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나 (3)
1791년 6월 중순.
프랑스왕국 동부, 마른 주.
발미.
전투에서 필요한 건, 내가 쓸 수 있는 수를 늘리고 상대의 수를 제한하는 것.
불과 얼마 전까지 파리에서 아가씨들을 꼬실 때 입던 멋진 군복은 군장 안에 넣어 놓고서, 병사들은 삽과 곡괭이, 후줄근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수만 명의 장정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곧 전장이 될 드넓은 땅을, 적이 가진 지도와 다르게 하나하나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제군들, 풍차를 태워라! 적들이 이정표로 쓸 만 한 건 죄다 때려 부숴! 어서 움직여!”
“예!”
국민방위대 사령관의 명령 아래, 발미의 언덕에 자리했던 커다란 목제 풍차가 타닥타닥하는 소리를 내며 불길에 휩싸였다.
“밟아!! 연기도 안 나게 잔해까지 다 치워버려! 꾸물대는 놈들은 오늘 내가 정신이 들도록 패주겠다!”
“예!”
병사들과 부사관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시각, 라파예트 사령관과 장교들은 본부 삼아 사용하는 마을 교회에서 굳은 얼굴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적은 태양을 바라보고 싸우고 싶지 않아할 테니 북쪽에서 꺾어 들어 올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령관 각하.”””
붉은색 말판들이 발미의 북쪽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아미앵 연대는 비온느 강(Bionne)을 우측에 끼고 고지를 지키십시오. 그곳이 뚫린다면 본대는 몰살입니다. 연대장, 할 수 있습니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미앵 연대는 최후의 한 명까지 고지를 방어하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좋습니다.”
푸른색 말판이 발미의 우측 언덕에 올라갔다.
“켈레르만 장군님.”
“예, 사령관.”
“전장 상황을 보고 신호를 보내드릴 테니 코히에르에서 예비대를 가지고 대비해주십시오.”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사령관.”
푸른색 말판 두 개가 발미의 뒤 쪽, 코히에르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연대장들은 포대가 예비탄을 넉넉히 준비하고 장거리 포격전을 대비할 수 있도록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예, 사령관 각하!”””
이번엔 푸른색 말판들이 발미 정면의 두 언덕에 나란히 나눠 올라갔다.
“발미의 중앙군은 내가 직접 지휘합니다.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길. 아멘.”
“““아멘.”””
수십 명이 동시에 성호를 그었다.
남은 것은 적이 오기를 기다릴 뿐.
***
“적장이 라파예트라는 자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총사령관 각하.”
“하, 라파예트라는 놈. 그래도 마냥 애송이는 아니군. 운으로 영국 놈들을 이긴 건 아니었어.”
찰카닥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망원경을 접으며 말했다.
프랑스군은 방어에 적합한 뫼즈 강과 아르곤 숲을 내주면서까지 프로이센군을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리고 프로이센군이 뫼즈 강과 아르곤 숲을 삼킨 대가가, 지금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눈앞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미 이정표로 삼아 수신호를 보내려고 했던 풍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고, 언덕 위에는 프랑스군의 포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얼마정도의 적이 집결했는지 대강 파악은 되었나, 부관.”
“예, 정찰대의 보고로는 대략 7만정도로 추측됩니다. 각하.”
“7만이라...”
적은 7만. 그렇다면 프랑스 상비군의 반이 이곳에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접은 망원경을 부관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린 6만 4천이니, 한 번 화끈하게 붙어볼만 하겠어. 부관, 블뤼허 중령을 데려오도록.”
“예, 각하.”
잠시 후, 부관은 콧수염이 대단한 기병 중령을 총사령관에게 데려왔다.
기병대 특유의 번쩍이는 가죽부츠를 신은 중령은, 큰 소리와 함께 경례를 올려붙였다.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께 경례! 공작께서 소관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왔군, 블뤼허 중령.”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프로이센을 만드신 공작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빨리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다른 건 몰라도, 저 불같은 성격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짧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엿 같은 성정에도 불구하고 기병을 다루는 감에는 블뤼허를 따를 자가 없었기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블뤼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블뤼허 중령, 내가 보병대로 비온느 강기슭을 따라 적의 우익을 밀어내고 신호를 주면,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좌익에 위치한 언덕을 공격하게. 돌입하는 타이밍은 자네의 판단에 맡기겠네.”
“명, 받들겠습니다!”
“좋아. 이제 나가봐도 좋네.”
“예, 총사령관 각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홀로 남은 막사에서 다시 찬찬히 지도를 훑어보았다.
“7만이라...”
눈앞에 있는 7만의 적. 바꿔 말한다면, 이곳을 제외하곤 프랑스의 방비가 약해져있다는 것.
“프리드리히 대왕 폐하, 이 조카가 프로이센을 다시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프로이센의 총사령관은, 조용히 목에 걸린 십자가를 들어 입을 맞추었다.
***
쾅! 콰쾅! 쾅!
“야! 물!! 물 가져와! 포신 식혀!! 이대로 쏘면 터진다!”
“예, 하사님!”
“밀대로 밀어!”
“밀어!!”
“······매캐하군.”
“벌써 두 시간째 포격전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연대장님.”
“제길, 이러다간 포연 때문에 적이 보이지도 않겠어.”
아미앵 보병연대의 연대장은 파이프를 꼬나물며 말했다.
적이 포대를 설치한 아르곤 숲 언덕과 발미 언덕의 거리는 2.5km. 서로 단기간에 유효타를 먹이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그래도 어쩌랴. 백발 중 한두 발만 적지에 운 좋게 떨어져도 이득인 것을.
“연대장님! 포대에서 쟁여놓은 물이 다 떨어졌답니다!”
“그래? 병사들을 차출해서 비온느 강에서 물을 떠오도록.”
“예! 연대장님!”
부사관은 연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을 뽑은 후, 텅 빈 양동이를 양손에 들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자, 서둘러서 긷는다. 실시.”
“““예, 상사님.”””
병사들은 양동이를 한 번에 강 속에 빠트리고는, 빠르게 길어 올렸다.
“어, 어!”
“야이 띨띨이 새끼야! 하나 떠내려가잖아! 당장 가서 가져와!”
“악! 예, 예! 죄송합니다!”
상사에게 뒤통수를 한 번 얻어맞은 이등병은 떠내려가는 양동이 하나를 향해 서둘러 군홧발을 옮겼다.
찰박찰박하는 소리와 함께 강 가운데까지 들어가 양동이를 손에 잡은 이등병은, 몸을 돌려 강기슭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
“äh?”
“적이다!!”
“Feind!”
“총 들어! 쏴!”
“Feuer!!”
타타탕!!
타타탕!!
물을 길으러 내려온 병사들과 강기슭을 향해 조심스레 움직이던 프로이센 분견대가 만났다.
***
“붉은 색 기를 올려라! 본대에 적과 교전 중이라고 알려!”
“예! 연대장님!”
아미앵 보병연대의 장교 하나가 서둘러 깃대에서 푸른색 깃발을 내리고 붉은 기를 올렸다.
“포대에 있는 포병 제외, 전 병력 착검 후 강기슭을 사수한다. 군악대장?”
“예, 연대장님!”
“재무총감 각하가 준 신곡 한 번 기깔나게 뽑아보게. 베토벤인가 하는 그 유명한 양반이 만든 거 말이야. 가도 명예롭고 폼 나게 가야지.”
“예, 연대장님!”
군악대장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군악대를 불러 모았다.
“부관?”
“예, 연대장님.”
“막사에서 내 검을 가져와주게.”
“예, 연대장님!”
“고맙네, 부관. 그러면 팡테옹에서 보자고.”
아미앵 보병연대의 연대장은 씨익 웃으며 곁에 있는 장교들과 병사들에게 말했다.
“내 아미앵 보병연대의 제군들.”
“““예! 연대장님!”””
“지금 강기슭에 프로이센 훈족 놈들이 몰려오고 있다. 분견대 한 놈을 잡아서 물어보니 브라운슈바이크 척탄엽병연대라더군. 그래. 20년 전 클레펠트에서 우리 프랑스군을 유린한 그 놈이다.”
“““······.”””
병사들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제군들이 두려울 거라는 것.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뒤에는 2700만 프랑스인들이 있다. 재무총감께서 말하지 않았나, 국민 스스로를 위해 싸우라고. 우리가 밀려나면 국민들이 위험하다. 내말이 틀린가?”
“““연대장님 말이 맞습니다!”””
“제군들! 우리가 누군가!”
“““시민의 방패, 국민방위대입니다!”””
“연대장이 선두에 서겠다! 오늘 프로이센 놈들 중 그 누구도 이 언덕을 넘을 수 없다! 국민방위대 만세! Vive la nation! Vive la peuple! Vive la révolution!”
“Vive la nation! Vive la peuple! Vive la révolution!”
아미앵 보병연대는 검 집에서 검을 뽑아들고, 총검을 높이 들고 외쳤다.
“군악대장! 재무총감께서 준 노래, 지금부터 시작하도록!”
“예! 연대장님!”
“제군들! 다들 가사는 기억하고 있겠지? 내 연대에 멍청이는 없으니 말이야!”
“““예!”””
아미앵 연대는 언덕에 자리 잡고, 강기슭을 향해 총을 치켜들었다.
-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연대장님! 적이 보입니다!”
“1열 조준!”
- 심장 소리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발사!!”
타타탕!!
“2열 조준!”
-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 하나! 저 너머 장벽 지나서 오래 누릴 세상.
“2열 발사!”
타타탕!!
“놈들이 우릴 겨눈다, 제군들! 버텨!!”
- 자 우리와 싸우자 자유가 기다린다!
“아악!!”
“억!”
“후열 앞으로 나가! 빈자리를 메꿔!”
- 너의 생명바쳐서 깃발 세워 전진하라! 살아도 죽어서도 앞을 향해 전진하라! 저 순교의 피로써 조국을 물들이라!
“훈족 놈들이 올라옵니다!!”
“연대! 백병전 준비!”
-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아미앵 연대! 찔러 들어가!!”
“와아아!!”
“이 개새끼들! 한 놈도 못 보낸다!!”
- 심장 소리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
1791년 6월 중순.
프랑스-네덜란드 국경.
망명 왕당파군.
“라파예트와 켈레르만은 프로이센군을 상대하고 있다, 이말 맞나?”
“예, 아르투아 백작님.”
“그러면 뭐, 우리 앞을 막을 병력도 제대로 없겠구만! 하하하!”
아르투아 백작은 크게 웃었다.
과연 파리와 랭스에 1만 정예군을 막을 프랑스 국민방위대가 남아 있을까? 아니. 기껏해야 연대 한 두 개? 아르투아 백작은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 라파예트 대신 파리와 랭스를 지키는 놈 이름이 뭐라고?”
“예, 백작님.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대령입니다.”
“······기욤은 누군지 알지만, 보나파르트라는 놈은 처음 들어보는데?”
“정보통들 말에 따르면 라파예트의 눈에 들어 고속진급한 낙하산이라고 합니다.”
“허, 몇 살인데 그러나?”
“올해로 스물 둘입니다.”
“하하하! 애송이 아닌가?! 역시 신께서 우리 부르봉을 버리지 않으셨어! 전군, 파리를 향해 움직인다!”
나폴레옹인지 뭔지, 그 놈을 박살내고 기욤을 잡으면 이 전쟁은 끝난다.
아르투아 백작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