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강을 향해 (3)
“······그러니까 프랑스는 현재 지중해에 내보낼 해군전력이...”
“예, 하나도 없습니다. 정 궁금하시다면 직접 툴롱 항구를 방문해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마침 제 고향이 툴롱 옆이니 겸사겸사 제 고향집에서 잠까지 주무시면 되겠군요.”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각하. 생각을 좀···.”
“물론입니다.”
비록 코도 뚫지 않았고 빡빡이도 아니지만 나는 충분히 관대하다고.
나는 팔짱을 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영국인 대사의 얼굴이 당혹감 때문에 실시간으로 발갛게 변하는 모습을 관람했다.
공짜 점심은 없다. 어떠한 편익을 얻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내야한다.
얘야, 본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아니, OO씨. 조별과제인데 발표일까지 잠수 타시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동무. 다른 동무들은 모두 집단농장으로 일하러 갔는데, 동무는 왜 여기 있소? 설마 또 배탈이오? 이야 벌써 일주일 째 배탈이 나는 게 말이 되니, 이 간나새끼야? 아오지 탄광으로 가고 싶간?
저명한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부터, 우리 조상님들, 평범한 대학생, 심지어는 북돼지를 숭상하는 불법무력집단에 이르기까지 전 인류가 나이, 성별, 사상을 넘어 공유하는 가치가 있다면 바로 ‘공짜로 업혀가기’를 굉장히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영국 댁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려고 해? 아 그건 절대 안 돼지.
우리가 육지에서 쌔빠지게 구르면 그쪽도 바다에서 쌔빠지게 굴러봐야 하지 않겠어? 돈도 많은 놈들이 어디서 꼴 받게 무전취식이야?
“공작님. 지금도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하실 것 같지만,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제안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제안이신지요, 각하?”
서덜랜드 공작은 날 향해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우선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제 식견으로는 지중해에 만약 러시아가 들어온다고 치면, 영국에게도 그리 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까?”
“음...”
서덜랜드 공작은 말없이 신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거 이미 볼 장 안 볼 장 다 본 사이에 뭐 그렇게 숨기려고 하시나? 어린 아이도 아는 사실인데.
프랑스는 대륙국가다. 프랑스에게 바다는 돈 줄이 오고가는 길에 불과하다. 바다를 봉쇄하면 프랑스의 경제에 타격을 입힐 수는 있어도 숨통을 끊지는 못할 터.
그러나 해상국가인 영국에게 바다가 봉쇄되었다면? 영국에게는 국가의 생명이 달린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게 바로 바다다. 영국은 밧줄에 의해 목이 졸리는 것이나 다름없을 터.
게다가 애초에 영국이 유럽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인 해군력과 경제력도 모두 바다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나.
대서양과 북해, 지중해와 인도양을 위시한 막강한 해군력으로 안정적인 무역업을, 그 안정적인 무역업을 통해 시티 오브 런던의 금융업 발달을, 그 발달된 금융업을 가지고 세계 각지에 투자를 통해 패권을 굳히는 게 바로 영국이 가진 외교정책 그 자체다.
물론 순전히 그것만 하면 괜히 프랑스, 스페인, 독일, 심지어는 러시아인까지 영국을 교양 없는 해적새끼들이라고 혐오할 이유가 없지.
자국 상선 옆을 지날 때는 군함이지만, 타국 상선 옆을 지날 때는 해적선이 되는 게 바로 영국 해군이다.
더러운 새끼들. 이삭의 민족 화물선 한 대가 영영 르 아브르 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도 다 니네 짓이지?
아무튼 영국 입장에서 바다는 곧 탯줄이라고 할 수 있는 요충지 중의 요충지다. 뺏겨서도 안 되고 끊겨서도 안 되는 것.
그런데 지중해에 러시아 해군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 내가 영국인이면 돌아버릴 걸.
“공작님. 딱 까놓고 말해서, 지중해는 이미 기존에 한 자리 씩 차지한 나라들만으로도 좁아터진 곳 아니겠습니까. 동쪽에는 오스만, 중앙에는 이탈리아와 우리 프랑스, 서쪽에는 스페인까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새로운 참여자 따위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서덜랜드 공작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승부수를 던질 차례다. 우리 고객님께서 마음이 아주 싱숭생숭해보이시는데, 이걸 놓칠 수야 없지.
“영국 지중해 함대를 몰타까지 전진배치 시켜주십시오.”
“······제가 잘못 들은 거지요, 각하?”
“절 무슨 미친놈 쳐다보듯 보시는군요.”
“······죄송합니다. 제안이 제안이다 보니...”
몰타.
지중해의 한 가운데 박혀있는 거대한 섬이자, 지중해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충지 중의 요충지.
“······프랑스 입장에서는 지중해에 우리 함대가 늘어나서 좋을 건 없을 텐데요, 각하.”
“지중해요? 글쎄... 뭐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분하던 아니면 끙끙 앓던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배는 있지만 그걸 운용할 사람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것만 한 세월일 테고, 또 재건한다고 쳐도 처음에는 예전 같지 않을 숙련도일 게 분명할 테다.
사람이 불가능한 일에 맞닥뜨리면 해탈한다고 하지 않나.
지중해? 아 글쎄, 우리는 잘 모르겠다니까? 니들이 막던가 말던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이 제안은 각하의 제안입니까, 아니면 프랑스의 정식 제안입니까?”
“어느 쪽이던 둘 다 상관없으실 것 같습니다만?”
“······.”
내 말에 서덜랜드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프랑스 해군이 속 빈 강정인 걸 알아버린 이상, 영국은 러시아 해군이 지중해로 나오는 걸 넋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거다.
아는 것 보다 때로는 모르는 게 상책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생각할 시간을 드릴까요, 공작님?”
“조금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각하.”
“담배 잠깐 필 테니 그 동안 생각하시지요.”
나는 파이프와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다시 또 한 모금.
내가 수차례 니코틴을 빨아드릴 동안, 우리 두 사람이 있는 사무실 안은 너무나도 고요한 나머지 누군가 밖에서 엿듣고 있다면 내 파이프에 담긴 담뱃잎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듯 했다.
“······공작님, 아직 멀었습니까?”
벌써 잎이 다 타들어갔는데 아직도 생각 중이신가.
“후우... 장담드릴 수는 없지만...”
“그러면 하지 마십시오. 공작님. 전 ‘장담할 수 있을지 없을지’보다는 ‘단언’을 원합니다.”
탈레랑 의원이 한 말. 외교관은 된다고 하면 ‘고려해 보겠다.’는 말이고, 고려해보겠다는 ‘안 된다.’는 말이라고 했었지.
어딜 장사하는 집까지 쳐들어와서 땡전 한 푼 안주고 그냥 걸어 나가시려고? 예전에 들은 바로 워렌 버핏과 한 끼 하는 값은 1억 원이라던데 대충 그에 상응하는 값은 내놓으셔야지.
“······단언코, 각하의 제안을 받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공작님.”
우리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
[1791년 6월 27일, 오늘의 날씨는 상당히 좋다. 뜨거운 여름 해를 구름이 나타나 가려주어, 병사들도 나도 꽤나 움직일만해서 다행이다.
오후 중에는 사령부 지시로 몇몇 프랑스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찾아가 통역을 맡았는데, 프랑스 인들이 말하길 우군이 아미앵 근처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기욤 드 툴롱 총감에게 패했다고 했다.
라파예트를 밀어내고 발미를 얻은 것은 좋으나, 이대로라면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돌아갈 지는 의문이다.]
[1791년 6월 30일. 온 종일 해가 내려쬐기 시작했다. 결국 경상을 입은 탓에 날 경호해주는 역으로 배정받은 하베르트 중사와 나는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길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메츠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에는 적어도 수 달은 걸린 것 같은데, 다시 그 길을 돌아가야 한다니 생각이 상당히 깊어지는 듯 하다.
내 글에 나오는 파우스트 또한 연옥에서 이런 길을 걸었을까. 비록 선제후님과 나는 압제자들에 의해 실패했지만 아직까지 프랑스인들은 그 압제자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아니라 기욤 총감 그 분이 파우스트 같은 사람 같군.]
[1791년 7월 4일. 온 사방에서 적이 후퇴하는 우리를 향해 몰려든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물론 있었지만, 총 하나를 꼬나쥐고 우리에게 달려 든 민간인 복장의 민병대도 있는 듯 하다.
메츠까지 가는 길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같은 저항은 예상하지 못한 듯.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께서는 심려가 깊은 모양이다.]
[1791년 7월 24일. 날씨는 나름 견딜만하다. 그것보다 프로이센군이 메츠를 내주고 우호국인 신성로마제국 영토로 물러났다. 아마 적들도 이 이상은 추격하지 못할 듯 싶다. 프랑스인들이 국경을 넘는다면 중대한 도발이 될 테니.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금치 못하겠다.
비록 프랑스인들이지만 그래도 이 독일인 억압자와 압제자들이 그들에게 패배한다면 나름 이 소설의 결말도 괜찮은 결말이 될 수도 있으리라.]
프로이센군의 종군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일기장에서 펜을 거두었다.
그러나 괴테가 펜을 거두자, 그의 사각사각하는 소리만이 내내 들리던 막사가 조용해지는 바람에 또 다시 불쾌한 고요만이 막사를 감돌았다.
고요가 불쾌한 것인지, 아니면 패배에서 비롯된 고요는 항상 불쾌한 것인지.
병사들은 온 종일 의미 없이 머스킷을 손질할 뿐, 그 누구도 이 고요를 깨뜨리고 싶어 하지 않아했다.
장교들은 더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업적을 잇는다는 그 영웅심에 뛰쳐나갔던 장교들은 죄다 프랑스 민병대의 총이나 날붙이에 한 군데 씩 부상을 입고 제가 꿈꿨던 이상과 다른 현실에 조용해지기 마련이었다.
가장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건 용병들.
프로이센의 재정이 정복전쟁 때문에 엉망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기름진 땅인 프랑스를 공격하여 승리한다면 상당한 부를 얻을 수 있기에 용병들은 이번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연이은 패전과 후퇴 때문에 약탈도 못한 민가들을 수차례 지날수록 그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마 돈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괴테는 눈을 옮겨, 아직까지 불이 꺼지지 않은 사령부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로 퇴각한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사령부에서 연신 장교들을 모아놓고 러시아군의 참전이 늦어지는 걸 닦달했다.
러시아에서 여기까지 올 수는 있는 건가.
러시아군은 언제 오나.
프랑스 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젊은 위관 장교들만 불쌍하게 된 일이었다.
“으음.”
괴테는 신음을 삼켰다.
안타까운 모습 때문에, 그러나 한 편으로는 또 잘된 일 아닌가 싶기도 마음에.
비록 괴테 자신과 막시밀리안 선제후께서는 실패했지만 기욤 그 분이라면 진정 독일인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선물할 수도 있으리라.
다음날, 괴테는 한 줄의 문장을 일기장에 더했다.
[1791년 7월 25일. 프랑스군이 국경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