간 나머지 입이 찢어질 것만 같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의 입은 뇌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듣지 않으려했다..
“하하하! 별말씀을요, 소인은 미네르바 여신을 대변해 정의의 심판을 내린 것 뿐입니다.”
결국 판사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블랑쉐랑드 총독의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고말고요! 으하하!!”
-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 아니, 제가 딱 한마디만 하겠다니까요?
“허, 밖이 꽤나 소란스럽군요?”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분명히 총독님 외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누누이 얘기했건만! 쯧쯧...”
“괜찮습니다, 판사님. 하여간 아랫것들이란, 우리 같은 작자들이 내린 간단한 명 하나도 수행을 못하지 않습니까. 에헤잉 쯧.”
“참으로 옳으신 말입니다!”
“뭐, 어차피 조금 있으면 조용해질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렇지요!”
판사는 총독의 말에 손바닥을 비비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에도, 단순한 소란인 듯 싶던 목소리와 구두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판사의 사무실에 가까워져만 왔다.
내 그렇게 이 귀한 만남을 방해하지 말라고 어련히 얘기를 했건만 이놈들이!
판사는 속으로 꼭 오늘 당직자들을 일 좀 똑바로 하라고 두들겨 패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잠깐만, 그런데 말이다...
- 각, 각하! 이쪽은 법원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여긴 정말 안 됩니다!
- 그러니까 여기 아까 그 판사 나리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제대로 찾았네!
- 각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각하라니? 지금 법원에서 각하 소리 들을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 판사의 궁금증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젊은 청년을 보자, 해소되고 말았다.
쾅!
“이 씨발! 판사 나리! 잠깐 나 좀 봅시다!”
“총, 총감 각하...?”
“대체 이따위 판결을 내린 근거가 뭐······ 아니, 두 사람이 왜 같이 있습니까?”
한 명은 방금 판결내린 판사고, 저쪽은 생도맹그 총독인가 뭔가 하는 사람 아닌가?
원고와 판사가 나란히 담소를 나누시다니, 이거 더러운 냄새가 확 나는데.
“그, 그게 말입니다. 각하...”
“하하하, 그저 사교모임입니다. 각하.”
“······사교모임?”
아무리 봐도 뒤에서 담배 몰래 피다가 학생주임에게 들킨 불량학생들 얼굴인데.
“이렇게 재판이 끝나고 둘이 만나시고 그러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쪽으로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만.”
“아...하하... 앞으로는 자제하겠습니다, 각하!”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각하.”
두 사람은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내게 말했다.
“하아. 그래요. 사교모임이라고 치고, 판사 나리.”
“예? 아, 예!”
“판결이 왜 그따구로 나옵니까? 한 번 설명해보시지요.”
“일, 일단 확실한 증언도 있고, 증거도 있고...”
“증언? 증거? 원고의 증언도 증언으로 봅니까? 그리고 증거라면 그 재무보고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거 나 한 번 줘보세요. 재무부에서 그게 맞나 감식 한 번 해보게.”
“예, 예??”
“제대로 된 증거인지 확인해보겠다는 겁니다.”
법관이 왜 불안하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옆에 서계신 총독님을 바라본담?
“······판사님.”
“예. 각하.”
“잠시 블랑쉐랑드 총독과 얘기 좀 하게 나가주십시오.”
“예...?”
“나가주시겠습니까?”
“그... 각하, 여긴 제 사무실인데...”
“아, 답답하네. 나가라니까?”
“아! 예, 옙!”
씨발 왜 짜증나게 계속 궁시렁거려.
내 불호령에 법관은 꼬리를 말고 문 밖으로 헐레벌떡 나갔다.
나는 두 사람만 남은 사무실에서 천천히 총독의 앞을 향해 다가갔다.
“블랑쉐랑드 총독.”
“······예, 각하.”
“한 번 딱 까놓고 물어보겠습니다. 증거로 제출한 재무보고서,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까?”
“······없습니다. 각하.”
없어? 이 새끼가. 내가 어리다고 좆으로 보이나?
나는 짜증 때문에 얼굴에 팍 오르는 후끈한 열기를 참고 다시 한 번 블랑쉐랑드 총독에게 물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묻는 겁니다. 없습니까?”
“없습니다. 각하. 모든 보고서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아, 내가 군대에서 느끼던 그 좆같음을 또 느낄 줄은 몰랐는데.
그냥 잘못했으면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그러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세 마디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자꾸 긁어 부스럼을 억지로 만들어서 사람을 열 받게 하냐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보고서 제가 재무부로 가져가서 감식해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각하.”
“후우. 좋습니다. 나중에 뵙지요.”
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밖을 향해 나왔다.
“각, 각하...”
“판사, 아니. 당신, 내일까지 증거품 싹 다 재무부로 전달하십쇼. 아시겠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얼굴 붉힐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사무실 빌려줘서 고맙습니다.”
“······.”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판사를 두고 나는 품에서 궐련을 찾아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가, 차마 한 모금을 들이마시지 못한 채 도로 땅에 던져 발로 꺼트렸다.
구두 밑에서 불이 붙다만 담뱃재가 지지직하면서 쓸리는 소리가 났다.
좆같다. 그저 한 없이 좆같다. 이렇게 좆같음을 느낀 건 담배 피다 한강다리에서 떨어졌던 그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투생 브레다에게 그렇게 ‘정당한 재판’이니 뭐니 하면서 말했는데, 결과가 이따구라니. 마치 위선자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나는 그대로 법원을 나와 저 멀리 마차를 대기시켜놓고 있는 건장하고 험상궃은 사내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우디노 씨.”
“예, 사장님.”
“해군이나 무역업 쪽에 아는 사람 있습니까?”
“저는 없지만 우리 경호회사 사원 가족 중 배 타는 사람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라도 좋으니까 생도맹그 총독부에 관한 자료는 싹 다 재무부로 보내주십쇼.”
“예! 명 받잡겠습니다, 사장님.”
블랑쉐랑드 이 새끼야, 네가 얼마나 더러운 뒷구멍으로 쑤셔 박았는지는 모르겠는데. 21세기 판 회계감사에서 한 번 활활 태워주마.
그리고.
“우디노 씨, 자코뱅 수도원으로 갑시다.”
“예, 사장님.”
이건 덤이다 이 새끼야.
***
“그래서 저보고 그 사람의 변호를 맡아 달라 그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무슈 단두대, 산악파의 거두,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우유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재무총감께서는 투생 브레다라는 자가 정말 결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결백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음? 중요하지 않다라?”
로베스피에르 의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묻자, 나는 차분하게 로베스피에르 의원을 향해 답했다.
“중요한 건 그가 제대로 된 재판 과정도 없이 졸속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거지요.”
“흐음.”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올곧은 사람이다.
물론 그 올곧음이 너무나 선을 넘어 원래대로라면 혁명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냈지만... 뭐, 여기선 아니니까 생각하지말기로 하자.
아무튼 괜히 시민들이 로베스피에르 의원을 ‘타락하지 않는 자’, ‘고결한 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번 사건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바로 사법부가 올곧은 원칙을 어겼다는 것, 무죄추정의 원칙을 어겼다는 걸 어필하는 거다.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이번 일은 루소와 몽테스키외 선생의 법치주의가 위협받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법치주의의 위협이라.”
로베스피에르는 턱을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번 판례는 미래에 분명히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 무언가로 작동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대체 얼마나 졸속으로 진행되었길래 총감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지 심히 우려스럽군요.”
“변호사도 없고, 정황상 증거로 사람을 사형선고에 때리는 게 졸속 재판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정황상 증거로 선고를 한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확실히 변호사 없이 재판을 받았다는 건 심각한 상황이군요.”
음... 분명히 중간에 이상한 뭔가가 있었던 거 같지만 어차피 결과는 똑같으니 된 건가...?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맡아보도록 하지요. 기욤 재무총감님.”
“감사합니다,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후유. 이걸로 하나는 끝이구만.
“형님. 꼭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판결 하나만으로 국한시켜 본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오귀스탱.”
하지만 동생아, 달리 생각하면 말이다.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비서 겸 같은 산악파 의원인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법치주의의 모든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