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자유, 평등, 박애 (4) (140/341)

자유, 평등, 박애 (4)

내가 투생 브레다라는 흑인에 대해 느낀 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 이 사람 대단한 위인이구나.’

위인, 달리 말하면 영웅.

내가 나폴레옹, 라파예트, 시에예스, 로베스피에르, 이런 인간들이랑 비비다보니까 좀 알 것만 같은데. 확실히 난 사람들은 그 태가 딱 보인다.

범인(凡人)과의 어마어마한 능력의 차이를 보여준다던가.

타인과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앞에 나가 싸운다던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올곧은 신념을 꺾지 않는다던가.

아, 그루시는 어떠나고? 말해 뭐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겠다.

아무튼 투생 브레다는 그 위인, 영웅의 궤에 들어갈 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쇠사슬을 차고, 담담하게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걱정을 하는 게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선량한 민간인 4백 명을 죽였다면 보통 사이코패스가 아닐 텐데, 하는 말이나 생각으로 봐서는 거의 성자나 성인하고 다름이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흉악한 짓을 한 악한으로 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총독은 투생 브레다를 흉악범으로 몰았는데, 정작 흉악범이라는 사람을 만나보니 오히려 흉악범은 무슨, 이상을 좇는 혁명가 아닌가.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건가. 아니면 내 앞에서 정말 연기를 잘한 건가.”

그런 나를 향해 간수들이 손을 싹싹 비비며 다가왔다.

“각, 각하. 면회는 끝나셨습니까?”

마치 중령 진급을 코앞에 두고 사단장에게 부대 검열을 받는 소령처럼, 간수들은 당장에라도 위장이 꼬일 것만 같은 기분을 꾸욱 참으며 물었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고,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가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을지 몰라도, 시대에 상관없이 공무원들에게 가장 무서운 재앙은 역시 트집을 잡을 수도 안 잡을 수도 있는 슈뢰딩거의 높으신 분들인가 보다.

나는 ‘저는 여러분을 해치지 않아요.’라는 뜻을 가득 담은 서비스 접대용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하. 간수님들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휴우...”

으음... 급체한 게 쑥 내려가는 것 마냥 시원한 표정을 지어주시다니, 내 매력적인 미소가 통한 걸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슬퍼해야하나.

파릇파릇한 20대부터 상대하기 껄끄러운 부장님 대접을 받은 나는, 이 냉랭하고 수직적인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갑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간수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각, 각하 이건?”

“이삭의 민족 간편식사권입니다. 이제 곧 점심인데 다들 출출하시지 않습니까.”

“감, 감사합니다...”

“자, 옆에 분도 받으시고.”

“아, 예! 감사합니다, 각하.”

“이걸로 한 세트 시키면 빵 하나 더 주니까 많이들 시켜 드세요. 아시겠습니까?”

“““물, 물론이지요. 각하!”””

역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데 제일가는 건 먹을 게 분명해.

아, 이 훈훈하고 따스한 분위기. 다들 하하호호하면서 웃으니 얼마나 좋나.

모두에게 갓 구운 빵을 먹여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이런 거겠지.

기욤 드 툴롱의 내면에 있는 스티커 판에 착한 아이 스티커를 하나 더 붙여줘야겠어.

나는 간수들의 인도를 따라 칙칙한 면회실에서 다시 훈훈하다 못해 여름철 정오의 기운으로 불가마가 되어가는 법원 밖으로 나왔다.

음, 그래도 대한민국의 초열지옥보다는 버틸만하군.

나는 수첩을 꺼내서 할 일이 빼곡하게 적힌 달력에 투생 브레다의 재판을 써넣었다.

어디보자, 재판날이 일주일 뒤니 어떻게 시간을 내보면 참석할 수 있을지도...?

그 때, 법원 안쪽에서 벨벳으로 만든 법복을 입은 사람 두어 명이 뛰쳐나왔다. 법관인가?

“각하! 저희가 미리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그리 괘념치마세요. 저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분주히 준비하는 게 더 부담됩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저씨들이 이럴 때마다 제가 파릇파릇한 20대가 아니라 다들 껄끄러워하는 부장님이 된 것 같다구요.

“역시, 각하다우십니다! 아,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들과 같이 점심식사 하러 가지 않으시렵니까?!”

“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유, 일이라면 어쩔 수 없죠!! 저희도 공무원이라 그 마음 정말 잘 압니다!”

벨벳 판사복을 입은 중년의 법관은 손을 싹싹 비비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음에 혁명법원으로 올 때는 언질을 드리죠.”

“예! 각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디 가시는 길 살펴 가십시오!”

거... 되게 싹싹한 사람이네.

나는 법관들을 뒤에 두고 마차에 올랐다.

“쩝. 아쉽구만. 이번에 재무총감과 연 한 번 만들어볼 수 있을까 했었는데.”

판사복을 입은 남자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발에 체이는 조그마한 돌멩이를 저 멀리 차며 말했다.

“고, 고등판사님.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런 중년의 판사에게, 이제 갓 임명된 초임판사처럼 보이는 젊은 법관이 말했다.

“긁어 부스럼이라니? 하하, 자네가 잘 모르고 있는 거야. 이보게, 우리 법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

“······공정성?”

중년의 판사는 그렇게 답한 젊은 법관을 마치 떼쓰는 다섯 살 아이를 보는 것 마냥 짜증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쯧. 자네 파리 소르본 출신인가?”

“······예. 그렇습니다만.”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끄덕거리는 초임 판사를 향해, 중년 판사는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어화둥둥 파리 출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세상이 아주 도덕적으로 잘만 돌아가는 줄 알아요.”

“······.”

“에휴. 이 딱하디 딱한 자야, 내 조언 하나 해주지. 지금 우리 법관들에게 중요한 건 줄일세, 줄.”

“줄... 말이십니까?”

분명 자기를 가르쳐주신 법학과 교수님은 공정과 도덕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초임 판사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은사의 얼굴과 눈앞에 보이는 선배 판사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래! 줄! 인맥! 예전 고등법원시절 윗대가리가 다 날아가고 윗자리가 텅텅 빈 지금이 바로 세상에 둘도 없는 기회 아니겠나? 판사나 검사로 임명된 우리가 인맥 하나 잘 잡으면 그대로 대법관 자리에 앉는 거라고!”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이 친구야! 미라보, 시에예스, 로베스피에르, 기욤, 이 넷 중 하나만 골라잡아도 바로 대법관 행이라니까?”

“예에...”

“어으... 아쉬워라! 이참에 말이나 한 번 터보는 거였는데.”

중년 판사는 다시 한 번 발에 체이는 돌멩이를 저 멀리 차며 읊조렸다.

혁명정부의 네 거두 중 한 명에게만 어떻게 잘 보여도 고등판사가 아니라 법원장까지 달아볼 수 있는 일 아닌가.

“참.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아, 예. 아마... 정오 조금 넘었을 겁니다.”

“좋아, 아직 늦지는 않았구만. 따라오게. 내 자네에게 좋은 인연을 알려줌세.”

“예에...”

중년 판사는 초임 판사를 데리고 법원 근처에 자리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자네 내가 오늘 귀한 연줄을 소개시켜주는 거야. 알았나?”

“이번엔 또 누구인데 그러십니까?”

“하하, 가서 보면 알걸세. 기욤 총감이 우리의 승진줄이라면 이쪽은 돈줄이야, 돈줄.”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님 말씀하고 상충되는 이 선배 판사의 말에, 초임 판사는 눈을 흘겨 뜨고 레스토랑의 한 자리에 앉았다.

곧, 번쩍번쩍 빛나는 견장을 찬 군복을 입은 누군가가 두 법관이 있는 자리에 찾아와 군모를 벗으며 얘기했다.

“안녕하십니까, 판사님! 생도맹그 총독 블랑쉐랑드라고 합니다.”

“아이고, 총독님!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를 생포한 영웅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하하하!”

“으하하!”

초임 판사는 블랑쉐랑드 총독이 선배에게 건네는 자그마한 상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피고, 투생 브레다는 선량한 시민 4백 명을 학살했다는 혐의를 인정하는가?”

“재판장, 난 하느님께 맹세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소이다.”

“피고는 지금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소이다.”

“뭐, 알겠소. 자, 검사 측 말해보시오.”

벨벳 법복을 입은 중년의 판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검사 쪽을 보고 말했다.

“예, 재판장님. 우리 검사 측은 현 생도맹그 총독 블랑쉐랑드와 그의 비서관을 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좋소.”

재판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원고가 블랑쉐랑드 아니었나? 원고가 증인이 되도 되는 건가? 음... 법의 세계란...

번쩍거리는 훈장과 견장이 달린 군복을 휘날리며 일어난 총독은 입을 열고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생도맹그 총독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투생 브레다는 4백여 명에 달하는 선량한 백인을 학살했으며, 정당한 프랑스의 강토에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 뒤로 총독의 비서관인 듯 싶은 사람이 일어나 두둑한 서류를 펄럭거리며 사람들을 향해 얘기했다.

“재판장님, 검사님, 그리고 청중 여러분.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생도맹그가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는지 증명하는 자료입니다!”

투생 브레다는 굳은 눈빛으로 청중과 재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판장, 난 혁명의 정신인 저항의 권리에 입각하여 압제에 저항했을 뿐,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도리를 어긴 적은 없소이다! 모두 블랑쉐랑드 총독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이오! 오히려 학살을 당한 건 우리 흑인들이였단 말이오!”

재판장에 있는 모두가 야유를 쏟아 부어도 투생은 꿋꿋하게 계속 말했다.

“아니, 변호사는 없답니까?”

“확증만 없다지, 이미 범죄자 낙인이 찍혔는데 그 누가 변호를 하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시민들에게 맞아죽을 걸요.”

“······.”

재판이라니, 그것 참 재미있는 땡땡이, 아니 구경 아닙니까-라며 따라온 플로리앙 씨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판결을 내리겠소. 증거들과 증언을 종합한 결과, 피고 투생 브레다에게 혐의가 있음을 본 재판부는 인정하는 바이며, 결과적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바이오.”

“나는 결백하오!”

“피고! 재판부를 모독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날 여기서 죽이더라도 자유의 나무는 생도맹그에서 끊임없이 뿌리를 펼칠 것이오!”

“더 할 말 있으면 상고하시오!”

투생 브레다의 격노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판사봉으로 나무판을 세 번 두드리고 폐회를 선언했다.

이게... 맞냐?

“변호사 없이 재판에, 확정적인 증거도 없이 증언만으로 구형이라. 다들 미친 겁니까?”

“사, 사장님 왜 그러세요?”

“아니, 재판이 좆같잖아요!”

이게 무슨 재판이야? 마녀사냥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