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1)
구구절절한 흑인의 목소리를 들은 생도맹그 총독의 답은 간단했다.
‘이 깜둥이새끼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이역만리 서인도제도에 유배된 자신이 곁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파리에 있는 사람 속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더욱이, 설사 안다 해도 이 노예출신 깜둥이 반군대장에게 자신이 굳이 피곤하게 입을 놀리면서 알려줄 이유 또한 하등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티냈다가는 총독 관저를 향해서 당장 반란군이 물 밀 듯 밀려올 터.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안 된다.’
반군들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제깟 흑인 놈들이 잠시 점거해봤자, 본국에서 증원군과 함대가 오면 밀어버리면 된다.
그 뒤가 무서운 거지.
자신이 맡은 생도맹그가 어디인가, 프랑스를 먹여 살리는 효자 상품인 커피와 상품작물의 보고(寶庫)아닌가.
흑인 놈들이 생도맹그를 함락시키는 순간, 프랑스의 수입이 토막 나는 거나 다름없으니 파리에 있는 높으신 분들은 화들짝 놀라 바로 진압군을 보낼 터.
파리에서 온 진압군은 이 반란군을 쉽사리 진압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이 뭔지 낱낱이 찾아 캐려들 테다.
그 말은 막대한 금화와 뇌물에 묻혀 살던 자신의 행복한 생도맹그 생활이 끝나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총독은 슬그머니 제 소중한 금고 열쇠가 고이 잠들어 있는 서랍을 눈으로 흘겨보았다.
아, 안 되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감사원에게 뇌물 좀 먹이면 ‘큼큼.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요. 허허.’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인간미 있는 시대는 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이미 옛말이 되지 않았나.
파리에서 보낸 진압군이 총독의 비밀 장부를 보는 순간, 총독은 파리로 압송돼 단두대 밑으로 보내지고 말거다.
결국 총독은 대마초라도 태웠는지 뜬 구름 잡는 소리를 지껄이는 흑인을 향해 억지로 사람 좋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나도 장군의 물음에 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이 사람 마음이라는 게 타인으로서는 잘 알 수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서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뭐, 뭐??”
“못 들었소? 이 투생 브레다가 직접 파리로 가서, 기욤 총감에게 물어보겠소. 또한 내가 파리에 갔다 오는 동안 우리 저항군도 일체의 적대적 군사행위를 멈추고 휴전 상태에 들어가겠소. 내 약속하리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이 새끼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아니다, 자신의 옆에 붙은 심복들도 총독인 자신이 얼마나 해쳐먹었는지 제대로는 모른다. 일개 반군지도자가 그걸 알고 찔러볼 건덕지는 없었다.
“왜 그러시오? 총독은 휴전을 원하던 것 아니었소?”
“······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장군.”
“설마 내가 직접 파리로 가는 것까지 중앙에 물어봐야한다는 소리는 아니길 비오.”
“알, 알겠소. 내 며칠 내로 파리로 가는 배에 탑승시켜드리리다! 내 약조하겠소!”
“좋소. 문명인이라면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을 거라 믿소.”
흑인은 어디서 배웠는지, 머리에 쓴 모자를 들고 격식 있는 인사를 한 뒤 유유히 총독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저 주제넘은 깜둥이 새끼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총독님.”
“비서관, 나도 생각 중이니 잠시 있어보게.”
“차라리 선원들을 동원해 배 안에서 암살하고 대서양에 시신은 버릴까요? 태풍에 휩쓸러 배가 침몰했다고 하면...”
“그러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리고 애초에 그걸 다른 깜둥이들이 믿겠나? 다른 수는 없을까?”
총독이 십 분지 일을 해쳐먹었다면, 그 반 정도 해쳐먹은 비서관은 턱을 쓸어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저번에 깜둥이 저항군이 우리 백인 몇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그 놈들 죽을 만 한 놈들 아니었나?”
총독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물론입니다. 수확량이 조금 떨어진다고 노예를 채찍으로 쳐 죽이다니요. 선 넘은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백인이 아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걸 조금 포장해서 흑인들이 백인을 학살했다고 파리에 보고서를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우리가 향신료를 좀 쳐서 파리에 ‘백인을 학살한 깜둥이’라고 소문을 팍! 하고 퍼트리면, 사람들이 백인인 우리 말을 믿지 깜둥이 반군대장 따위의 말을 믿겠습니까?”
“자네는 천재인가?”
총독은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이틀 후, 프랑스 본토 칼레 항을 향해 한 척의 배가 생도맹그에서 출발했다.
***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이삭의 민족 사장,
기욤 드 툴롱.
혁명의 얼굴,
기욤 드 툴롱.
이야 칭호도 정말 많다. 나 언제 업적 작이라도 했냐?
그 때문인지 빌어먹을 떡잎마을, 아니. 프랑스마을 유치원 원장 기욤 드 툴롱의 하루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기 그지없었다.
일단은 서로 ‘선생님! 쟤가 더 나쁜 놈이에요!’하고 징징거리는 평원파와 산악파 사이를 조율해줘야 한 게 첫 번째.
“기욤 총감! 공안위원회라니! 이건 사법 살인이나 다름없소! 제발 저 미친 산악파 놈들 좀 어떻게 해보시오!”
“기욤 총감! 12인 고등평의회라니! 이건 민간 사찰이나 다름없소! 제발 저 미친 평원파 놈들 좀 어떻게 해보시오!”
“하아... 저보다 나이도 두 배나 드신 분들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대체!? 자. 두 분 다 그러지 마시고, 저한테 한 잔씩 받고서 훌훌 터시죠. 다들 관점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관점의 차이. 예?”
다들 내가 포도주 한 잔 말면서 뭐라고 하면 진정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생에 높으신 대기업 분들 접대한다고 소주랑 맥주 기똥차게 마는 법 배운 덕이 있다.
어으... 담배 마려워. 내가 나중에 폐병으로 죽으면 다 당신들 때문이야.
아니, 이럴게 아니라 미리 유서를 써놓을까?
[나, 기욤 드 툴롱이 만약 폐병으로 죽으면... 내 무덤에 국민의회 의원들을 같이 순장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문신한 대머리로 환생해서 거대한 도끼와 함께 이 프랑스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야아아]
그렇게 정치인들한테 시달린 다음은 재무부 일.
“다들 가족 분들과 시간은 잘 보내셨죠?”
“““예에...”””
“다행이군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집에 못 들어갈 텐데. 하하하!”
“““······.”””
이런, 너무 그렇게 숨죽이고 계시면 제가 무슨 가정의 불화를 가져오는 악당인 것 마냥 느껴지지 않습니까.
“1팀은 파리 내 4인 이상 작업장을 모두 조사하시고, 2팀은 해당되는 작업장이 어떤 물품을 생산하는지, 3팀은 재무제표를 분석해서 당기 손익이 얼마나 되는 지 싸그리 다 긁어서 분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게 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생각하시죠. 명예! 팡테온!
재무부 일을 끝냈으면 이제 이삭의 민족.
“사장님, 저 그만두렵니다. 농한기도 끝났고, 이제 고향 방데에 돌아가 봐야죠.”
“아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건 퇴직금이에요. 챙겨 가십시오.”
“퇴, 퇴직금이요?”
“그 돈으로 농기구라도 좋은 걸로 하나 마련하세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갈 사람은 보내고, 올 사람은 들여보내고. 바쁘다 바빠.
“신입사원이신가보군요. 이름이?”
“예! 개발팀 신입 르봉입니다.”
“아! 그 난방기구?”
“기, 기억하십니까?”
머독 씨 얘기를 들어보니까 석탄을 때서 나온 따듯한 수증기로 집 안을 덥힐 수 있는 발명품이라던데.
이거 때는 것만 다르지 완전 온돌 아니냐?
“기억하다마다요. 온돌이잖아요 그거.”
“온...돌이요?”
아, 모르는구나.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르봉 씨에게 거는 기대가 커요. 계속 수고해주셨으면 합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사장님!”
어우 열심히 하는 게 아주 보기가 좋아용.
“그런데 머독 씨는 어디 있습니까?”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야 달리는 거 봐, 신입인데 아주 파이팅이 넘치셔.
“아, 사장님! 오셨군요! 그러면 이쪽으로.”
“머독 씨, 한참 찾았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마지막 점검 때문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뭘요. 괜찮습니다.”
“가스등의 효율 문제는 어느 정도 개선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원료가 문제인데...”
“원료라?”
“아무래도 요 근처 제철소에서 뽑아내는 철의 품질이 좋지 않다보니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씁... 알겠습니다. 나중에 방법을 한 번 강구해보죠.”
제철소라... 생각해보니까 그런 제련시설 같은 건 미리 마련해 놔야 나중에 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삭의 민족이 끝났으니 이제 군에게 시달릴 차례.
“총감 각하, 이대로라면 우리 해군은 박살입니다. 박살!!”
“그... 꼭 돈을 투자해야하나요? 대서양 함대와 아시아 함대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미 돈 나갈 곳도 많은데...”
“아이고!! 나 죽어!!”
“이런 젠장. 전 이미 죽겠습니다.”
졸지에 별 한 개짜리 해군 준장에서 별 다섯 개짜리 장관이 된, 루이 라투슈 트레빌 제독의 떼부터.
“총감. 러시아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형을 보내놨잖아요.”
“보나파르트 준장이 유능한 건 사실이지만 폴란드 저항군을 전멸시킨 수보로프를 막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은?”
“소집령을 다시 한 번 내릴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말대로 하세요!”
“정말입니까, 총감??”
“대신 내년에는 머스킷 대신 대나무를 깎아서 무장할 생각 하십쇼.”
“······.”
러시아, 러시아 말만 많지 이 자식들 쳐들어오긴 하는 거야? 선전포고 때려놓고 2년 간 폴란드만 때렸지 우리 앞에 코 한 번 비친 적이 없는데.
그리고 정 걔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우리 나폴레옹 몬이 다 무찌르지 않을까? 조금 군축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총감 각하?”
“예, 왜 그러세요.”
“베르사유로 직접 와 보셔야겠습니다.”
룰루랄라 신나는 군축계획을 짜는데 방해라니. 얼마나 큰 일 이길래.
만약 별 일 아니면 분노한 기욤이 용서치 않아요?
“나는 프랑스 국민을 학살한 투생 브레다를 당장 효수할 것을 요청하는 바요!”
“옳소! 옳소! 옳소!”
“······당신들이 날 죽여도 상관없소. 다만 죽기 전에 기욤 총감을 뵙게 해주시오.”
“이런 시발 별일이 맞았네.”
나는 날 데려온 의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원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생도맹그에서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저 자가 그 반란군의 수괴랍니다. 듣기로는 백인 수백을 학살했다는군요.”
“그랬으면 사법부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지, 왜 절 필요로 하십니까?”
“사형에는 행정부 수반의 동의가 있어야 하잖습니까.”
“그래요? 재판은 언제 하는데요?”
“재판이 아니라, 즉결처분입니다, 각하!”
“뭐야, 댁은 누구쇼?”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처음 뵙겠습니다! 생도맹그 총독, 블랑쉐랑드입니다!”
“아, 예에...”
“저 놈은 백인 수백을 죽인 아주 악독한 놈입니다! 재판이라니! 분에 넘치는 처우 아니겠습니까! 저런 놈에게는 즉결처분이 어울립니다, 각하!”
“블랑쉐랑드 총독.”
“예, 각하.”
“총독이라면 행정부 소속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왜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단에 간섭하지요? 난 그런 걸 허가한 적이 없는데.”
“하, 하지만 놈은 깜둥이입니다!”
“깜둥이고 나발이고 삼권분립 제대로 지키십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쓴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을 텐데, 즉결처분은 뭔 즉결처분이야.
벌써부터 헌법이 흔들리면 여태까지의 내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는 거나 다름없다.
“사법부가 판단할 수 있게 정식 재판으로 넘기겠습니다.”
“각, 각하!”
“당신, 판사요? 중범죄자의 체포는 칭찬해주겠지만 선 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