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전쟁 속의 경제인 (1) (122/341)

전쟁 속의 경제인 (1)

1791년 9월 5일.

신성로마제국, 트리어.

군화 열 켤레, 군복 스무 벌, 거기에 소대 급양비 횡령까지. 이야 해쳐먹기도 정말 많이 해쳐먹으셨네. 네가 무슨 괴도 루팡이야?

“그... 상사님? 장난질을 치셔도 전시에, 그것도 하필이면 군용 보급품에 장난 칠 생각을 하시다니 여러모로 대단하십니다?”

“살, 살려주십쇼! 각하! 제가 집안 사정이 어렵다 보니...!”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면 죄가 사해지기라도 하는 건지, 내 앞에 끌려온 부패사범 중 태반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죄인을 끌고 온 헌병 장교를 향해 얘기했다.

“니콜라 우디노 중위? 심문은 끝났으니 이제 끌고 가셔도 됩니다.”

“예! 각하! 이 돼지 같은 새끼! 어서 일어나!”

“각하! 각하! 으아아, 이거 놔라! 이거 놔! 각하!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건장한 헌병 장교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손이 꽁꽁 묶인 죄인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사무소 밖을 향해 질질 끌려 나갔다.

18세기의 열악한 도로 상황, 그리고 이렇게 중간에 보급을 삥땅치는 내부의 적들 때문에 파리와 프랑스 곳곳에서 끌어 모은 소중한 보급품들은 도로를 걷다가, 강을 지나다가, 도시를 지나다가 유유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개새끼들.

열성적인 혁명 옹호자거나 글을 읽을 줄 아는 식자들은 고급자원으로 뽑혀 전선에 나가있었고, 결국 후방에 남은 군인들 중에는 어디서 한 탕 해먹을 생각으로 가득 찬 놈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2년간의 군생활로 얻은 교훈인 ‘우리 병사들의 적은 간부다.’라는 말을 다시 곱씹으며 재무부 직원들을 대거 이끌고 트리어에 있는 저택을 하나 임대해 임시 사무소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삽시간에 안락한 파리에서 전쟁터 후방으로 끌려나온 재무부 직원들은 입을 빼쭉 내밀고 사무실 곳곳에서 궁시렁거렸지만, 내가 직접 각 부대 회계보고서를 점검하기 시작하자 모두들 군말 없이 따라주었다. 음음. 역시 우리 재무부 직원들은 착하고 성실하다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발 그만 좀 성실하셔도 될 것 같은데.

“······총감 각하, 지금이라도 제가 건의한 내용을 검토해보시는 게 어떨 런지요.”

타지에서 고생하는 재무부를 도와준답시고 직접 자신을 따르는 변호사들과 행차한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다시 한 번 그 무서운 눈빛을 빛내며 내게 말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 쪽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의 가짜 목을 자른 단두대를 기연으로 삼아 강해진 로베스피에르 의원에게는 내 거절이 와 닿지 않았나 보다.

“각하도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우리 프랑스 곳곳에는 이기심과 탐욕을 가지고 암약하는 개새- 큼큼. 반동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각하!!!”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책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왜, 왜 그러세요?”

“각하, 이걸 봐주십시오!”

“······웬 종이입니까? 여기 적힌 이름들은 다 뭐구요?”

이게 다 몇 명이람, 하나 둘 셋··· 대강 어림잡아 오십은 되겠는 걸.

내 물음에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인사들은 여태껏 각하와 제가 잡아넣은 부패사범들입니다.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은 파렴치한 자들이지요!”

“예에...”

“각 부대에 혁명위원이나 정치장교를 두어 일거수일투족을 엄중하게 감시한다면,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부디 심사숙고해주십시오, 각하!”

“······혹시 낮술이라도 하셨습니까? 독일 맥주가 맛이 있다고 하긴 하지만 너무 과하게 드신 것 같습니다만.”

“전 100퍼센트 제정신입니다, 각하. 혁명위원! 정치장교! 우리 국민방위대에 꼭 필요한 역할 아니겠습니까!”

혁명위원? 정치장교? 뭐야 그거 무서워...

마치 휴전선 너머 괴뢰 무력집단이 할 법한 상상을 입 밖으로 내뱉는 로베스피에르 의원에게, 나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꼭... 그러지 않아도 이미 그런 일을 하는 헌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의원님?”

“각하, 저 또한 헌병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얼마 안 되는 헌병들이 단기간에 부대를 들락날락하는 것보다는 평소에도 정치장교들이 감시하는 체제가-.”

정말 다행히도 로베스피에르 의원의 공세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사환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어...재무총감 각하? 제 4군 사령관 보나파르트 준장님이 오셨습니다만... 바쁘신가요?”

“마침 딱 잘왔···, 아니 이를 어쩐다.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전 선약이 있어서 이만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애초에 군 쪽을 책임지는 사람도 아닌걸요. 차라리 라파예트 사령관님께 건의해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으음... 각하께서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나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는 로베스피에르 의원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외투를 걸쳐 입고 사환에게 말했다.

“보나파르트 준장은 어디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 각하. 대관해놓은 요 앞 찻집에 계십니다.”

***

"야 여기 커피 참말로 맛있고마. 이름이 뭐라고?“

제복군인의 꿈,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 견장을 찬 나폴레옹 형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아인슈패너. 오스트리아 빈에서 많이 마신다던데.”

“그래? 되게 중독성있네...”

“그것보다 굳이 전선에서 여기까지 나올 필요가 있어? 기다리면 곧 마차로 어련히 가져다 줄 텐데.”

“쯧. 병사들이 하도 성화여가지고 내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그렇다 아이가.”

나폴레옹 형은 얼굴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담배 금단현상이 조금... 심하긴 하지?”

“······조금? 그게 조금 심한 거라고? 한 일주일만 더 있으모 금마들 아예 반란도 일으킬 태세다.”

1군, 2군, 3군과 달리 4군은 대부분이 의용병과 지원병으로 이루어진 예비대였다. 밭에서 일하다가, 탄광에서 일하다가,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하루아침에 군인이 된 사람들 말이다.

다들 처음에는 ‘아 나라를 지켜야지’하고 분에 차 총을 들고 일어났지만, 파리에서 적을 물리치고 급박한 상황에서 벗어나니 깨닫게 된 거다.

이 놀 거리 없는 18세기에 취미로 삼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인 담배가, 군대에는 없다는 걸.

“물건은 확실하제? 나 진짜로 빈손에 돌아가모, 두들겨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안 카나.”

“아, 당연히 물건은 확실하지. 게다가 무려 이삭의 민족 수석 개발자 라부아지에와 듀퐁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거라고?”

“······그 양반은 화학자 아이가?”

나는 손가락을 까딱여 예의 그 사환을 불러 얘기했다.

“어제 제 이름으로 파리에서 온 짐마차 있을 텐데, 그것 좀 이리 끌고 와 주세요.”

“예, 각하.”

사환이 카페를 나가고 잠시 후, 마차 한 대가 우리가 앉은 카페 밖에 멈춰 섰다.

나는 카페를 나와 짐마차 칸을 열어 나무 상자 하나를 까서, 그 안에 즐비한 기다랗고 하얀 막대 중 하나를 꺼내 나폴레옹 형에게 건네주었다.

“뭐고. 파이프가 아니라, 막담배네? 이거 독한 거 아이가?”

“괜히 화학자 둘이 달라붙은 게 아니지. 파이프만큼은 아니더라도 정제해서 꽤 깔끔해. 정 의심가면 하나 피워볼래?”

“아니, 그건 별로... 아무튼 물건은 확실한 거 같고마. 수고 많았데이.”

“향후 잠재적 고객님들께서 원하신다는데 당연히 해야지.”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고 사소한 습관을 쉽게 고치지 않는다. 야구 보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야구광들은 항상 신인 대신 몇 년 전부터 보던 투수와 타자가 나오길 원하길 마련.

만약 2만에 달하는 4군 소속 장병들이 이삭의 민족 담배에 습관을 들인다면, 나중에 파리로 돌아온 장병들이 매일 같이 이 담배를 살 터. 아, 생각만 해도 너무 달지 않나? 이 썩을 것 같아!

“큼큼. 그런데, 기욤아.”

“어, 왜?”

한 참 좋은 생각 중이었는데 왜 부르고 그래.

“기욤이 니 혹시 병사들 식사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 같은 거 찾아봐 줄 수 있나?”

“식사시간을 줄인다고?”

“어.”

“······왜?”

“왜긴? 마, 당연히 밥 먹을라모, 병사들이 솥 꺼내서 씻고 물 넣고 끓여야 하는데. 삼시세끼 그 짓을 하면 하루에 세 시간을 날리는 거, 아이가.”

나폴레옹 형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니 그 간편식사인가 뭔가 만들 때처럼, 애들이 행군하면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거 한 번 생각해봐라. 하루에 적어도 10km씩은 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놈의 밥 때문에 다리 잡히는 게 한 두 번이 아이다.”

“으음. 그렇구만.”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뭐, 한 번 방법을 찾아볼게.”

***

1791년 9월 10일.

신성로마제국, 뉘르부르크.

프랑스 국민방위대 제 4군.

“손들어! 아니, 히브 다이넨 한즈(Hebe deine Hands!)!”

이제 일병으로 진급한 필리프는 적을 향해 머스킷을 들고 크게 외쳤다.

“항복! 항복이오!”

그러나 애써 독일어를 외운 보람도 없이 적은 유창한 프랑스어로 필리프를 향해 얘기했다.

“뭐야, 당신들 프랑스어 할 줄 압니까?”

“하, 우린 네덜란드인이요. 두 개 국어쯤이야 껌이지. 그보다 당신들 장교는 어디 있소? 항복하려면 검을 건네야하는데.”

네덜란드인의 말에, 필리프는 뒤돌아서 중대장을 크게 불렀다. 곧, 중대장이 멀리서 뛰어와 용병들에게 모자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프랑스 국민방위대 중위 장 란입니다. 검을 주시지요.”

“자, 여기 있소.”

“좋습니다. 귀하의 항복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 중대 뒤로 아군이 오고 있으니 그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지요.”

“좋소.”

스르릉.

서슬퍼런 소리와 함께 용병의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은, 중대장 장 란의 손에 넘겨졌다.

“필리프 일병, 포로들을 잘 감시하고 있도록. 나는 뒤쪽에 따라붙은 중대에게 말하고 오겠다.”

“예!”

중대장은 검을 다치지 않게 손으로 쥔 뒤, 저 멀리 사라졌다.

“거, 당신네 중대장이 항복도 받아 줬는데 그 총은 좀 내려놓지? 내 심장에 구멍이라도 뚫릴까 무섭소.”

“아, 미안합니다.”

필리프는 총을 다시 어깨에 멨다.

“저... 그런데 네덜란드인이 프로이센군에는 왜 있는 겁니까?”

“왜 있긴? 용병대 처음 보오?”

“······태어나서 지금까지 농사만 짓다보니.”

“농부? 허, 군사강국 프로이센도 프리드리히 그 동성애자가 죽더니 이제는 한 물 갔구만.”

“······그보다 용병이 항복해도 되는 겁니까?”

“딱 보니까 당신들한테 프로이센이 개박살 나던데, 져서 돈도 못 줄 군대를 위해 싸워줄 이유야 없지. 애초에 그 놈들, 우릴 고기방패삼아 뒤셀부르크로 부리나케 도망갔소.”

“······뒤셀부르크가 어디죠?”

“뭐... 저번에 폭동이 한 번 일어났던 본 쪽이라고 하면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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