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도시, 파리 (5)
적막한 수도원 안, 세 명의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시계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뿐이었다.
틱, 틱, 틱.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제 몸을 왼쪽으로 옮길 때마다, 수도원 의자에 앉은 모두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또한 진해져만 갔다.
“······마라 그 친구가 몇 시에 나갔었죠?”
“오후 한 시였으니, 이제 대여섯 시간 쯤 지났을 거요.”
“대여섯 시간이라니! 당통 동지! 나 이러다 온 몸의 피가 다 말라 죽겠습니다!”
“그래도 기다리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지 않소.”
산악파, 자코뱅의 부당수인 조르주 당통은 카미유 데물랭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에베르 그 미친 작자가 어디 보통 일을 저질렀나? 백주대낮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거리 한 가운데에서 암살을 시도한 게 어디 보통 일이냐는 말이다.
아, 아니다.
가스등 때문에 거리가 해 뜬 것처럼 환했으니 어떻게 보면 백주대낮에 개판을 친 거나 마찬가지겠구나.
피해자도 엠마뉘엘 조세프 시에예스 평원파 당수에, 현역 국민방위대 육군 소령이라니... 게다가 하필이면 그 장교가 기욤 재무총감의 친우라?
죽으려면 제 혼자 죽지 왜 산악파를 그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냔 말인가? 어떻게 만든 시민들의 정당인데!
당통은 욕지거리가 목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난리를 치고, 자살충동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며 얼굴에 피가 몰려 벌게지는 감각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번 일 때문에 파리 시민들의 머릿속에 산악파가 ‘극렬 테러리스트 정당’으로 기억된다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의회에서 왼쪽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산악파는 끝이다.
지지세력이 없는 의원과 정당이 낯 뜨거워 의회에 출석할 수나 있을까? 아니, 평원파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산악파를 단죄하겠다!’라는 명분을 놔둘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당통의 가슴을 옥죄는 건, 바로 기욤 재무총감이 산악파를 무슨 시선으로 바라볼까 하는 걱정이었다.
기욤 드 툴롱, 그 젊은 천재가 여태까지 베르사유와 파리를 오가며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자.
토지조사에 토지분배, 귀족들의 재산몰수와 더불어 빈민구제까지. 빨갛다 못해 시뻘걸 정도의 정책들을 펼쳐나간 재무총감이다.
그런데 그런 재무총감의 뒤통수를 후려 버리다니, 혁명인사들을 통틀어 시민들에게 가장 명망 높은 그가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당통은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우리의 잘못인데 뭘 더 따질 게 있겠습니까. 신께서 보우하시길 기대하는 수밖에요.”
“후우...”
부디 기욤 총감을 만나러 간 장 폴 마라 그자가 좋은 소식만을 들고 왔으면.
그러나 마라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데물랭 세 사람이 그런 생각과 초조한 마음으로 가슴을 한참 졸이고 나서야 나타났다.
“마라 동지! 기욤 총감이 뭐라고 하덥니까!”
셋 중 가장 감정적인 카미유 데물랭이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었다.
“하하, 일단 앉아서 얘기하시지요. 할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걱정으로 애간장이 다 타들어 가 머리가 쭈뼛쭈뼛해진 데물랭과 다르게, 마라는 마치 해탈이라도 한 인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자리에 앉았으니 어서 말해보시오. 기욤 총감의 생각은 어떠한 거 같소이까.”
“그 분은 정말이지... 대인배이십니다, 여러분! 경악할 만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민들을 생각하시는 그 마음이란!”
“······뭐라고? 마라 동지, 좀 더 얘기해보시오.”
“친우께서 사고를 당하셨음에도, 총감께서는 인민을 향한 분노 대신 전쟁이 끝나고 노동자 인민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게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마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수도원의 나무 바닥을 짙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동지? 하지만 기욤 총감의 친우가 중태에 빠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장 폴 마라, 어떻게 동지들에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런 참변에도 불구하고 대국적인 결단을 내린 기욤 총감께 그저 경외심이 들 뿐입니다!”
“······진정으로 나 따위와는 그릇이 다르군.”
당통은 방금 전까지 정치적인 술수만을 생각하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큰 용단을 내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께서 일곱 번 용서하고 일흔 번 더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그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같은 마음입니다, 당통 동지.”
“아, 그리고 총감께서 동지들에게 전해달라고 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삼일 후 로베스피에르 동지와 당통 동지를 다 함께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기욤아.”
“어, 왜.”
아 한참 오늘 자 <포브스> 재밌는 부분 읽고 있었는데 왜 부른담.
“그... 병문안 오는 건 정말 고맙거든?”
“그런데?”
“대체 병문안 올 때 과일은 왜 사들고 오는 거야?”
“왜 사들고 오냐니, 당연히 먹고 힘내라고 사왔지.”
왜 그런 걸 물어본담?
비록 비타 500은 이 시대에 없어서 못 사왔지만, 병문안에 비타 500 12개입 종이박스와 과일바구니는 국룰 아닌가.
“그런 거 안 주고 차라리 병실에서 좀 내보내주면 더 고마울 거 같은데. 이거 봐봐, 이제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다니까?”
“응, 절대 안돼. 여기서 최소 3주는 있어야지. 어딜 가려고?”
어이 마티유 씨. 당신 지금 사태파악 안 돼? 선생님은 지금 살아있는 ‘통합과 용서’의 아이콘이시자 지금 결혼을 앞두고 중태에 빠진 가련한 20대 청년 장교라고.
어디 싸돌아다니다가 기자들한테 둘러싸이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어? 마티유 소령 아니십니까? 분명 중태라고...
- 예? 저 멀쩡한데요?
[충격!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의 거짓말, 마티유 소령은 단순 찰과상에 불과해...]
이런 기사가 뜨는 순간 겨우 조성해낸 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쨍그랑하고 깨지는 건 불 보듯 뻔하지.
유급휴가 받고 푹 침대에서 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얼마나 좋아.
“에라이 씨. 네가 한 번 여기서 지내볼래? 할 거 더럽게 없거든?”
“그러면 취미삼아 과일이나 깎아서 먹든가.”
“야! 장교의 검은 국가의 적을 향해서만 쓰는 거거든?”
“예에. 어련하시겠습니까.”
“끄에에엑 나갈 거야! 나갈 거라고!”
“그루시 형 나 좀 도와줘. 환자가 또 난동을 부리네.”
“아, 물론이지. 기욤.”
“으아아!! 이놈들!! 놔라! 놓으란 말이야!! 테르바뉴 씨! 보나파르트! 도와줘어억!!”
아무리 180센티에 달하는 거한이라도, 건장한 청년 둘이 달려들자 힘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다시 침대에 결박당했다.
결국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두드리던 마티유 형은, 끝끝내 과도를 들고 과일을 깎는 소일거리를 하기로 타협을 보고 겨우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진즉부터 이랬으면 힘도 안 빼고 얼마나 좋아.
그보다 사과 되게 잘 깎네.
“야, 근데 이게 뭐냐?”
과도를 들고 한참 과일을 깎아 나가던 마티유 형은 한 과일을 들고 내게 물었다.
“아 그거? 파인애ㅍ···. 아니, 아나나스.”
“뭐? 기욤아. 그거 엄청 비싼 거 아니냐?”
“흠흠. 무려 네덜란드 산이라고.”
파인애플 하나에 얼만 줄 아나?
거의 한 사람 월급이 넘는다니까? 어메이징 파인애플!
만약 비트코인이 이 시대에 있었으면 파인애플이라는 이름이 붙은 코인이 제일 잘 나가지 않았을까.
“아, 아나나스! 정말 지극정성이군 기욤!”
“뭐야, 그루시 형. 저거 뭔지 먹어봤어?”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베르사유 궁전에 가봤을 때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네! 가히 천상의 맛이야!”
“천, 천상의 맛까지는 아니지 않나?”
아나나스, 아니 파인애플. 에라이 씨 이름 헷갈려 죽겠네 진짜.
아무튼 달달하긴 해도 천상의 맛... 이라고 극찬 할 것까지야...?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눈이 돌아간 그루시 형은 혀를 내두르며 아나나스를 마티유 형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뭐하나 마티유! 어서 깎게!”
“아니, 이거 그냥 먹으면 되는 거 아냐?”
“아나나스는 두꺼운 외부를 깎아야 하네, 어서! 어서 깎으란 말이야!”
어우 진짜 개판이 따로 없네.
그래도 다들 건강해서 이런 개판도 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그래, 이런 모습을 지키려고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거지.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자네가 불렀는데 안 올 사람이 어디 있겠나.”
“맞습니다, 총감 각하.”
음 좋아, 로베스피에르, 시에예스, 당통 까지. 모두 모였구만.
“오늘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번 암살 사건 이후에 더 이상 보복이나 정치적 테러가 일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는 세 사람이 앉은 앞을 서성이며 말했다.
“양쪽 서로 지고는 못 사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상처를 입으면 아물기 마련이죠. 다만 상처 위에 흉터가 남습니다. 누군가는 그 흉터를 보기 싫게 생각하고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그 흉터를 보고 다시는 상처를 입을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이번 암살 사건이 그 흉터가 되어, 모두가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평원파 쪽, 물론 이번 근로노동법에 떨떠름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당장 임금이 배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 자본가 입장에서는 고깝겠죠. 하지만 이번 일처럼 노동자들이 분노하면 그 결과는 정말 참담할 겁니다.”
“알겠네, 내 평원파 당원들에게 확실하게 말해놓겠네.”
좋아. 시에예스 의원님은 내가 확실히 믿을 수 있지.
“산악파 쪽, 압니다. 환경이 열악한 거. 하지만 원래 강산도 10년이 지나야 바뀐다고, 하루 아침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제가 베르사유에 있을 때 같이 공부했던 거 잊지 않으셨지요?”
“물론입니다. 문제는 경제라고.”
음 좋아, 이 기욤 드 툴롱 교수는 로베스피에르 학생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혹시 대학원 오실?
“그러면 이번에는 당통 씨?”
“듣고 있습니다, 각하.”
“딱 잘라 말해서,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쌈박질을 할 거면 의회 안에서 말로 쌈박질을 하란 말입니다. 밖에서 테러니 뭐니 하지 말고. 아시겠습니까? 제발 단속 좀 잘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각하...”
뭐... 그렇다고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고개를 푹 꺾으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오늘 이 날을 기점으로, 제발 정치 일은 의회 안에서 서로에게 구두를 던지는 선에서 마무리하자구요. 아시겠습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세 사람은, 내 다음 말에 사색이 되었다.
“자꾸 그러면 제가 제 3당을 만들어서 출마할 겁니다.”
그러니까 정치 좆같이 하지 마시라고. 안 그래도 좁은 의회 자리 더 좁게 만들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