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도시, 파리 (2)
초조한 마음으로 열어본 회중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다행히도 5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 참, 로베스피에르 그 친구 말이 참 많단 말이야. 하마터면 늦을 뻔 하지 않았나.”
시에예스는 회중시계를 닫으며 읊조렸다.
“의원님, 오늘도 13구 쪽으로 돌아서 가시렵니까?”
“그렇게 해주게. 보고 또 봐도 질리질 않는단 말이야.”
“예이.”
마부는 시에예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말고삐를 다시 한 번 세차게 휘둘렀다.
“의원님, 도착했습니다.”
“잘했네, 딱 맞게 도착했군. 자네도 잠깐 고삐를 놓고 이 순간을 즐기지 않겠나?”
“아무렴요.”
시에예스와 마부는 그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몸을 기대고, 마법의 시간을 기다렸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인도와 마차도에 가득 찬 연인들, 아이를 대동한 일가족들, 구경꾼들 모두가 마법의 시간을 기다렸다.
“점등까지 3, 2, 1!”
오늘도 6시 정각이 되자, 파리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또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야만의 어둠을 몰아내고,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빛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와아아...”
“엄마, 세상이 엄청 환해!”
아무리 봐도 정말 마법을 쓰는 건 아닌가 싶은 광경.
“······현대문명이란 정말 경이롭기 그지없는 거 같네.”
“하하하, 안 그래도 제 아들놈도 소문을 듣고 꼭 보고 싶다고 하도 졸라대질 뭡니까.”
“어른인 나도 이게 마법처럼 신기할 따름인데 어린아이들이 오죽하겠나. 그래, 이번 주말에는 의회도 휴회하니 이참에 한 번 가족끼리 나들이 와보는 건 어떤가?”
“예? 제가 없으면 의원님 마차는 누가 끈답니까?”
“나도 집에서 하루 늘어지게 쉬지 뭐. 여태까지 많이 달려왔지 않나.”
“그러시면 저도 사양 않고! 하하하!”
벌써부터 가족과 마실 나갈 생각에 들뜬 듯, 마부는 헤벌쭉 웃으며 시에예스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부터 정체구간인가? 아까부터 도통 나아가질 못하는데.”
“저녁 6시 이후에는 파리에 있는 마차들이 죄 여기로 몰려드니 말입니다.”
“하기야 젊은이들 데이트 코스라던가... 아, 마침 저기 한 쌍 지나가는구만.”
다림질을 얼마나 세심하게 했는지 멋지게 각이 잡힌 군복을 입은 장교와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은 숙녀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시에예스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뒤통수 아닌가?
“이보게, 마티유 소령!”
“······시에예스 의원님? 아니, 왜 여기 계십니까?”
“옆에 계신 숙녀 분은 약혼녀이신가? 그림이 참 좋아 보이네!”
“마티유 씨, 저 신사 분은?”
“아, 저분은 국민의회 의원이신 시에예스 의원님이에요.”
“반갑습니다, 평원파 당수 엠마뉘엘 조세프 시에예스라 합니다. 이런 숙녀 분이시라면 마티유 저 친구가 푹 빠질 만도 하군요”
시에예스는 마차창문을 열고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반가워요, 의원님. 안 조세프 테르바뉴라고 합니다.”
“하하, 만난 것도 인연이라던데 중간 이름까지 같은 인연이라니! 이거 보통 운 좋은 일이 일어날 예고가 아닙니다 그려.”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아저씨는, 이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스물 세 살짜리 젊은이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샘솟았다.
“그래서 마티유, 숙녀분과 결혼식은 언제 올리려고 하나?”
“겨, 겨, 결혼식이라니요!”
시에예스의 말에 두 청춘남녀는 볼이 발갛게 떠올랐다.
하여간, 딱 20대 연인들이 제일 놀려먹기 좋다니까.
“20대 남녀가 팔짱끼고 파리 시내를, 그것도 데이트코스를 나란히 산책하고 있으면 딱 봐도 기정사실 아닌가. 내 이래 뵈도 사제니 자네 결혼미사는 내가 서줌세. 대주교가 집전하는 결혼미사 받기 쉽지 않은 거 알고 있지?”
“······사실 올해 크리스마스에 올리려고 합니다.”
“하하하! 크리스마스라! 좋은 날이지! 마티유, 하여간 낭만 있는 청년이야. 아! 이런, 내가 그만 두 짝이 보낼 로맨틱한 시간을 빼앗아버린 거 같군. 이 눈치 없고 고약한 사제는 이만 빠지겠네. 그러면 긴 밤 동안 예쁜 사랑하시길.”
“의, 의원님!!”
고약한 사제는 새빨간 얼굴로 씩씩대는 젊은 청춘에게, 마치 스크루지처럼 사악한 미소를 짓고는 마차 창문을 다시 닫았다.
그 순간 길게 정체되어 있는 마차들 사이로, 시에예스의 마차를 향해 후줄근한 남성이 뛰쳐나왔다.
“인민의 적, 시에예스를 처단한다!!”
“뭐, 뭐?”
품 안에 빛나는 저건... 총인가?
시에예스는 눈앞의 현실이 마치 수천 배 느려지는 것 같았다.
“공화국 만세!”
타앙-!
총성이 울렸다.
그러나 웬 젊은 군인이 뛰어드는 바람에, 남성이 꺼내든 총에서 나온 납탄은 시에예스를 향하지 못했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난, 난 괜찮네!! 마티유, 마티유 소령은?!”
시에예스는 마부의 부축을 뿌리치고 젊은 군인을 찾아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하지만 시에예스의 눈에는, 마티유 대신 이곳을 향해 뛰어오는 경찰관들이 보였다.
“삐익-! 삐익-! 13구 사거리에서 총성 발생!! 총성 발생!!”
***
파리, 앵발리드 군병원.
“······.”
“정말 천운입니다. 납탄이 다행히도 장기가 든 배가 아니라 옆구리를 스쳐서 당분간 살이 붙을 때까지 요양은 할지언정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러면 왜 깨어나지 못하는 겁니까.”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마티유 형을 바라보며 의사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 일시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그러면 혹시 어디 잘라내고 절단 한다던가 그럴 필요는 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 도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우... 천만 다행이다. 천만 다행이야...
아직 소독제도 없고 항생제도 없어 파상풍으로도 명을 달리하는 18세기다. 자칫 잘못해서 총알이 안 좋은 곳에 맞았으면 마티유 형은 불구자가 됐겠지.
나는 의사의 손을 맞잡고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선생님. 마티유 형의 목숨을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각하. 이제 환자 분께서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병실에서 나가주실 수 있으신지요?”
“예,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병실 문을 닫고 병원 복도로 나갔다.
“플로리앙 씨, 시에예스 의원님과 테르바뉴 양은?”
“시에예스 의원님은 혹시나 있을 2차 테러 때문에 자택으로 피신하셨고, 테르바뉴 양은 직원을 붙여서 일단 돌려보냈습니다. 아무래도 몸과 정신을 추스를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후우. 잘하셨습니다.”
나는 병실 문이 제대로 닫힌 지 확인하고, 주머니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플로리앙 씨.”
“예, 사장님.”
“헌병과 경찰은 뭐라고 합니까.”
“······구슬리고 쥐어 패고 다 해봤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용의자가 도통 입을 열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입을 안 연다라...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얘기했다.
“듣기로는 그 암살범이 시에예스 의원님더러 ‘인민의 적’이라고 했다더군요.”
혁명을 이끈 사람에게 인민의 적이라고 부를만한 시뻘건 새끼가 이번 일의 주동자일 터.
그 새끼라면 어디에 몸을 숨길까. 어디가 네놈이 서식하는 곳일까.
한 군데 뿐이지.
“플로리앙 씨, 공장에서 일할 때 만났던 노동자들과 지금도 연락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긴말 안하겠습니다. 암살범인지 뭔지, 그 찢어죽일 새끼 신원. 삼 일 안으로 알아내오세요. 경찰을 동원하던 헌병을 동원하던, 아니면 그 놈 몽타쥬를 따서 노동자들에게 물어보던. 그 외에 무슨 수단을 쓰던지 제가 다 책임집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나는 고개를 돌려 급한 마음에 군복조차 벗지 못하고 달려온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루시 형.”
“듣고 있네, 기욤.”
“파리 수도방위부대에서 가장 과격한 놈들이나 출세에 목마른 놈들 몇 추려서 나한테 데려와 줄 수 있나?”
“바로 대령하도록 하겠네.”
“좋아.”
나는 이제 양복을 입고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이어 씨.”
“예, 사장님.”
“암살범 신원이 확인되면 그 놈 주머니에 있는 동전 하나까지 모두 어디서, 누가, 언제, 왜 줬는지 알아내 가져오세요.”
“알겠습니다.”
“페시옹 씨.”
“예, 사장님.”
“사관학교에서 병기본은 모두 배웠겠죠?”
“물론입니다.”
“암살범 놈이 쓴 권총의 출처를 조사해보십시오. 제조사, 병기번호, 어디 병기창에서 보관했는지, 아니면 민간에서 만든 건지. 뭐든지 다 일단 조사해서 내게 가져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당신 선 한참 넘었어.
***
1792년 4월 25일.
“이름.”
“니콜라 우디노 대위입니다. 각하!”
“좋습니다. 우디노 대위.”
“대위는 자신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괜찮습니다. 뭐든 괜찮으니 진솔하게 말해보십시오.”
우디노는 잠시 바닥을 보았다가 눈앞의 전설적인 남자의 눈을 보고 입을 열었다.
“높이 출세하고 싶습니다, 각하!”
“출세라. 어떤 출세를 말하시는 겁니까, 부의 출세? 명예의 출세?”
“모두 원합니다, 각하!”
“좋습니다. 아주 만족스럽군요.”
좋아, 원하는 게 확실한 사람만큼 적합한 계약상대는 없지.
“니콜라 우디노 대위. 혹시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알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동인도 회사에는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용병들이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예. 각하.”
“좋습니다.”
나는 계속 이어 말했다.
“니콜라 우디노 대위. 며칠 전 13구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예, 각하. 13구 총기사고라면 알고 있습니다. 시민들 간에 다툼 중에 총이 발사되었다고...”
“아,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졌나 보군요. 뭐,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그 사고에 제 가까운 사람이 휘말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경찰도 헌병도 도통 그 범인의 뒤에 있는 누군가를 캐낼 수가 없다더군요.”
“······.”
“나는 순진한 사람들 뒤에 숨어서 타인에게 해코지하는 그런 쓰레기를 치워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공권력에 기대서는 내가 원하는 바가 과연 이루어질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디노 대위.”
법 좋다 이거야.
그런데 말이지. 모든 일에는 골든타임이 있다. 과연 이번 일을 법대로 착착 진행하면 그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을까?
“내가 동인도회사처럼 더럽고 더러운 짓을 시키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경찰처럼 누가 보기에도 자랑스러운 일만 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일체의 보복이나 불이익을 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한 가지 약속하는 건, 당신이 원한다고 말했던 걸 확실히 당신의 손에 거슬려주겠습니다. 선택은 우디노 대위의 몫입니다.”
험상궂은 얼굴의 대위는 잠시 눈을 아래로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