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빛의 도시, 파리 (3) (133/341)

빛의 도시, 파리 (3)

“이야, 이게 누구야! 플로리앙 아니냐? 출세했다더니 너 신수가 아주 훤해졌다 야.”

“하하, 다 예전에 아저씨들이 절 잘 봐주신 덕 아니겠습니까.”

“이 자식. 높으신 분들이랑 어울리더니 말하는 게 아주 능글맞아졌어?”

“아저씨도 좀 능글맞아지세요. 공장장님한테 역정만 내니까 아저씨 짬에도 여태껏 기계 밑에서 밸브나 돌리지.”

“이 녀석, 공장 그만 둘 때까지만 해도 많이 걱정됐는데. 잘 지내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구나.”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따님은 잘 지내세요?”

“아무렴 당연하지! 누가 아빠 노릇하는데.”

정장을 입은 플로리앙은 스스럼없이 이곳저곳 석탄 검정이 잔뜩 묻은 노동자들의 손을 쥐고 흔들며 말했다.

그에 부응하듯, 노동자들도 모두들 환하게 웃으며 오랜만에 찾아온 출세한 전 동료를 맞이해 주었다.

“이곳에서 같이 숯검댕이를 얼굴에 묻히면서 기계를 돌렸던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되게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그래 인석아, 가끔은 얼굴도 좀 비추고 그래. 이러다가 얼굴도 까먹겠어.”

작업반장은 플로리앙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얘기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온 거냐? 너처럼 바쁜 녀석이 시간 내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닐 텐데.”

“아, 제가 사람 하나를 찾고 있는데 혹시 반장님이나 다른 아저씨들이 알고 있나 해서 말이죠.”

“사람? 뭐... 알겠다. 어떻게 생겼는데?”

플로리앙은 품 안에서 그림 한 장을 펼쳐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아저씨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아는 분 있나요?”

“······난 잘 모르겄는디...”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쩝. 역시 쉽지 않나

“······잠깐만. 그거 옆옆 공장에서 방직기 돌리는 양반 아닌가?”

“예? 아저씨. 그거 정말인가요?!”

“어, 내가 볼 때는 딱 그 양반처럼 생겼는데?”

“혹시 그 사람 오늘 공장에 출근 했답니까?”

“글쎄다. 그거까지는 내가 모르지. 내가 그 공장에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아저씨! 이건 따님 옷이라도 한 벌 사 입히세요.”

“아, 아니. 무슨 뭔 놈의 돈을 이렇게 많이 주냐?”

플로리앙은 금화가 묵직하게 든 주머니를 한 노동자에게 툭 건네준 뒤 서둘러 공장을 나섰다.

“그러면 나중에 포도주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어, 어? 그래. 조심해서 가라!”

지금 구치소에 수감된 암살범의 신원이 정말 옆옆 공장에서 방직기를 돌리는 사람이라면,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오늘 출근 못했을 거다.

“우디노 씨.”

“예, 부사장님.”

“이 근처 방직공장이 의심스럽습니다. 한 번 조사해볼 가치가 있겠어요.”

“바로 채비하겠습니다.”

험상궂은 얼굴의 신입사원은 장정 여럿을 대동하고 살기 띤 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방직공장 노동자라. 확실합니까?”

나는 플로리앙 씨를 향해 말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자칫 잘못해서 엉뚱한 사람 잡으면 어떻게 해.

그런 내 걱정을 날려주듯, 플로리앙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사장님. 결근한 날짜가 정확하게 암살범이 잡힌 날짜와 같습니다.”

“몽타쥬도 확인했구요?”

“예, 그렇습니다. 해당 방직공장 노동자들도 공장장도 그 사람이 확실하답니다.”

“좋습니다.”

이제 하나씩 하나씩 밝혀보면서 용의선상을 줄여나가면 되겠어.

나는 고개를 돌려 마이어 씨를 보고 말했다.

“마이어 씨는 수확이 좀 있었습니까?”

“마부조합과 근방 은행을 뒤져본 결과, 암살범이 쓴 화폐가 은화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은화라?”

“굳이 쓰기도 편하고 옮기고 편한 금화를 두고 은화를 사용했다는 걸 기반으로 추측해본다면···.”

“소득 자체가 은화로 들어오는 놈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사장님.”

내 말에 마이어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 같이 액면가가 큰 화폐가 아니라 은화가 소득으로 들어오는 놈. 그러면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일 만한 선동력을 갖춘 놈.

이 새끼... 혹시 잡지 파는 새끼인가?

나는 이제 마이어 씨의 옆에 서있는 페시옹 씨를 보고 입을 열었다.

“페시옹 씨는요.”

“예. 일단 권총은 영국 노퍽에서 제작된 영국 해군 장교용 권총입니다. 제조 날짜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노획한 물자로 확인 되었습니다.”

노획한 무기라.

“그러면 군용 치장물자 아닙니까?”

“예, 1789년 바스티유 요새 함락 당시 앵발리드 군병원에서 시민들에게 탈취당한 무기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바스티유 요새 함락 이후 혁명정부는 사람들의 무기를 수거해갔다.

그런데 혁명정부의 눈을 피해 무기를 스리슬쩍 할 놈이라면, 무조건 바스티유 요새 함락을 주도할 만큼 과격한 새끼 아닐까.

“자코뱅.”

당통, 로베스피에르, 데물랭, 마라, 에베르.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데물랭은 아니다. 이미 의회에서 제 뜻을 펼치는 사람들이 왜?

그리고 장 폴 마라가 쓰는 <인민의 벗>은 당통이 후원하는 잡지다. 그러니 마라도 아니야.

그러면 남은 건 <늙은이 뒤셴> 잡지사의 편집장 자크 르네 에베르.

네놈이구나.

“형.”

“듣고 있네. 기욤.”

나는 용기병대의 흉갑과 장교복을 입은 그루시 형에게 말했다.

“흉갑 서른 개만 어떻게 빼돌려볼 수 없나?”

“······서른 개라. 자네 어디서 전쟁이라도 치르려고?”

“그래서 돼, 안 돼.”

“후우. 쓰고 바로 돌려주게.”

“물론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빡빡 민 험상궂은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우디노 씨.”

“예, 사장님.”

“사람들은 준비되었습니까?”

“전부 다 제가 지휘하던 척탄병부대 출신 떡대들로 준비해놨습니다.”

“좋습니다, 무장하고 대기시켜 놓으십시오.”

“명 받잡겠습니다.”

***

“하아암.”

<늙은이 뒤셴> 잡지사 앞, 경비인 듯 보이는 한 사내는 하늘을 보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음? 저 사람들은 뭐람. 입대하러 가는 사람들인가?”

그런 경비를 향해 스물 가량 되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봐, 모병소는 두 블록 아래요.”

“여기 <늙은이 뒤셴>잡지사 아니오?”

“그건 맞는데... 왜 그러···, 크허억!”

여기가 잡지사 아니냐고 물어보던 건장한 사내의 군홧발로 난데없이 배를 걷어차인 경비는 그대로 땅에 쓰러져 밀려나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 이 새끼야!”

“욱...우욱...”

“밧줄! 밧줄 가져와! 이 새끼 못 도망가게 손 묶어!”

경비가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장정들은 밧줄로 경비의 손을 뒤로 묶어버렸다.

“여기가 <늙은이 뒤셴>이구만! 제군들, 모두 들어가라! 에베르라는 그 쥐새끼만 잡으면 된다!”

“““예!”””

우디노는 그 육중한 몸무게를 실어 문을 군홧발로 힘차게 차 열었다.

방금 전까지 글을 쓰고 있었던 듯, 속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당, 당신들 뭐요!”

“네놈들 뭐하는 새끼들이야!”

“뭐, 뭐야! 우린 잘못 없소! 우린 그냥 글만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 그러면 당신네들 사장 에베르라는 놈, 어디 있는지 알ㅇ···.”

탕! 탕!

속기사라는 놈들은 에베르라는 이름을 듣자, 품 안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우디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우디노와 그가 거느리는 사내들은, 전장에서 단련된 것처럼 몸을 순식간에 숙여 총탄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우디노 대위님! 글만 쓰는 새끼들이라면서 왜 품안에서 권총이 나옵니까!?”

“닥쳐! 제군들, 신문이나 쓰는 샌님들한테 지고 싶나! 우린 척탄병이다! 돌격! 돌격! 돌격!”

“대위님이 돌격하라신다! 검을 뽑아라!”

서른이나 되는 장정들이 품 안에서 검과 권총을 뽑자, 용기병대에서 받아온 은빛 흉갑이 빛을 받아 빛나기 시작했다.

“돌입! 돌입! 돌입!”

“당장 총 내리고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다 바닥에 엎드려!”

“컥, 크억!”

용기 있게 권총을 뽑아 항전하려던 샌님들은 팔과 다리에 총상과 칼침을 맞고 바닥에 엎어졌다.

180센티에 갑옷까지 입은 장정들을 어떻게 상대하겠나.

결국 <늙은이 뒤셴>의 직원들은 다들 손을 높이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항복! 항복!”

“손 높이 들어 이 새끼야!”

“당, 당신들 뭐요! 경찰이야!?”

“우리? 우린 경찰이 아니라 이삭의 민족 사 군사경호원이다. 입 닥치고 손이나 들어!”

***

“사장님, 안 쪽 모두 안전합니다.”

“우리 쪽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그게 제일 걱정인데.

“다들 멀쩡합니다! 말박이 친구들에게 갑옷까지 빌렸는데 골로 가면 빌린 값이 아까워 죽지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다행이군요. 에베르 그 자는?”

“예, 위에 포박해놨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우디노 씨의 인도대로 계단을 올라 사장실로 들어갔다.

척탄병 둘이 무릎으로 목을 누르는 바람에, 에베르는 바닥에 처박혀있었다.

“오랜만에 뵙는 군요, 에베르 씨.”

“퉤. 네놈과 할 말 따위는 없다.”

“뭐, 나도 당신과 그리 만담을 즐기고 싶은 건 아닙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궐련을 물었다.

죽이면 안 된다. 죽이면 안 된다.

“어디 한 번 말씀해보시죠. 왜 그러셨습니까?”

“왜냐니, 당연히 이 땅에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사명 때문이지. 네 놈 같은 푸른 피의 부르주아는 이해 못할 그런 사명 말이야.”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이라! 좋습니다. 그렇게 높디높은 사명감을 가지신 분이, 의회에 나가서 언변으로 세상을 바꿀 생각이 아니라 파리 한복판에서 테러를 일으킵니까?”

“하. 내가 네 놈 장단에 놀아나줄 거 같나?”

“이봐. 당신 뭘 잘못알고 있는 거 같은데.”

탕!

나는 우디노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에베르의 오른팔에 납탄을 박아 넣었다.

“악!! 아, 아아악!”

“당신하고 놀아주는 건 나야.”

어디 조동아리를 씨부려 씨부리긴.

“윽! 으으윽!!”

“왜? 아픈가? 남 몸에 납탄 박을 생각을 했으면 자기 몸에도 납탄 박힐 생각을 했어야지. 당신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

“네...놈이 뭘 알아! 귀족으로 태어나 호강하고 사는 네놈들이 우리 노동자들에 대해 뭘 아느냔 말이야!!”

“그래, 뭐. 당신이 다 옳다고 치자고. 그러면 나도 한 가지 물어볼게. 당신, 혹시 한 번이라도 손으로 삽이나 곡괭이 잡아본 적 있나?”

“뭐, 뭐?”

“한 번이라도 농민들의 농기구나 땜장이들의 풀무를 잡아본 적 있느냔 말이야?”

“······.”

“어디 평생 동안 손에 삽 한번 안 쥐고 남만 빨아먹으며 산 새끼가 노동자니 뭐니 씨부려.”

“그러는 네놈은 있나? 의자에 앉아 손가락만 까닥까닥하는 주제에!”

“지랄. 내가 군대에서 삽질로 깐 흙만 해도 이 건물 1층은 채워.”

나는 플로리앙 씨에게 곁눈질을 했다.

플로리앙 씨는 내게 말없이 서류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름, 자크 르네 에베르. <늙은이 뒤셴>의 편집장이자 잡지사 사장. 그리고 뤼 데 누이에에서 미용사친구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갔고, 레 퓌블리크 극장에서 희곡을 썼으나 극단에 채택되지 못함. 그 후로는 극장 안에서 손님들 상대로 좀도둑질을 하다가 쫓겨났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어, 어떻게 그걸...”

“방첩사령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라파예트 국민방위대 사령관이라고 당신도 잘 알 텐데.”

나는 다시 서류를 플로리앙 씨에게 건네고 입을 열었다.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야. 대신 예쁘게 잘 포장해서 경찰과 법원 앞으로 보내주지. 아, 포장지는 내일 아침 댁의 부끄러운 과거를 오목조목 1면에 실을 예정인 조간신문과 잡지면 되지 않을까 싶네.

<노동자를 부르짖던 양심 있는 언론인의 과거, 그는 사실 손에 삽 한 번 안 쥐어본 좀도둑꾼이었다!>, 어때. 꽤나 잘 팔릴 거 같지 않나?”

“이...이!! 개새···!”

덜거럭

나는 있는 힘껏 에베르의 턱을 발로 차 돌려버렸다.

그래. 좀 조용하니 얼마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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