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빛의 도시, 파리 (6) (136/341)

빛의 도시, 파리 (6)

당을 창당해? 정치? 내가? 참나, 내가 뭘 안다고.

내가 아는 건 사람 말 경청해주고 원하는 걸 주는 능력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무슨 정치를 하겠나?

보나마나 딱 1년이면 저 베르사유 의회의 괴물들에게 내가 가진 걸 죄다 털릴 걸.

“거, 별 탈 없이 먹고살기 더럽게 힘드네.”

나는 파리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1등 공신 분들을 저 멀리 쫓아낸 후, 담배 갑에서 기다란 궐련을 빼 입에 물며 말했다.

내가 화장실에 볼 일 보러 갈 때 노트북과 핸드폰으로 자리를 찜하고, 자전거만 제외하면 절대로 남의 거에 손 안대는 대한민국 급 치안을 이 인외마경 18세기에 기대한 게 아니지 않나.

길가다가 총이나 폭탄 안 맞을 자유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세상 정도를 원하는 거지.

이 얼마나 소박한 꿈이냐? 내가 봤을 땐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하셨던 최영 장군님도 나만큼 소박하지는 않을 거다.

자, 그런데 이 소박한 꿈을 현실로 실현하고 싶으면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나도 몰루?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미래에 어딘가 있을 회사의 회계재무팀에서 갈려나갈 경영학과 학생이었지 어딘가 있을 시청이나 도청에서 갈려나갈 행정학과 학생은 아니었단 말이야.

가련한 기욤은 기업의 장단점 분석과 재무제표 분석은 할 줄 알지만, 법 같은 걸 이렇게 저렇게 조물딱 거릴 능력은 없답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대강 21세기 대한민국 같은 사회상을 만들면 최소한 마약카르텔들이 대낮에 총격전과 테러를 벌이는 멕시코나 브라질 같은 혼돈과 파괴, 망각이 지배하는 국가처럼 되지는 않을 테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높으신 분들이 상대 당을 물리력으로 제압하려 들 지는 않아야 할 거 아닌가.

현대에 가면 모두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세상이 도래하지만, 아직까지는 띄엄띄엄 글만 읽을 줄 알면 식자 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변호사, 검사 출신 의원들이 사러 의견 안 맞는다고 대낮에 총을 쏴대?

윗물이 맑아도 아랫물이 안 맑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데, 윗물까지 안 맑으면 이 프랑스 꼬라지가 어캐 될꼬 이잉... 이 기욤 드 툴롱은 매우 매우 걱정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에예스, 로베스피에르, 당통 세 사람에게 협박 좀 해봤다.

‘여러분, 혀 말고 주먹 드는 순간 의회 의석 반씩은 제게 떼 줄 생각하세요?’

난 별로 한 거 없다고 생각하는데, 파리 시민들은 날 꽤나 좋아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당 하나 창당하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의회의 삼분지 일은 내가 먹을 수 있을걸.

내가 21세기 현대문명에서도 살아보고, 요 18세기 유사 인외마경 문명에서도 살아봤지만 사람 사는 꼴은 정말 똑같기 그지없다.

지금이던 미래던, 기업과 장사치는 물건을 높게 쳐서 팔려고 하고, 택시기사와 마부는 조금이라도 요금을 많이 받고 싶어 하고.

뭐, 내가 비록 TV와 신문으로 만나 본 정치인들은 죄 자유민주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때에 나온 정치인들이라 조금은 차이가 있겠지만, 근본은 똑같다.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자리를 원한다는 거.

물론 왕 한 명의 신임만 받으며 되는 왕정제 아래에서는 정치인들의 태도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일단 프랑스는 지금 민주주의이지 않나.

안 그래도 좁아터진 의회에 새 당에게 의석을 뺏길 바에야, 서로 마주 손을 마주잡고 하하호호하면서 우리 잘 지내봅시다 하지 않겠어?

뭐... 마주 쥔 손에 힘이 꽤 들어가긴 하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성냥갑에서 성냥을 빼 궐련에 불을 붙이고,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궐련 끝에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때문에 창문 너머가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흐릿한 창문 밖 풍경이 마치 내 모습 같아 피식 웃고 말았다.

쩝. 이럴 줄 알았으면 수능 끝나고 연표 한 번 더 외울걸 그랬어.

1792년 지금, 18세기 말은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시대다. 그래, 도대체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가 너무도 흐릿한 나머지 보이질 않는단 말이지.

원래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대국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 러시아는 이미 폴란드를 세 갈래로 쪼개 접시 위에 올려놓고 만찬을 즐기고 있으며,

폴란드 인들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진압군을 자칭하는 러시아군의 잔인한 총칼 아래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폴란드만 그러면 좀 다행이지, 러시아의 차르인지 뭔지 하는 여제는 자국민들의 농노반란까지 군대로 싸그리 싹 밀어버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프게 죽게 하지 않는 자비랍시고 잡힌 반란군 머리를 총으로 날려버린다는데. 세상에 그게 무슨 자비람?

혹시 이름이 예카테리나가 아니라 이오시프 스탈린이신가...?

문명인이라면 대화와 타협이 원칙이잖아.

도대체 사람을 총칼로 밀어버린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는 건지.

러시아의 전통은 개판 난 경제만인 줄 알았는데, 인명경시사상도 전통이었나 보다.

그러니 이런 피와 살육이 난무하는 18세기에 우리 프랑스를 지키려면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최소한 서로 배때지에 칼은 안 꼽아야지.

세느 강을 제 2의 바르샤바마냥 사람의 선혈로 가득 차게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야.

“후우...”

나는 다 피운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꺼뜨렸다.

세상일도 이렇게 담배를 꺼트리는 것처럼 쉬우면 좋을 것을, 참으로 힘든 시대였다.

***

1792년 6월 1일.

카리브 해 서인도 제도, 생도맹그.

총독 관저.

“그래서, 총독. 우리 흑인들의 권리를 인정해 주겠소? 아니면 계속 우리와 싸우겠소?”

방 안의 사람들과 달리 검은 손을 가진 남자는, 자신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한참 동안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투생. 잠시 말미를 주시게.”

“말미? 그대들이 수확량을 못 맞췄다며 우리를 총으로 쏘아죽일 때도 말미를 주지 그랬소? 그리고 난 총독 당신과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닌 듯 싶소만, 이름만 부르지 말고 호칭까지 붙이시오.”

“······알겠소, 투생 브레다 장군.”

‘내가 살다살다 깜둥이에게 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일 줄이야.’

그러나 생도맹그의 총독인 블랑쉐랑드(François Rouxel, de Blanchelande)는 눈앞에 있는 흑인의 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 있는 본국에서 서인도 제도인 생도맹그까지 얼마나 긴 거리가 떨어져있나.

이미 일부 섬을 점거한 흑인 저항군이 총독 관저가 있는 본섬까지 도달하는 속도가 프랑스에서 오는 증원군보다 수십 배는 빠를 테니 죽기 싫으면 비위를 맞춰줘야만 했다.

“투생 브레다 장군, 그래도 시간이 필요한 건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소. 일자무식도 아니고 식자인 당... 아니, 장군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리라 생각하오만.”

“또 그놈의 본국 타령이오, 총독?”

“이보시오, 장군. 난 본국에서 임명된 총독이오. 내 스스로 독단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란 말이오.”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흑인 저항군 지도자에게, 프랑스 인 총독은 두 손을 활짝 펴며 말했다.

100퍼센트 사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짓은 아닌 말이었다.

그러나 흑인 저항군 지도자는 그런 총독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얘기했다.

“허, 노예를 총검을 통해서 무력으로 진압하겠다고 선언한 뒤 민간인이고 뭐고 모두 밀어버린 건 총독의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본국 정부의 정식 지시었나보오?”

총독은 속으로 이를 북북 갈았다.

‘이 깜둥이 새끼가... 장군이라고 몇 번 불러주니 아주 기고만장해졌군.’

하지만 모름지기 교양 넘치는 파리의 신사가, 교양 없는 깜둥이의 세치 혀에 놀아날 순 없지 않겠나.

“큼큼. 장군, 부디 신사답게 격식을 차려주길 바라오.”

총독은 교양 있는 자세로 몸을 고쳐 앉으며 말했다.

물론 그러던 말던 흑인 지도자는 별 상관도 하지 않는다는 듯 품 안에서 대서양의 후덥지근한 기후 때문에 눅눅해진 종이 팜플렛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내 이번에 백인인 댁들 신문을 몇 개 주워다 보았소. 이름이 <포브스>였나. 재미있는 기사가 참 많더군.”

“······아, 그렇소?”

“그 기사 중에 내 심정을 가장 울렸던 게 두 가지 있었는데, 무언지 아시오, 총독?”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만.”

총독은 고개를 갸웃하며 흑인 지도자의 말에 답했다.

깜둥이들의 권리니 뭐니 헛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웬 잡지 얘기인가.

흑인 지도자는 눅눅한 종이의 첫 장을 펴, 거기에 담긴 기사를 쭉 읽어 내려갔다.

“첫 번째 기사, 빛의 도시 파리! 이삭의 민족이 주관한 13구 빈민가 재개발 사업의 빛나는 성공! 암흑의 흑기사를 쫓아낸 인간 이성의 위대한 승리···!”

긴 철봉 위에 램프가 달린 신기한 형태의 물건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삽화를 보며 흑인은 이어 말했다.

“백인인 그대들은 태양처럼 빛나는 가스등이라는 기상천외한 물건을 수도에 박고 모두가 하하호호 웃으며 살아가는데, 우리 흑인은 다 썩어가는 나무집에서 잠을 청하면 다행이고, 벌레가 끓는 땅에 등을 붙이는 건 예삿일이지. 아니오?”

“······.”

별 말 없이 자신을 째려보는 백인 총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흑인은 또 다시 물었다.

“총독, 우리의 고혈을 빨아 당신들 집을 화려하게 꾸미니 좋소?”

“······!”

백인 총독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 깜둥이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그러나 총독이 뿜는 살기에도 불구하고, 흑인은 계속 입을 열었다.

“왜? 검이라도 뽑으려고 하시오?”

“이...이...!”

“날 죽이고 싶으면 죽이시오. 다만 날 죽이는 순간, 당신이 서 있는 서인도 제도의 모든 흑인들이 당신 목을 노리고 달려들 텐데... 무운을 빌겠소. 총독. 당신들 백인이 가지고 있는 총알이 얼마나 많을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우리 머릿수보다는 적지 않겠소?

그리고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맹그의 자유의 나무는 비록 잠시 쓰러지겠지만,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란 사실, 잘 알고 계시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총독을 내버려 두고, 흑인은 팜플렛의 다음 장을 넘겨 또 한 번 소리 내 읽었다.

아마 다른 호에서 잘라내 새로 끼워 넣은 건지, 흑인이 읽고 있는 장의 색은 다른 팜플렛의 색보다 좀 더 바래있었다.

“두 번째,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사회적 차별은 공공의 해가 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다.

자유와 재산과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해 저항할 권리는 존중받는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791년 3월 25일.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흑인은 다 읽은 팜플렛을 내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보시오, 총독. 내 하나만 물어보겠소. 우리 흑인들이 당신들에게 어떤 공공의 해를 끼쳤소? 그게 있다면 알려주시오.

그러나, 만약 아니라면. 왜 우리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거요.”

“······.”

“정 답하기 싫다면, 답하지 않아도 괜찮소.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유럽에 있는 프랑스 본국의 의향이 어떠냐는 거요.”

어차피 언제든지 뒤에 칼을 꽂을 생각뿐인 총독, 흑인들과 대화할 생각은 쥐뿔만큼도 없는 총독에게 기대한 적은 없었다. 중요한 건 바로 이 사람의 뜻.

“여기 이 사람, 기욤 드 툴롱도 우리 흑인들을 당신처럼 생각하오?”

투생 브레다는 팜플렛 삽화에 그려진 한 젊은 백인의 초상화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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