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나 (6)
“지원병대대 앞으로!! 귀족 놈들의 심장을 도려내라!!”
“““우아아아!!”””
뿌우우우-
혁명군 군악대의 나팔이 빌레르-보카주 앞을 가득 메웠다.
서쪽에서 날아든 묵직한 나폴레옹의 망치가, 보기 좋게 모여 있는 왕당파군 우익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혁명군이다! 우익은 당장 방진으로 대형을 바꿔라!! 그래봤자 적은 민병대다! 사격실력에서는 우리가 무조건 우위란 말이다!!”
“악!! 내 눈!!”
“햇, 햇빛 때문에 적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뭐, 뭐?”
정오를 넘어 서쪽으로 이동한 환한 태양빛이, 왕당파군의 눈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적을 제대로 조준하고 쏠 수가 없습니다!”
“쏘라고! 쏴!! 그냥 쏘란 말이다!”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까, 아니면 엄한 군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일까.
아마 전자이리라.
이곳에서 지면 더 이상 제 목숨의 값으로 내밀 수 있는 게 없을 테니.
결국 말을 탄 왕당파 장교들은 빛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는 병사들의 뒤통수를 군홧발로 연신 두들겨 패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이 씨발!! 쏘라고!! 적군이 이렇게나 많은데 누군 맞겠지!”
“이...익!! 에라 모르겠다!”
타타탕!!
그러나 전열의 대부분이 애써 눈을 찡그린 채 쏜 총알은, 나폴레옹의 망치를 맞추기는커녕 애꿎은 맨땅에 제 몸뚱어리를 가져다 박았다.
“1, 1열 사격 끝! 2열 사격 개시! 이번에는 제대로 겨누고 사격한다!”
“앞,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아...”
타타탕!!
그러나 같은 환경에서 시도한 결과가 달라질 리가. 두 번째 사격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네 번째 사격에도, 또다시 불운한 흙덩이만이 총알을 맞고 하늘을 향해 튀어 올랐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제 몸을 땅에 가까이 뉘이면서 왕당파의 눈을 향해 더더욱 많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할! 전부 총검 들어! 검을 뽑아라!! 백병전으로 밀어낸다!!”
“예!”
“지금까지는 혁명군 놈들이 알량한 속임수로 우릴 속였지만, 지금 맞붙는 놈들은 정말로 민병대다! 백병전으로 우리가 질 리가 없다!!”
왕당파군은 검을 빼들었다.
역도들은 이미 가장 큰 전력인 숙련병이라는 카드를 함정으로 사용했다.
비록 그 함정에 빠진 왕당파군이었지만, 그것으로 숙련병이 소모되었으니, 지금 망치 겸 휘둘러지는 적은 무조건 민병대일 터.
괜히 이 세상에 오합지졸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민병들은 제 옆자리 한두 명이 목숨을 잃는다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할 게 뻔하다.
전쟁에 익숙한 정규군과 용병대 출신의 왕당파군이 백병전에서 이제 갓 징집된 민병이 붙는다면 응당 왕당파군이 압도할 게 분명하지 않겠나.
그러니 합리적이고 정석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싸우는 이유를 깨닫고 기꺼이 총을 든 자들이 가진 분노와 투쟁심이 얼마나 강한 지, 그들은 너무나도 고귀한 신분이기에 결코 알지 못했다.
***
근육이 기억하면 뇌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행동한다고 하던가.
필리프는 며칠 동안 그 지옥 같은 체조를 하며 몸에 강제로 습득되다시피 한 제식대로 눈앞의 적의 목을 향해 총검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죽어! 죽어!”
“끄륵...끄르륵...”
빌려 입은 하얀 정규군 군복 곳곳에 피가 촥-하며 튀고, 목이 찔린 왕당파군 용병의 목에서 나는 피 끓는 가래소리가 총 몸을 타고 필리프의 손을 찌르르-울렸다.
방금 전까지 살기등등했던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히...히이익!!”
난생 처음으로 생명의 불을 꺼트린 필리프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소리가 주의를 끌은 것 인지, 필리프가 찌른 적의 뒤에서 적 하나가 더 튀어나와 필리프를 향해 총검을 치켜세우고 달려 나왔다.
“Sterben!”
프랑스인인 자신이 알아먹지 못할 이상한 말을 하며 달려드는 걸 보니 아마 독일인이나 스위스인 용병인 듯 싶었다.
필리프는 서둘러 총검을 막기 위해 손에 쥔 총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목에 깊숙이 박힌 총검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어, 어?! 으아아!!”
필리프는 눈을 꽉-하고 힘껏 감았다.
‘씨바알! 이렇게 죽는구나!’
탕-!
그 순간 한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필리프는 한껏 찡그렸던 얼굴을 풀고, 눈을 천천히 떴다.
“억! 어억...”
“병사! 정말로 죽고 싶나! 정신 차려!”
방금 전까지 필리프를 향해 검을 찔러오던 적은, 가슴 한 가운데 총상을 입고 바닥에 절퍼덕 엎어졌다.
그리고 필리프의 곁에는, 한손에는 피가 묻은 검을, 한 손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권총을 든 채로 옆 중대의 중대장이 서있었다.
“3...3중대장님?”
“그래! 나 장 란 소위다!”
필리프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3중대장님이 왜 여기...”
“왜나고? 너네 중대장이 방금 죽어버렸거든! 이제 2중대도 내 지휘에 따른다! 알겠나!”
“중, 중대장님이...”
다른 곳도 아니고 파리 소르본 대학을 다닌다던 그 똑똑이 중대장이 죽었다고?
이건,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으..으...”
“이봐! 이봐! 병사! 야이 미친 새끼야! 정신 차려! 너도 여기서 너희 중대장처럼 세상 하직하고 싶나!”
“어억!!”
3중대장, 장 란 소위는 있는 힘껏 필리프의 등허리를 군홧발로 찼다.
갑작스러운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 필리프는, 결국 가출했던 정신을 다시 몸으로 돌려보냈다.
“아, 아닙니다! 장 란 소위님!”
“그러면 씨발 네가 뒤지기 전에 저 돼지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란 말이다! 저 돼지들이 이 프랑스를 다시 옛날로 돌려놓겠다지 않나! 병사는 혹시 귀족들이 떵떵거리던 옛날이 그리운 건가!”
그 옛날이 그리워? 농사를 지으면 십 분지 구를 세금으로 떼어가던 그 때가? 아직도 그 영주 놈 얼굴만 생각하면 열불이 나는데?
필리프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턱을 억지로 움직여 크게 소리쳤다.
“아닙니다아악!!!”
“그래? 그러면 네 놈 앞에 서있는 저 놈들은 누구로 보이나!”
장 란 소위는 검으로 저 멀리 왕당파군을 가리켰다.
“왕, 왕당파입니다!”
“그래! 우리 살을 좀먹던 왕당파들을 족칠 기회인데, 병사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질질 짜며 날려버릴 건가!”
“아닙니다아악!!”
“그래?! 그러면 돌격해라! 돌격!”
“으아아아아!! 돌겨어억!”
필리프는 절명한 왕당파군의 목에서 총검을 뽑아 다음 상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 돼지 같은 새끼들! 죽여버리겠다아아!!”
아까와 달리 이번엔 필리프의 손이 떨리지 않았다.
***
“장전!”
“발포!”
콰쾅!!
남은 판돈, 4천명을 추가로 베팅한 나폴레옹의 도박수가 제대로 빛을 발했다.
방금 전까지 혁명군을 쏘던 대포가, 이제는 방향을 틀어 왕당파를 향해 불을 뿜었다.
대포가 쏜 묵직한 철탄이, 뭉쳐있는 적의 중심부를 데구르르 구르며 그 경로에 있던 불운한 병사들의 다리를 날려버렸다.
“명중! 제대로 적의 중앙을 뚫었습니다!”
“좋아! 차탄 준비!”
“차탄 장전!”
“장전 끝! 발포!”
콰쾅!
“이번에도 명중입니다, 중사님!”
“표적지가 싸그리 모여 있는데 당연하지! 왕당파 돼지 새끼들, 봉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온갖 일에 부려먹더니 꼴 좋구만! 자, 우리가 쉬는 순간 아군이 죽는다! 다시 장전!”
“예!”
왕당파의 포대를 탈취한 혁명군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 내가 귀신에 홀린 건가? 아니면 전쟁이 원래 이렇게 쉬운 거였나... 젠장, 도저히 모르겠군.”
망원경을 들어 포탄 위치를 관측하던 앙투안 드제 대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마치 어린아이 팔 비트는 것처럼, 보나파르트 대령은 왕당파 군대를 농락하며 전장을 제 마음 가는대로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 민병대를 망치로 쓰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 왜? 뭐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꺼?
- 이유라니요! 사기가 바닥을 치는 건 물론이고 심하면 전투에서 이탈까지 할 텐데 어떻게 민병들을 망치로 쓰시겠다는 겁니까!
- 거, 드제 대령님은 병사들을 제대로 관찰해 본 적이 없으시네예?
- 그게 무슨 소리...
- 우리 지원병대대는 끌려온 게 아니고, 귀족들 배때지에 칼빵 놓고 싶어가 자원한 사람들입니더. 병사들하고 밥이라도 한 끼 먹어봤으모, 잘 아실 텐데예.
- 장교가 어떻게 병사들하고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겁니까! 그건 군법 위반이에요!
- 군법? 그 잘난 군법 내 부대에 들이밀지 마세예. 난 딱딱한 군법 타령보다는 내 병사들 심리를 파악해서 제대로 써먹는 게 훨씬 낫다고 봅니더.
그러나 드제의 우려와 달리 보나파르트 대령의 장담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민병대 따위가 정규군을 박살내는 현실 말이다.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거고, 대체 얼마나 많은 요소를 고려한 건지... 대단한 사람이야.”
드제 대령은 혀를 내두르며 읊조렸다.
***
1791년 6월 24일.
저녁 8시.
전투 경과 9시간 째.
“항, 항복하겠소! 목숨만은 살려주...커...커헉.”
“이겼다!!”
“와아아아!!”
“우리가, 우리가 귀족 놈들을 이겼어!”
마지막 남은 왕당파군의 목에 총검이 박혔다.
“비록 아르투아 그 인간은 못 잡았지만 대승이네.”
“니가 잘 훈련시켜서 된 거제. 아, 참말로 힘들다. 힘들어.”
나폴레옹 형은 긴장이 풀어진 듯, 모자를 벗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와인 한잔?”
“······기욤이 니, 여까지 와인을 가지고 왔나?”
“어차피 이길 텐데 뭐.”
“······뭘 믿고 우리가 이긴다고 카나?”
“나폴레옹이 지휘하는데 질 리가 있나.”
“뭐?”
아니 나폴레옹 이 인간 왜 웃는담? 나는 완전 정배 중의 정배를 탄 건데.
“허. 마, 한 잔 따라봐라.”
“예이, 승전장군님.”
“샹베르탱?”
“샹베르탱.”
“크. 역시 니는 뭘 좀 안다.”
“괜히 음식 장사하는 게 아니지.”
나는 나폴레옹에게 한 잔을 따른 후, 내 잔에도 한 잔을 따랐다.
“첫 승전을 기념하며 건배?”
“참나, 별... 그러면 건배사는 니가 함 해봐라.”
“건배사라...”
흐음. 왕당파를 이긴 기념으로 뭐가 좋을까.
아.
나는 와인 잔을 들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건배 어때.”
“하하, 하모. 나쁘지 않은데?”
우리는 동시에 잔을 맞부딪혔다.
“민주주의를 위해 건배!”
“민주주의를 위해 건배!”
크으 누가 구했는지는 몰라도 와인 정말 잘 구했다.
“근데 기욤아.”
“어, 왜?”
“그루시 형은 대체 어디 있능교?”
아니. 형이 명령을 내렸는데 왜 형이 몰라?
***
“허..허허...”
아르투아 백작은 방금 전 펼쳐진 대참사에 반쯤 얼이 빠진 채로 중얼거렸다.
- 아르투아 백작님만은 구해야한다!
- 전군 활로를 뚫어라!
- 북쪽! 적 기병대가 포위한 포위망 사이로 틈이 생겨났습니다!
- 그래?! 적 기병대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엉성해서 살았군! 정예만 뽑아서 백작님을 데리고 빠져나가!
- 백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고귀한 왕의 핏줄인 백작님은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아르투아는 말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내 비록 패했지만, 다시 한 번 대업을 도모하지 못할까! 내 그대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노라!”
아르투아는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 아니다.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지.
“내가, 내가 스페인으로 가서 군대를 빌려오면 된다. 결코 내가 헛된 희생을 강요한 것이 아니야.”
고귀하신 왕족은, 그렇게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 순간.
타앙-!
“어...어?”
아르투아는 무언가가 새어나와 따듯하게 젖어가는 자신의 가슴팍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야음 속에서, 점차 힘을 잃어가는 아르투아의 앞에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누...누구... 흑...흑색 수술...”
“프랑스 국민방위대 용기병 중령, 에마뉘엘 드 그루시라고 하오. 프랑스의 안녕을 위해 국민의 이름으로 반역자인 귀하를 처단하겠소.”
그루시는 손에 든 권총 안으로 탄환을 새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