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2)
“각, 각하. 그것이 아니옵고...”
“그게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생도맹그 총독이나 되는 분이 범죄자 하나 잡아넣겠다고 파리까지 오시다니, 할 일이 없으신가봅니다?”
“예, 예?”
총독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버벅거렸다.
누구는 파리와 베르사유를 오가며 쌔빠지게 구르는데, 누구는 따뜻한 대서양 휴양지에서 알차게 꿀을 빠시면 나로서는 이거 좀 억울하지 않겠나.
“하, 하하! 무우울론 총독이란 직책이 참으로 바쁜 일이지만, 국가의 녹을 받아먹는 행정관으로서 국민을 위협하는 범죄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기에...!”
“아, 정의관이 아주 투철하신 분이었군요. 걱정하지마세요. 총독. 전 우리 사법부가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려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야 아주 투철한 직업정신이셔.
나는 손을 올려 바짝 얼어있는 총독의 어깨를 몇 번 토닥여주었다.
범죄자를 무슨 형에 처하고 진실을 밝히는 건 법관들이 할 일이지.
나나 당신 같은 관료들은 판결을 기다렸다가 그에 따르면 될 뿐.
나는 고개를 돌려 날 이곳으로 데려온 한 의원을 보고 입을 열었다.
“시에예스 당수님과 로베스피에르 당수께 전해주십시오. 우리 행정부는 입법부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할 거라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총감 각하. 의회를 대표해 삼권분립을 지켜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입니다.”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자, 총독도 이제 파리로 가서 재판 날짜를 기다리시죠. 어차피 베르사유에 있어봤자 불편할 겁니다.”
“왜, 왜입니까 각하?”
“여긴 화장실을 여유롭게 쓸 수가 없거든요. 제 경험담입니다.”
기욤 드 툴롱의 꿀팁이라구.
이 넓은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딱 두 개라니, 말이 되냐?
“고작 깜둥이 하나 잡겠다고 정식재판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나? 이러다간 벼룩 하나 때문에 창고를 홀랑 태우겠어!”
총독은 피가 말라 싸늘해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설사 그 깜둥이 놈이 입을 잘못 놀리거나 생도맹그에 대해 감사가 들어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독님. 여론은 우리 편이니.”
비서관은 불안감 때문인지 계속해서 방 안을 서성이는 총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혹시 몰라서 파리 신문사들에게 쫙 뿌려놨습니다. 아마 내일이면 파리 시민들이 극악무도한 깜둥이 악당을 처단하겠답시고 몰려들 테지요.”
“호오?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총독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삼권분립이니 뭐니 해도 결국에는 법관들도 사람 아닙니까. 그 여론의 몰매를 맞고도 영향을 안 받을 순 없을 겁니다.”
이 자식은... 천재인가?
“하하하! 정말 신묘한 계책이구만! 자네는 나의 리슐리외이자 마자랭이야!”
“하하하! 총독님이야말로 제게 샤를마뉴 대왕 같으신 분입니다!”
“아이, 이 사람도 참!”
저 멀리 대서양 생도맹그에서 온 두 부패관료는 한참동안 그렇게 서로의 엉덩이가 헐 정도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
[300명의 선량한 백인을 죽인 흑인 마적 대장! 생도맹그 총독부의 활약으로 붙잡히다!]
[깜둥이 노예에게 정식재판? 과연 옳은가?]
[희대의 학살자 투생 브레다, 그는 누구인가.]
[흑인에게 자유를 준 백인의 말로! 백인이여, 채찍을 들어라!]
신문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정수리에 흘러내린 식은땀이 콧잔등의 끝을 스치고 나무 바닥에 떨어져 짙은 무늬를 남겼다.
“···시옹? 페시옹 씨? 알렉상드르 페시옹 씨!”
“아, 예! 플로리앙 부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페시옹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아까부터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여서 말입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하하...!”
페시옹은 어느 때나 그랬듯, 뒤통수를 멋쩍게 쓰다듬으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플로리앙 부사장은 그런 페시옹을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우리가 만나고 같이 일한 게 몇 년 째인데 아직도 대강 속여 넘길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지 말고 얘기해 보세요. 당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안색이 안 좋은 겁니까.”
“······사실은 오늘 자 신문들 때문에 말입니다.”
“어떤... 아.”
흑인인 페시옹의 말에, 플로리앙 부사장은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다시 열었다.
“그...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페시옹 씨. 그런 엿 같은 기사 따위 계속 생각해봤자,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런가요?”
“아무렴요, 세상에 페시옹 씨만큼 착한 사람이 어디 있는데 우리 중 누가 그런 헛소리에 놀아난단 말입니까.”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는 페시옹에게, 플로리앙은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던 서류를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놓고서 입을 열었다.
“페시옹 씨, 제가 어떻게 보면 파리의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 봤을 때, 피부색으로 사람이 선하다 안선하다 그 따위 급 헛소리도 없을 겁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노동자일 때, 자기를 괄시하던 사람 중에 흑인이 있었나? 죄 백인이었지.
“당장 오를레앙 그 자도, 에베르 그 자도 백인 아닙니까?”
“······.”
“피부색은 그냥 포장지일 뿐이죠.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사장님도 수시로 그러시지 않습니까?”
“일만 잘하면 장땡이라고요?”
“바로 그겁니다.”
“······.”
“뭐, 그래도 페시옹 씨가 정 마음이 쓰인다면 하루 푹 쉬고 머릿속 정리 좀 하고 다시 출근하셔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부사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대신 쉬고 오셔서 다시 열심히 하셔야합니다?”
플로리앙 부사장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
여럿이서 살기에는 비좁지만 홀몸으로 지내기에는 충분한 단칸방, 그 안의 침대 위에 누운 한 청년은 말없이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 들리는 거라곤 이따금씩 저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뿐. 그것 외에는 고요함만이 청년이 누운 침대 근처를 배회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자신이 태어난 생도맹그에서도, 파리의 사관학교에서도 느껴보지 못 한 불쾌한 고요함이었다.
마치 무형의 벌레가 자신의 영혼을 긁어먹는 듯 한 불쾌감.
알렉상드르 페시옹은 결국 그 기분 나쁜 느낌을 떨쳐내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오늘 아침 발간된 신문들을 차례차례 다시 읽어보았다.
온통 투생 브레다라는 얼굴 모를 흑인을 당장 죽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 찬 기사들.
그 자에게 죽은 백인이 삼백 명이니 사백 명이니 오백 명이니 운운하는 기사들.
지금이라도 자유민 흑인들을 모두 때려잡아야한다는 기사들까지.
페시옹은 그 불쾌감의 정체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그래서 페시옹은 읽고 또 읽었다.
수십 부의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또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수 시간을 멍하니 신문을 읽고, 또 읽던 페시옹은 마침내 그 불쾌감이 뭔지 문뜩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어디에도 투생 브레다라는 사람의 말은 실려 있지 않구나.”
오를레앙과 에베르라는 두 중범죄자의 말도 간단하게 요약할지언정 올려는 주던 신문들 어디에서도, 흑인 투생 브레다의 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페시옹은 혀가 다치지 않게 이를 악물고 흐느꼈다.
우리 흑인들은 이 세상에 결코 속할 수 없는 건가.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존재하는 건가.
서러웠다.
그 잘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있는 무죄추정의 법칙은 왜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 건가.
목이 멨다.
너무나 굳게 주먹을 쥔 탓인지 손바닥이 손톱 때문에 아파왔다.
당장이라도 길거리에 나가 누구든지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의 말 한마디 신문에 실어주지 않는 건가. 왜 우리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가.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있는 새로운 프랑스라면서.
결국엔 백인들만의 자유와 평등과 박애였던 건가? 자신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건가?
페시옹의 눈에는 벽에 걸린, 사관학교를 졸업하며 받은 군복이 들어왔다.
페시옹은 가만히 그 옷을 들여다보다가, 옷을 내려 군복으로 천천히 갈아입기 시작했다.
다른 백인들과 나란히 섰던 사관생도 때의 페시옹처럼, 그 새하얀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
자... 이걸로 끝! 어우 오늘은 진짜로 죽을 뻔했네.
베르사유까지 갔다 오는 바람에 시간이 촉박해서 하마터면 이틀 밤을 샐 뻔 했어.
나는 재무부에서 올린 마지막 보고서에 확인 도장을 찍고 쭉-기지개를 폈다.
진짜로 이 정도면 야근 수당 세 배는 줘야 된다. 제 노고를 부디 알아주십시오, 미라보 의장님. 흑흑.
“히히! 퇴근이다!”
나는 외투를 입고 서둘러 이 저주받은 사무실 문을 열고 기분 좋은 밤공기를 맡으려고 걸음을 옮겼다.
하... 밤공기를 맡으며 퇴근하는 이 느낌, 마약이나 다름없어.
그러나 사무실을 나가는 내 발걸음은, 문 앞에 서있는 누구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사장님, 아니. 선배님.”
“뭐야, 페시옹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사관생도복은 또 왜 입고 있으시지. 혹시 내가 주는 월급이 부족해서 생도복을 입어야 한다던가 그런...?
그러나 페시옹 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월급을 인상해달라는 말과는 궤가 달랐다.
“이 후배가 선배님께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죠?”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페시옹 씨에게 되물었다.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누구에게까지 적용되는 겁니까?”
페시옹 씨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계속 이어 말했다.
“우리... 우리 흑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인 겁니까?”
아. 그거 때문이구나.
“······제가 비록 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전문을 쓴 당사자는 아니라서 딱 잘라 말해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나는 잠시 생각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고 프랑스인처럼 행동하고, 프랑스인처럼 말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님.”
“······사람이라... 그렇다면 선배님. 선배님께서는 우리 흑인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후배님.”
“아, 아...! 아!”
단단했던 페시옹 씨의 다리가 허물어졌다.
“사장님! 제발, 제발 투생 브레다 그 자의 목소리를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바닥이 차갑습니다. 어서 일어서세요. 페시옹 씨.”
“제발 우리의 목소리를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선배님...!”
나는 페시옹 씨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요. 알렉상드르 페시옹 후배님, 내가 이렇게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보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 일 아닙니까, 일어서세요. 자, 제 어깨 잡으시고.”
“감사...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