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나 (5)
1791년 6월 23일.
프랑스왕국 솜 주.
아미앵 근교, 빌레르-보카주.
“빌레르-보카주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마을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나는 무언가 떠오를락 말락 간질거리는 머릿속 안의, 기억이라는 한 가닥 실을 애써 잡으려 했다.
으음 뭔가... 뭔가가 기억 날 것 같기도 하고...?
“뭐, 예산안 같은 거 짜다 들은 거 아이가?”
“아, 그런가?”
하긴 그거 말고 내가 요 조그마한 마을이름을 알 이유가 어디 있겠어.
“기욤아. 보급은 다 끝났나?”
“그렇게 말 안 해도 탄약, 포탄 다 넉넉하게 배분해 놨지. 특히 중앙 포대는 형 말대로 포탄을 두 배로 적재해 놨어.”
“역시 니한테 믿고 맡기길 잘했다 아이가.”
나폴레옹은 씨익 웃더니 망원경을 들어 저 멀리 먼지를 일으키며 걸어오는 적군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하. 릴을 함락시키고 도시를 혁명 이전으로 돌려버렸다더니, 아주 얼굴에 욕심이 그득그득 흐르는고마. 기욤이 니도 한 번 볼래?”
나는 망원경을 받아 눈에 가져다 댔다.
망원경 너머로 부르봉의 백합무늬를 새긴 금색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딱 봐도 오동통한 게 ‘나 좀 잘 먹고 잘 살았소’하며 귀족 티를 좌르르 내는 왕당파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우리 군은, 장교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반은 농부들이 평소에 입는 평상복에 군화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사람이 태반, 심지어 이것도 3천벌 이상을 며칠 만에 조달해서 겨우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아, 총 만들기도 바쁜데 군복 만들 시간이 어디 있어? 군복 없다고 사람이 싸우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총과 검이 없으면 애초에 싸울 수도 없잖나.
“그보다 점마들, 아주 정석적인 대형이데이. 딱 정석만 고집하는 게, 고리타분한 왕당파답고마.”
“정면에 숙련병, 중열에 전열보병. 진짜 교범이랑 다를 게 없네.”
나는 망원경을 나폴레옹 형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는 속도를 보니 대충 한두 시간 정도 뒤에 마주 보겠어.”
“그렇겠제. 자, 기욤아 이만 돌아가자. 봐야할 만큼은 봤데이.”
나와 나폴레옹 형은 고삐를 당겨 사령부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
“허, 적의 수가 보고와 다른데?”
혁명군의 삼색기를 군데군데 걸어놓고 나란히 도열한 적군의 수가, 왕당파에게 전해진 첫 보고와 달리 두 배, 아니 세 배가량 늘어나지 않았는가.
아르투아 백작의 미간이 잠시 구겨졌다.
“게다가... 중열도 상당히 방비를 많이 갖춰 놓았군. 좌익도 군율이 잘 잡혀있어.”
중열에는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대포들이 즐비했다. 아마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가 가운데 언덕에 포를 중심적으로 가져다 놓았을 테다.
좌익은... 좌익은 정규군 뺨치는 수준으로 훈련이 되어 있는 듯, 대열을 상당히 잘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르투아는 적의 우익을 보고 의문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죄 꾀죄죄한 옷에, 누구는 군화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로 엉성한 대열을 맞춰 서있는 모습은 저게 군대인지 아니면 농사를 하러 온 농부들 패거리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오직 단 한 가지.
그들이 총을 들고 있다는 점만이 농부와의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잠깐만... 아무리 봐도 적 우익의 대열과 복장이 이상한데? 군기가 문란한 수준이 아니군. 부관, 우익을 맡은 부대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나?”
황금색 망토를 두른 왕당파군 사령관 아르투아 백작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부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듣기로는 이제 막 전국에서 모병된 지원병들이랍니다. 아르투아 백작님.”
“······지원병? 하하하! 지원병?”
아르투아는 망원경을 품속에 집어놓고 한참을 웃어재꼈다.
지원병이라. 기껏해야 겨우 민병대라는 것 아닌가? 촌락 농부에게 소총을 들려줬다고 용맹하게 싸울 수 있겠나? 아르투아는 저 3류 희극에 나오는 3류 배우 같은 엉성한 적들의 모습이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릴의 국민방위대라는 정규군들도 한숨에 쓸어버린 왕당파 군이다. 그깟 민병대 조금 늘어났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수고 없는 빵은 없다(Nul pain sans peine)더니 네덜란드에서 이곳까지 한 걸음에 달려온 수고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듯 싶었다.
“부관! 전군에 내일 적을 칠 예정이라고 명을 내리게. 좌익은 무시해! 놈들의 우익만 밀어내면 이 전쟁은 끝나니!”
“예! 아르투아 백작님!”
서둘러 각 부대로 명령을 전하러 가는 부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아르투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혁명군 쪽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파리, 그 너머에 베르사유 궁전이 있기에.
“그래, 내일만 지나면. 모든 것은 끝난다.”
루이 16세도 루이 17세도 없는 지금, 베르사유를 자신이 점령하고 모든 역적도당을 쓸어버린다면.
공석인 프랑스의 왕위는, 아르투아의 것이 되리라.
아르투아 백작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6월 24일, 정오.
아미앵, 빌레르-보카주.
“들어라! 적의 우익은 얼치기 민병대들뿐이다! 귀관들은 프랑스 왕국 제일의 군인들이다! 적을 싸그리 지옥으로 보내줘라!!”
“““와아아!!”””
왕당파 군이 아미앵을 향해, 파리를 향해, 혁명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게 다 무슨...흡!"
제 3지원보병대대의 병사, 필리프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살기등등한 적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입으로 말했다가, 뒤늦게 그걸 깨닫고 몸을 움츠렸다.
장교와 부사관의 승낙 없이 병사가 소리를 내면 중대의 군기를 문란케 한다면서 바로 군홧발이 날아오기 십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김없이 오늘도 뒤통수를 군화로 채이겠거니-하고 필리프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상하게도 평소와 달리 군홧발은 필리프의 뒤통수에 날아들지 않았다.
필리프는 눈을 살짝 뜨고, 옆에 있는 장교를 쳐다보았다.
“······.”
얼마 전까지 소르본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소위 계급장을 단 앳된 사내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다만 너무 세게 씹은 것인지,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소위는 눈치 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피가 나는 입술을 이빨로 꾹꾹 씹어댔다.
“소, 소위님?”
“병사! 앞을 본다. 실시!”
“입술에 피가...”
“어, 어? 어...”
필리프가 손으로 입술을 가리키고 나서야 제가 제 입술을 찢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위는 서둘러 옷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위의 하얀 군복 옷소매가, 피 때문에 점차 붉게 변해갔다.
“소위님, 저기 괜찮으신...”
“병사! 내 걱정 말고 앞을 봐라. 병사의 행동 때문에 적이 눈치 채면 우린 끝난다.”
“예, 예!”
필리프는 소위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 보았다.
지원병에 입대하면 샤를마뉴 대왕처럼 검을 들고 폼 나게 적과 싸워 이길 줄 알았건만, 필리프의 역할은 그저 장교의 말을 따르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병사는 장교의, 장교는 사령관이라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령이 움직이라고 할 때까지 대기만 하는 것. 그게 바로 필리프와 옆에 서있는 소위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지금.
“붉, 붉은 기다! 본대에서 붉은 기가 올라왔다!! 지원병대대 앞으로 가!!”
필리프와 소위의 역할이 바뀌었다.
***
빌레르-보카주의 동쪽에 자리한 구릉.
혁명군의 우익이자, 후줄근한 민병대가 지키는 곳. 이 구릉을 접수한다면 빌레르-보카주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터였다.
그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향해 아르투아는 예리한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후줄근한 민병대 놈들 주제에 왜 이리 안 뚫리는 게야!”
후방에서 전황을 망원경으로 살피던 아트루아 백작이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연대!! 버텨!! 백병전 진으로!! 30분만 버텨라!!”
“백병전 진으로!!”
“와아아!!”
민병대라면 벌써 사기가 떨어져 대오를 이탈하거나 박살이 나야하는데, 저 민병대는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웬만한 숙련병들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관! 적의 우익은 민병대라면서!! 저게 어떻게 민병대야! 정규군 아닌가!”
***
“빙시들, 진짜 민병대인줄 알고 달려드는 고마.”
“보나파르트 대령님. 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원망이 컸습니다. 우익 정규병들의 군복을 뺏어서 좌익의 민병대에게 주시다니요.”
“금마들한테 제대로 얘기하소, 드제 대령님. 내는 이기는 게 목적이지, 폼나게 뒈지는 게 목적이 아니라꼬. 그리고 포대에 말 전하소, 사격 시작하라고.”
망원경을 거둔 나폴레옹은, 막사 가운데 자리한 지도의 말판을 이리저리 옮기며 말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붉은 말판이, 우익에서 굳건히 버티는 정규군의 방진 때문에 가로 막혔다.
- 삼일 동안 제식만 시키겠다고? 총 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 어차피 총 쏘는 법 배워도, 금마들 중 태반은 방아쇠 땡기지도 못할 기다.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는 상황에서 총검으로 쑤시면 쑤셨제. 그러니까 박아도 제대로 갖다 박으라고 제식이라도 시키는 기다.
- ···그러면 내가 제식훈련 시켜볼까? 딱 하루면 발 딱딱 맞출 수 있는데.
- 그게 가능하나?
- 보면 알아.
“하여간 미친노마.”
나폴레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욤 그 놈.
지옥에서 루시퍼에게 사람을 고통스럽게 비틀어 짜는 교본이라도 받은 듯, 기욤이 알려주는 이상한 체조 하나하나 마다 지원병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오늘 새벽.
총을 장전할 줄 모르는 신병들은, 오와 열 하나만큼은 숙련병들 뺨칠 정도로 완벽하게 맞출 수 있었다.
거기에 우익과 좌익의 옷을 바꿔 입히는 함정까지.
적의 예봉은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든든한 모루에 알아서 머리를 들이 밀어 주셨으니, 이제 그 머리를 향해 묵직한 망치를 휘두를 차례.
나폴레옹은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쟀다.
시침과 분침은 이미 정오를 상당히 지나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태양이 서쪽을 향하기 시작했을 시간.
서쪽에 자리한 아군 좌익이 움직여 적의 허리를 찌른다면, 적은 이제 따가운 태양빛에 눈을 내주고 싸워야 할 터.
게다가 비록 민병대지만 나폴레옹에게는 적보다 4천의 병력이 더 많았다. 본대가 빠진 적의 포진지를 제압한다는 도박 한 번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리스크.
나폴레옹은 회중시계를 품 안에 집어넣고 입을 열었다.
“예비대를 투입해 적의 포진지를 따버립시더. 그루시 중령.”
“예, 보나파르트 대령님.”
“예비대를 끌고 적지를 무조건 밀어내소. 그리고 드제 대령님. 지금 당장 중열 포병들을 빼, 그루시 뒤를 따르게 하세예.”
““명 받들겠습니다.””
나폴레옹은 좌익에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지원병대대의 말판을 밀어, 우익이 예쁘게 모은 왕당파 말판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마, 이건 좀 아플기다.”
***
“적의 좌익이 이동합니다!!”
“아군 포대가 막아줄 거다! 적의 우익을 밀어붙이는 데 전력을 다해!”
“아, 아군 포대는 적 중열 사격에 제압되었습니다! 적이 모든 대포를 중열에 모아놓고 포격하는 바람에 화력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지도! 지도를 가져와라!”
아르투아 백작은 말 위에서, 부관이 가져다 준 지도를 헐레벌떡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백작님,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포위섬멸당합니다! 활로를 뚫어야 합니다!”
“······지금 공격해 들어오는 적 좌익을 밀어낸다! 기병대로 측면을 열어!”
"하지만 좌익을 공격하려면 햇빛을 바라보고 싸우게 됩니다!!"
"그렇다고 앉아서 싸울 수는 없지 않나! 밀어내보도록!"
“알겠습니다! 기병대! 날 따라와라! 적 좌익을 밀어낸···!”
“어?”
그 순간, 아르투아의 앞에 있던 부관이 산산히 조각났다.
“포, 포격이다! 아군 쪽에서 포격이 날아온다!”
“아군 포진지를 적이 점령했다!!”
“무, 무슨... 아직 안 끝났다! 적의 우익과 좌익 중 하나만 뚫어내면!!”
“후방에서 적 기병대가 밀고 내려옵니다!!”
“허...허허...”
- 핫하! 혁명군 등장! 내 이름은 에마뉘엘 드 그루시다!!
- 와아아!! 반역자들을 도륙내라!!
마치 신의 손바닥에 있는 것 마냥, 아르투아가 하는 모든 지시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끝났군. 끝났어... 내가 상대하는 게 사람이 맞긴 한가? 군대라는 게 이렇게 유연할 수가 있나?!”
“아, 아르투아 백작님을 모셔라! 백작님은 살려야한다!”
“허..허허...”
아르투아는 고개를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