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강을 향해 (2)
“자...됐다! 이 정도면 중간에 풀려서 떨어지진 않겠지.”
난생 처음 군장이라는 걸 자기 손으로 싼 제 3지원병대대 소속의 필리프 이등병은 흐뭇한 표정과 함께 쭈그려있던 다리를 피고 일어났다.
군장 싸는 법보다 목숨을 건 전투를 먼저 치르다니. 무언가 많이 어긋난 필리프의 군생활이었지만 일단 살아남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 아니겠나.
사령부와 막사가 자리 잡은 곳이 언덕인 탓에, 허리와 다리를 피고 곧게 서자 격전이 펼쳐졌던 빌레르-보카주 일대가 필리프의 눈동자에 담겼다.
불과 며칠 전. 저 전장 한 가운데 자신이 있었다니, 필리프는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았다.
포화로 깊게 파인 구덩이, 갈가리 찢겨져 나간 깃발, 땅에 임시로 매장한 적과 아군들 위에 나뭇가지를 베어내 단출하게나마 세운 십자가들까지.
수많은 생명이 쓰러졌다는 흔적이 온 세상에 즐비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살아남았다.
아직 한창 여름인데도 팔을 타고 우수수 돋은 닭살이 바로 그 증거였다.
“필리프! 다 끝났으면 노닥거리지 말고 오와 열 맞춘다!”
“예, 예! 장 란 소위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시민이었던 소위의 닦달에, 필리프는 황급히 군장과 총을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장교가 되면 저렇게 까탈스러워지는 건가? 아마 지금쯤 파리에서 한참 만들어지고 있을 자신의 군복에 이등병 작대기 하나만을 달고 있는 필리프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 3지원병대대! 지금부터 파리를 향해, 앞으로 가!”
“““앞으로 가!”””
그러나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자유여, 사랑하는 자유여! 그대의 수호자와 함께 싸우라!”””
파리에 가면 따듯한 목욕물과 맛있는 밥이 있다는 것.
***
프랑스왕국, 파리.
그르넬흐 거리, 이삭의 민족 사무실.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각하! 오셨군요.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게 몇 달 만인지 원!”
“······아, 예에...”
나는 나보다 띠동갑하고도 한 살을 더 먹은 외교관, 조지 레비슨 고워 서덜랜드 공작이 건넨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파리로 온 나를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게 프랑스인이 아니라 영국인일 줄이야. 이것 참 상상도 못한 정체인걸.
그래 뭐... 일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일주일 넘게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야전 짬밥만 먹은 사람한테는 인간적으로 하루 정도 휴일을 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우선 각하의 승전을 영국을 대표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영국 특명전권대사께서 여긴 왜...?”
“하하하, 당연히! 혁명정부와 우리 영국 간의 ‘특별한 관계’를 위해 이렇게 찾아뵈었지요.”
“하하, ‘특별한 관계’라...”
이거... 단순히 축하해주러 온 사람이라기에는 눈이 영 표독스러운 이유가 있었구만.
귀찮은 일, 특히 외교는 딱 질색인데 말인데 어쩐다? 문명하고 삼국지 할 때 죄다 정복승리만 하지 말고 외교승리도 좀 해볼걸. 이리저리 얽히고, 섥히고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외교적인 일이라면 저보단 르브렁 장관님에게 찾아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각하의 말씀은 지당하나, 행정부 대표 되시는 분이라면 외교실무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역시 외교관. 무슨 말을 하던 꼭 나와 얘기를 하겠다는 의지가 말 속에 가득 보이는 걸.
결국 나는 서덜랜드 공작에게 두 손바닥을 보여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어휴 저 저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봐라.
“본국 외교부와 수상께서는 이번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행보에 심히 우려를 표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역시 심각할 정도의 밸런스 중독자 영국. 유럽이 제가 짠 판대로 안 흘러가는 게 아니꼽다 이건가?
“총감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영국인들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으음. 그러시군요.”
이야 불과 얼마 전에 뱅골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지금은 인도를 차근차근 식민지로 만드시는 분들께서 평화를 운운하시다니. 이 정도면 경의를 표할만 하다. 면상에 철판을 어느 정도로 깔아야 저렇게 얼굴색하나 안변하고 말을 한담?
나는 ‘아하, 뱅골을 호로록 빨아먹고 대서양 해적들을 돕는 것도 평화로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행정부 대표로서 그 불량한 마음을 꾹 참아내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 또한 영국처럼 세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국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온 프랑스인들을 대표해 말하자면, 우리 프랑스인들의 첫 번째 소원은 평화요, 두 번째 소원도 평화요, 세 번째 소원도 평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도 영국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하하. 역시 우리 영국과 프랑스가 과거에 반목하기는 했어도, 역시나 이 세상에 가장 문명화된 두 나라 사람들답게 원하는 바도 꼭 닮았군요.”
“하하하.”
“하하하.”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면서 찻잔을 기울였다.
차를 마신 후,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서덜랜드 공작이었다.
“각하. 각하께서는,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다들 법을 지키고 살면 그게 평화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하. 각하의 말씀대로 법을 지키고 산다면, 다들 행복하게 살다갈 수 있겠습니다만... 사업가 출신인 각하께서도 아시듯, 현실이란 게 그렇게 녹록치 않잖습니까.”
“뭐... 그렇지요.”
“물론 각하께서 법을 어기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국인들은 각하께서 우리 영국의 법을 존중해주셨다는 점을 굉장히 높게 평가합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 속에 각하처럼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는 사람은 몇 없으니 말입니다.”
기사도 정신? 내가 영국 법을 지킨 적 있던가...?
아 설마.
“혹시 제임스 와트 사...?”
“그렇습니다. 시티 오브 런던의 금융가와 사업가들 모두, 외국인 중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각하를 뽑더군요.”
서덜랜드 공작은 외교관 특유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적당히 타협하면 양 쪽 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사관학교 출신이시라더니 역시 기사정신이 투철하시군요!”
그을쎄...? 기사정신이라기보다는... 내가 피해자로 당한 좆같은 일을 가해자가 되어 행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데.
서덜랜드 공작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평화관을 들었으니, 이제 우리 영국 외교부 차례군요. 우리 영국인들이 생각하기에 평화란 다들 고만고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런 세상에 함부로 적을 만들었다간 적과 자신이 공멸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욜 다 같이 손잡고 하하호호하는 세상을 꿈꾸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싸우면 다 같이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세상을 꿈꾸다니, 역시 혐성국이나 할 만한 발상.
이라고 하고 싶지만 원래 21세기도 저랬었지. 핵폭탄이란 게 없을 때는 서로 1차대전이니 2차대전이니하면서 미친 듯이 치고받다가 서로 핵탄두를 가지게 되니 서로 입은 털어도 싸우질 않더라.
“상당히 현실적인 생각이시군요, 공작님.”
“하하, 그렇습니까? 외교부의 일원으로서 알아주시니 흡족하군요!”
서덜랜드 공작은 또 다시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본국 외교부와 수상께서는 이번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행보에 심히 우려를 표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각하께서도 알다시피, 폴란드는 중유럽의 균형추였습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모두를 견제하고, 또 감시하기 적합한 국가였지요.”
그러고 보니 유럽의 밸런스 성애자 입장에서는 그 폴란드가 없어져서 상당히 아쉽겠어? 그렇다고 러시아나 프로이센 같은 강국과 척을 지기도 힘들겠고.
“그러나 그 폴란드는 이제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포즈난도 잃고 그단스크마저 잃어, 이제 바르샤바만을 가지게 될 폴란드를 도시국가라면 몰라도 정상적인 국가로 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야 뭐...그렇지요.”
서덜랜드 공작은 이제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영국과 토리당은 이번 사태로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전제군주정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음.”
“생각해보시지요, 각하. 명백히 의회가 존재하여 국왕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우리 영국과 차르인 예카테리나 2세가 마음먹은 대로 휘둘리는 저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말입니다.”
확실히 러시아가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날린 건, 무슨 대단한 국민적 감정 때문이 아니라 차르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지.
뭐? 농노가 글을 읽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 끔찍한 미래 좋아하네. 댁네 나라 나중에 공산빡빡이랑 공산콧수염한테 망하거든? 나중에는 농노가 정치를 한다고!
“······영국은 우리 프랑스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각하. 프랑스도 이제 녹디 녹슨 전제군주정에서 탈피해 우리 영국처럼 의회가 이성과 지성으로 이끄는 나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 유럽에서 우리 두 나라만큼 문명화된 나라는 없을 겁니다.”
아, 이제 개인의 기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이성을 중시하는 의회가 있으니 대화로 타협을 볼만하다 이건가? 아니면 폴란드 대신 우릴 러시아와 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는 카드패로 쓰겠다는 건가.
안 봐도 후자겠지.
“이런 얘기를 꺼내신 걸 보니, 영국에서 대화를 통해 우리 프랑스에게 무언가 얻고자 하는 게 있군요.”
“하하, 역시나 예리하십니다.”
서덜랜드 공작의 눈빛이 바뀌었다.
“전에도 한 번 르브렁 장관께 말씀드린 바 있지만, 부디 라인 강은 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라인 강이라...”
영국은 우리가 프로이센을 끝장내고 그 땅을 집어삼킬까봐 두려워하는 건가.
서덜랜드 공작은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날 향해 두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프로이센군이 물러났으니 프랑스로서도 이제 보복전에 나설 차례지요. 프랑스가 불타고 국민이 죽었으니 당연합니다. 허나, 라인 강을 넘으신다면 우리 영국으로서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프랑스의 힘이 너무 커질 걸 우려하시는군요.”
“이것 참. 각하께서 화법이 직설적이라고는 들었습니다만, 예상한 것 보다 더 아프게 찔러 들어오시는군요.”
“서로 능구렁이처럼 구는 건 제 성미에 안 맞아서 말입니다.”
“흠, 그렇다면 저 또한 그에 맞춰 직설적으로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각하.”
공작은 내게 몸을 기울였다.
“라인 강을 넘으신다면, 우리 영국은 프랑스가 영토 확장을 원하는 것으로 알고 루이 14세 시절처럼 귀국을 대하겠습니다. 확실한 적국으로 말입니다.”
“······적을 추격하느라 잠시 라인 강을 넘는 건 괜찮습니까?”
“적을 격파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라인 강을 넘어 점령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한 가지 더.”
한 가지 더? 우리가 니들 따까리야?
“······이미 타국의 외교관으로서는 상당히 과한 요구 같습니다만.”
서덜랜드 공작은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입을 열었다.
“아,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사죄하겠습니다. 다만 이건 방금 같은 경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프랑스에 도움이 되는 말이지요. 우리 주재 러시아 영국공사관 쪽에서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사이에 종전협정이 맺어졌다고 합니다. 오스만이 크림반도를 할양했다더군요.”
“······러시아군이라.”
소시지를 밀어냈더니 이제는 보드카와 싸워야하는 거야? 미치겠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각하. 러시아군이 육로로 프랑스의 국경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전쟁준비에만 1년 이상 걸릴 겁니다.”
“‘육로로’라면... 해로로도 올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해로요? 하하하! 농담도 참!”
“······?”
뭐야 광증이라도 돋으셨나? 왜 이렇게 끅끅대셔.
“프랑스가 가진 해군력은 우리 영국 다음 아닙니까!?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지중해로 나온다고 해도 프랑스 함대에게 한 주먹거리도 안 될 텐데요. 큼큼. 뭐, 정 신경이 쓰이신다면 북해나 대서양의 함대를 불러들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새끼 보소. 북해나 대서양 함대를 빼는 건 어떻냐고? 아주 거길 영국 니네 바다로 삼게 해주면 안 되겠냐고 대놓고 물어보지? 우리가 그 함대 빼면 니들이 가만히 있겠냐.
북해 함대는 프랑스 북부와 파리, 대서양 함대는 프랑스의 무역수지를 책임지는 카리브해와 대서양의 섬들을 지키는 함대다. 괜히 탈영안한 수병들과 장교들을 모아서 그 두 함대에 처박은 게 아니란 말이다.
“흠흠. 실례했습니다, 각하.”
“전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저 봐라, 자기도 말해놓고 찔리는 지 사과하지 않나.
그나저나... 프랑스 해군력이 영국 다음이라고? 아 뭐... 영국 다음이긴 하지. 해군장교들이 탈영만 안했다면.
“서덜랜드 공작님과 영국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우리 혁명정부가 지금 당장 지중해에 가용할 수 있는 함대는 없습니다.”
“······예?”
“우리 프랑스 해군은 지금 선원도, 사관도 없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아 해군 장교들이 다 도망갔다니까?
“툴롱 항과 마르세유에 정박한 배들 중 움직일 수 있는 배는 10척도 안 될 겁니다.”
“······그 말씀은...”
“흑해 함대, 우린 못 막습니다.”
서덜랜드 공작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뭐, 우리가 공짜로 니들 대타 뛰어줄 거 같냐?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이 새끼들아. 해적 새끼들 아니랄까봐 상도덕이 없어요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