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라인 강을 향해 (4) (121/341)

라인 강을 향해 (4)

영국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 수상 관저.

“이것 참. 서덜랜드 공작이 큰일을 해주는군요.”

윌리엄 피트 수상은 반가운 소식을 담은 채, 저 멀리 도버해협을 건너온 편지를 내려놓고 찻잔을 들며 말했다.

프랑스 해군은 힘을 잃었다. 지금은 일시적이지만 이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미래에 이탈리아 반도 바로 밑까지 영국 해군이 들락날락 할 수도 있는 좋은 교두보가 될 터.

오래간만에 실로 만족스러운 티타임 디저트였다.

“아, 그러고 보니 해군성과 해군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랑스 해군이 유명무실해졌으니, 앞으로 10년에서 20년 간 온 바다는 우리 영국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각하.”

예순 일곱의 백전노장이자, 먼 미래에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전함에 이름이 붙을 사무엘 후드 제 1 해군경(First Naval Lord)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프랑스로부터 지중해를 양보 받았으니 우리도 뭘 하나 내줘야할 것 같습니다만, 해군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흠... 프랑스가 이번에 프로이센군을 제 땅에서 밀어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젊은 대령이 큰일을 해냈다더군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 이름을 기억해두어야겠군요. 한 20년 뒤에는 그 친구가 프랑스군을 이끌 테니 말입니다.”

노회한 해군경은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전쟁은 젊은 영웅을 낳고, 젊은 영웅은 미래에 그 국가의 대들보가 되는 법.

해군경 후드 또한 7년 전쟁으로 젊은 나이에 영웅이 되었고 지금 거대한 영국 해군을 이끌지 않던가.

해군경은 그 이름은 후에 곱씹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젊은 친구 얘기는 차치하고. 지금 프랑스가 원하는 거라면, 아마도 복수 아니겠습니까. 프랑스의 땅이 불타고 프랑스인이 죽었으니 당연히 프로이센의 땅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겠지요.”

“흠.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해군경.”

윌리엄 피트 수상이 끄덕이며 말하자, 해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한 편에 있는 지도를 향해 걸어갔다.

해군경은 이제 품 안에서 지휘봉을 꺼내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국경을 탁-하는 소리와 함께 가리켰다.

“우리가 프로이센으로 향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열어준다면 프랑스인들에게도 상당히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국경을 열어 준다라... 명분은 괜찮겠습니까?”

“소관이 생각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수상 각하.”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광활한 영토는 모두 신성로마제국의 것. 즉, 프로이센군이 프랑스를 쳤다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이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외교적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본다면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치러갈 때도 길을 열어주어야 할 터.

물론 같은 독일어를 쓰는 프로이센이 제 땅을 지나가는 것과 불어를 쓰는 프랑스가 제 땅을 지나가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영국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해군경의 제안을 들은 윌리엄 피트 수상은 가만히 탁자를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리다가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기야, 프랑스인들이 라인 강을 넘지만 않는다면 굳이 발을 걸고넘어질 필요는 없겠지요. 대륙 국가끼리 싸우면 싸울수록 이득을 보는 건 우리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각하.”

“서덜랜드 공작에게 편지를 붙이도록 하지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해군경.”

“허허, 소관의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음? 소관에게 물어보실 게 남으셨습니까?”

윌리엄 피트 수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군경께서는 이번 지중해 분견함대 사령관으로 누구를 임명하면 좋을 것 같으십니까?”

“분견함대 사령관이라... 하기야 분견대 사령관으로 존 저비스(John Jervis) 그 친구를 파견하기에는 너무 과하긴 하지요.”

기존에 지중해 사령관을 역임하는 존 저비스 장군을 파견하기에, 겨우 열 몇 척으로 이루어질 분견함대 사령관 자리는 너무 작았다.

수상의 물음 때문에 안 그래도 나이 때문에 깊어진 해군경의 이마주름이 또 다시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소관이 예전에 눈여겨본 젊은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마침 그 친구도 임무가 없어 집에서 놀고 있었으니 딱 제격이군요.”

“오, 그렇습니까? 이름이 무엇인가요?”

윌리엄 피트의 얼굴이 활짝 폈다.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이라고, 수상 각하의 친형이신 채텀 경 또한 알고 있는 친구입니다.”

윌리엄 피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 그 자는 술주정뱅이 왕자를 따르는 얼치기 아닙니까? 진급에 목매는 자가 어찌 사령관을 맡는다는 말씀인지...”

“큼큼. 채텀 경께서 말씀하시길, 그 자도 많이 뉘우치고 있다더군요. 한 번 믿어보시지요. 어차피 분견함대는 그리 큰 규모도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윌리엄 피트 수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야아아!!! 모리스 삼촌! 윌리엄 삼촌! 저 재취업 성공했습니다!!!”

빈둥빈둥만 2년째, 영국 노퍽에 살고 있는 한 사내는 마침내 자신에게 날아온 임무통지서를 받고 기뻐서 날뛰었다.

***

1791년 7월 25일.

프랑스 왕국, 파리.

샹 드 마르스 광장.

[재무총감 각하께. 우리 지중해 함대가 지브롤터 항구를 떠나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부디 프랑스의 앞날에 무운이 깃들길 빕니다. - 서덜랜드 공작 -]

나는 영국 대사관에서 온 사환이 건넨 편지를 호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었다.

18세기의 일그러진 혐성, 엄석대 영국과 비밀친구가 되었으니 남은 건 프랑스를 짓밟은 소시지들을 일망타진하는 것 뿐.

알겠냐, 이 남부 소시지야?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뭘 말하는 거지요?”

“우리 신성로마제국의 국경을 넘다니, 이건 명백한 군사적 도발이고 주권침해요!”

“군사적 도발? 주권침해? 어이가 없는데 좀 웃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프랑스군 정찰대가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에, 급하게 마차를 잡아타고 달려온 주재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대사 플로리몽 클로드 씨의 말을 상큼하게 씹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댁들이 프로이센 놈들에게 국경을 열어줘서 우리 프랑스를 침공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

“플로리몽 클로드 대사님. 프랑스인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라구요?”

“프로이센과 같이 죽기 싫으면 당장 클레베(Kleve)로 가는 길이나 여시지요.”

“무, 무슨... 이건 협박입니다!”

“뭐. 마음대로 받아들이시길. 그보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방해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오스트리아인을 뒤에 놔둔 채, 단상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하는 법.

나는 부사관이 들고 있는 나무함에 손을 넣어 훈장을 꺼냈다.

흠. 왕당파를 박살내고 받는 훈장에 왕당파의 상징인 금색 백합무늬가 달려있다니. 이런 게 아이러니인가. 로베스피에르 의원이 보면 바로 훈장 모양을 바꾸자고 난리를 치겠어.

어, 그러면 이거 되게 희귀해지는 거 아닌가. 한 수 백년 지나면 거의 억대는 되겠는데? 폐지한다고 하면 몇 개 빼돌려서 금고에 넣어놔야겠다. 나는 아니더라도 후손 중 누군가한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

“큼큼. 각하?”

“아, 미안합니다. 잠시 생각을 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예, 각하! 중위 장 란입니다!”

나는 훈장을 중위의 왼쪽 가슴팍에 조심스레 꽂아주며 말했다.

“장 란 중위님, 앞으로도 국민들을 위해 변함없이 봉사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재무총감 각하!”

장 란 중위를 시작으로, 나는 쭉 일렬로 도열한 군인들의 가슴팍에 하나씩 훈장을 꽂아주었다.

병사, 위관, 영관까지.

하나 둘, 컴컴한 나무함에서 나온 백합이 쾌청한 여름 하늘의 빛을 받아 황금빛을 내기 시작했다.

“대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국민과 파리를 지켜낸 귀하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생 루이 훈장을 수훈하겠습니다.”“예, 각하. 감사합니더!”

나는 나폴레옹에게 훈장을 달아준 뒤, 조그마한 목소리로 슬쩍 말했다.

“이야 아주 입 찢어지겠어?”

“어, 티나나?”

“입이 아주 광대뼈에 걸리셨는데 어떻게 티가 안나?”

“큼...”

영관급 장교의 마지막인 나폴레옹 다음으로, 나는 여기 나온 장성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흐음.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그런가? 머리가 전보다 더 훤해지셨네. 조만간 가발 하나 선물로 사드려야겠어.

“이야 영웅의 품격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요? 신수가 아주 훤해지셨습니다. 뒤무리에 장군님.”

“예에...”

“아니. 왜 그렇게 추욱 쳐져 계십니까? 6만 명의 프로이센 군대로부터 낭시를 지켜낸 우리 국민방위대의 영웅! 프랑스 민중의 수호자! 방어의 사자! 뒤무리에 장군님 아니십니까.”

“······허허.”

흠. 소문으로는 낭시를 지키느라 수십 년간 모은 전 재산을 탕진했다고 하던데, 이 반쯤 정신이 나간 꼴로 봐서는 사실인 것 같다.

역시 애국자! 패트리오트! 살신성인!

나는 뒤무리에의 가슴팍에 훈장을 달아주며 말했다.

“자. 장군님. 너무 그러지 마시고. 좋은 날 아닙니까, 좋은 날!”

“좋은 날...허..허...”

제 가슴에서 번쩍이는 훈장을 본 뒤무리에는 쓴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 볼 뿐이었다.

다음은...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웃음을 교환했다.

“······우리 프랑스 인들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국민을 지키는 군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총감.”

나는 훈장 두 개를 꺼내어 하나를 라파예트 사령관의 가슴에, 하나는 라파예트 사령관의 손을 향해 건네주었다.

“이건 켈레르만 장군님께 사령관님이 직접 달아주시지요.”

“하하. 지금껏 받았던 어떤 훈장보다 값진 것 같군요. 물론 이것도 백합 무늬긴 하지만.”

라파예트 사령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령관님.”

“예, 총감.”

“모든 장애물은 제가 모두 치워놨습니다.”

영국도 꼬셔놨고, 국경도 활짝 열었으니. 이제 남은 건 라인 강을 따라 북쪽을 향해 주파하는 것 뿐.

“프로이센 클레베까지 달리시면 됩니다.”

“그 명령, 기꺼이 수행하지요.”

나와 라파예트 사령관은 서로 손을 마주잡았다.

***

1791년 7월 30일.

프랑스왕국, 메츠.

불과 두 달 전까지 프로이센의 하얀 바탕에 검독수리가 수놓은 깃발이 펄럭이던 메츠의 시청에는, 이제 프랑스왕국의 삼색기가 걸려있었다.

“좋습니다, 제군들. 모두 파리에서 메츠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결연한 표정이 사령부에 모인 모두의 얼굴에 감돌았다.

“1군 사령관은 켈레르만 장군, 2군 사령관에 뒤무리에 장군. 3군은 내가 직접 지휘합니다. 나폴레옹 준장은 4군을 맡아 예비대를 형성합니다. 다들 알겠습니까.”

“““예! 사령관 각하!”””

“프랑스의 땅과 물, 사람들을 유린한 값을 치러줍시다.”

프랑스의 검이, 드디어 국경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