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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전쟁 속의 경제인 (4) (125/341)

전쟁 속의 경제인 (4)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세계 최고의 금융 명문가이며 각종 음모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유대계 가문, 로스차일드.

당장에 인류가 배출한 최악의 악인인 콧수염 대마왕 히틀러가 말하지 않았나. ‘독일이 망한 건 영국과 미국을 조종하는 유대-자본가, 로스차일드의 음모 때문이다!’라고 말이야.

당연히 사실은 아니지만, 그런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 될 정도로 돈을 많이 굴리신다는 거지.

그런데 로스차일드는 영미권 가문 아니었나? 신성로마제국 소속 방백국의 금고지기라니.

미국은 얼마 전에 독립한 응애응애 햇병아리 신생독립국이니 그렇다고 치고 왜 영국의 금융가, 시티오브런던이 아니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살고 있는 거지.

아직까지는 로스차일드가 유럽의 시끌벅적한 정재계에 플레이어로 참가하기 전일까.

방백국의 일개 금고지기 가문, 로스차일드.

주식으로 따지면 잡주도 아니고,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개잡주 중의 개잡주.

하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우상향을 치다 못해 하늘을 뚫고 나갈 금융주께서 지금 포지션이 개잡주 중의 개잡주라는 거.

수 년? 수십 년? 그것도 아니면 백 년?

올해인 1791년에 겨우 방백국의 일개 금고지기 가문 따위가, 이세계물마냥 20세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영미를 쥐락펴락, 달러타고 최전방 시티오브런던-월스트리트 고지 위에 오르시는 유대-자본가 금융가문으로 진화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수 년은 말도 안 되고. 아마 기본으로 수십 년, 그보다 더하면 백 년 정도 잡으면 될 테지.

그렇다면 시간 상, 지금 내 앞에서 눈동자를 불안하게 이리저리 굴리는 이 중년 아저씨가 바로 로스차일드 신화를 써내려 갈 첫 번째 주자일 거다.

만약 이 사람을 이삭의 민족 쪽으로 끌어드린다면, 나는 최소한 백 년은 갈 이 세상 최고의 금융노예, 아니 전문가를 얻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저 사람에게도, 겨우 방백국 금고지기보다는 인구 2700만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장악한 이삭의 민족의 재정고문이 훨씬 더 구미에 당기는 처사 아니겠나.

그러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나는 어느새 내 무릎 위에 제 몸을 눕히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와 일 하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 각하, 실례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당혹감 때문인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게 되묻는 마이어 씨를 향해, 나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혹시 마이어 씨께서는 저와 제 사업체인 이삭의 민족과 항구적인 협력관계를 쌓아나갈 용의가 있으신지 여쭤보는 겁니다.”

“그, 그런 제안은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만...”

“이해합니다, 마이어 씨. 아무래도 제가 건넨 말이 꽤나 갑작스러워 당황스러우실 테지요. 천천히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그런데 항구적인 협력관계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요?”

“이삭의 민족 회계관리와 재정관리직입니다.”

내 말에 마이어 씨가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고 고민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커피를 들어 몇 모금 삼켰다.

“······각하.”

“아, 마이어 씨. 결정은 하셨습니까?”

“예, 각하.”

음, 좋아. 역시 돈 먹고 돈 먹는 일 하는 분 답게 머리 돌아가는 속도가 꽤나 빠르시구만?

“좋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소인은 총감 각하의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푸우웁!! 에? 뭐, 뭐라구요?”

나는 마시던 커피를 그만 코를 통해 조금 흘리고 말았다.

에? 거절? 거절 왜???

분명 내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을 텐데?

아니, 방백국 금고지기보다야 유럽의 중심인 프랑스 파리 대기업 재정고문 자리가 훨씬 더 탐스러운 자리 아닌가?

물론 우리 회사가 창립 과정에서 약간의 회계부정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유럽 그 어떤 회사의 회계 총계정원장도, 이삭의 민족 것만큼 깨끗하지는 않을 거다.

거기에 자본금도 빠방하고, 군납까지 하는 회사 재정고문을 거절하다니.

나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마이어 씨에게 말했다.

“헤센 방백작께서 상당히 돈을 많이 주시나봅니다.”

“아. 그건 아닙니다, 각하.”

어우 단호하시네. 정말로 돈 때문은 아닌가 봐.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요, 마이어 씨?”

“신뢰-라고 대답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하.”

“······신뢰라구요?”

“예, 그렇습니다. 각하께서도 사업체를 관리하시니 아실 테지요. 장사와 사업에서는 신뢰가 중요하시다는 것.”

“알다마다요.”

“우리 금융가들도 똑같습니다, 각하.”

마이어 씨는 이어 말했다.

“아. 아니군요. 오히려 우리 금융가들이 신뢰라는 단어에 사업가들보다 더욱 더 민감하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 금융가들은 고용주로부터 돈을 맡아 안전하게 관리하고 또 그 돈을 불리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함부로 바꾸는 자금 관리인이라니, 그것만큼 금융가에게 까다로운 수식어도 없을 겁니다, 각하.”

“음.”

“특히나 소인은 지금 헤센 방백작께 사절이라는 임무를 띠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각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저희 로스차일드 가문의 평판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되긴, 개박살 나겠지.

나는 마이어 씨의 말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합니다. 제가 생각이 많이 짧았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마이어 씨.”

“아, 아닙니다. 각하! 이런 제안을 주신 것만으로도 소인은 황공할 따름입니다.”

“헤센 방백작께서는 굉장히 복 받으신 분이군요. 마이어 씨 같은 봉신을 거느리시다니.”

아쉽네.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구차하게 붙잡아 봤자 역효과만 날 거고.

나중에 대충 사람 한 둘 붙여서 로스차일드가 매수하는 주식이나 같이 사지 뭐.

“알겠습니다, 마이어 씨. 우리 프랑스군은 귀국, 헤센 방백국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겠습니다. 제 이름 기욤 드 툴롱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감, 감사드립니다. 각하! 프랑크푸르트 시민들과 헤센 방백국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부디 가시는 길, 살펴 가시길.”

내가 건넨 말에, 마이어 씨는 날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응접실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쩝. 전쟁 중만 아니었어도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무조건 데리고 가는 건데.

“각하, 얘기는 잘되셨습니까?”

“거의 철벽이더라구요.”

나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이런. 그래도 인연이라는 게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연이 되면 또다시 기회가 오겠지요.”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안타깝다는 듯 내게 말했다.

“음. 인연이라.”

“그보다 오늘 파리, 르브렁 외무장관과 탈레랑 의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각하.”

“그 두 사람이요? 뭐라고 하더랍니까?”

“우리 프랑스가 흘린 피 값을 받아낼 준비를 하면 될 것 같다-라더군요.”

“프로이센이 항복하겠답니까?”

“예, 각하. 여러 나라를 상대해야하는 프로이센으로서는 여기까지도 상당한 출혈이겠지요. 물론 아직 러시아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 야만인들이 프랑스까지 오려면 수개월은 더 걸릴 겁니다.”

“일단 한숨 돌렸군요. 잠깐만...”

그러면 시간이 꽤 있다는 거네?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여기서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대강...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만.”

“저 딱 일주일만 프랑크푸르트에 갔다와보겠습니다.”

“갑자기요?”

“세상에 둘도 없는 인재가 있잖습니까.”

로스차일드몬. 넌 내꺼야.

***

1791년 10월 2일.

헤센 방백국, 프랑크푸르트.

우리 재무부 직원들이 한참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입힌 손해를 계산하기 위해 주판알을 이리저리 굴릴 시간.

나는 트리어에서 벗어나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어, 어서오시오. 난 빌헬름 1세라고 하오. 부디 우리 프랑크푸르트에서 좋은 시간 보내길 비오.”

“예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백국에는 무슨 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친히 우리 프랑스로 사절을 보냈는데, 당연히 답례사절을 보내드려야지요.”

“······.”

그러니까 그걸 왜 하필 당신이 직접 오는데-라는 표정으로 날 보는 방백작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서, 나는 어서 행궁을 빠져나갔다.

방백작 당신과는 볼 일 없어. 내 온 관심사는 다 딱 한 사람에게 쏠려있을 뿐.

대충 환영연회니 뭐니 그런 것도 필요 없다.

“······각하, 여기까지 절 쫓아오시다니요. 이건 좀 너무 하신 것 아닌지...”

“어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세상에 둘도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만한 일입니다.”

“제가 왜 둘도 없는 인재라고 하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만...”

아 왜긴. 당신 로스차일드잖아. 세상을 지배하는 흑막, 유대-자본가!!

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저택 응접실 의자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사절 마이어 씨가 아니라, 금융가 마이어 씨를 만나고 싶군요.”

“음...”

“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마이어 씨. 어쩌시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주인을 바꾸는 건...”

“흠. 혹시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마이어 씨?”

“물론입니다. 각하.”

나는 궐련 하나를 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쓰읍. 후우.

아주 철벽이시네. 과연 이 철벽을 어떻게 뚫을 수 있을지.

일단 거래는 합당한 값과 물건이 오고가야 하는 법.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과연 뭘까.

유대인은 기독교도들과 양립할 수 없는 존재다.

예수를 몰아 죽인 유대인들을 기독교도들이 용서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지.

유대인이 저택을 소지한 것도 꼴 받는데, 그게 번쩍번쩍 돈 바른 티가 나면 바로 죽창 행이다.

그렇다면 유대인, 그것도 제 모습을 남들에게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간절한 게 뭘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요 앞 저택들을 봤는데, 죄다 삐까번쩍한 가운데 로스차일드 가의 저택만 수수하더군요.”

“······선대께서 치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던 터라.”

“아, 그렇습니까? 전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 가문이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려.”

마이어 씨의 미간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유대인인 것과 저택이 수수한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왜긴요. 유대인이 사는 집이 졸부 티가 나면 창에 거꾸로 꿰이지 않겠습니까, 마이어 씨.”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군요.”

마이어 씨는 이어 말했다.

“그보다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게, 조금 불쾌하군요. 각하. 차라리 생각을 정리하고 내일 다시 뵙는 게 낫지 않을는지...”

“내가 하나 약속드리겠습니다, 마이어 씨.”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트렸다.

“날 따라오면 당신네 로스차일드 가문을 제 2의 베어링 가문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탄압받지 않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말입니다.”

프랑스에서 꿈을 펼쳐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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