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나 (1) (112/341)

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나 (1)

프랑스 중남부, 오툉.

“자, 이걸로 저번 값은 다 갚은 거다?”

“갚긴 무슨. 적어도 내 혹 아물 때까지 내놔야지 임마.”

“와 진짜 그러기야? 지독한 새끼.”

“니 헛소리 때문에 손님한테 괜스레 얻어맞았는데 당연하지.”

지독하다는 듯 혀를 내두르는 친구를 향해 그렇게 말한 수아송은, 친구가 건넨 간편식사를 한 입 베어 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손님에게 지팡이로 얻어맞은 혹은 정수리에 뽈록 솟은 채로 남아있지만, 그 덕에 손님한테 은화도 한 닢 받았고 친구한테 점심식사도 가끔 뺏어먹을 수 있는 지금이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딱히 나쁜 정도가 아니지.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궁핍한 나머지 배를 곪기 일쑤였던 몇 년 전을 생각해 본다면 거의 세상이 한 번 뒤바뀐 거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

이것 봐라. 평소보다 한 부, 두 부도 아니고 열 부를 넘게 떼어 왔는데, 이미 대부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지 않나.

아침에 양 손 가득히 종이쪼가리를 들고 오툉 시 광장에 나서면, 꼭 광장 한 가운데 자리한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오른쪽으로 같이 포개지기 전에 두 손이 텅텅 비기 마련이었다.

코를 혼자 힘으로 풀 때부터 신문팔이와 잡지팔이를 한 수아송에게는, 적당히 먹고 살만한 지금이 오히려 낯설었다.

그래서일까. 허리춤의 돈 주머니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면 찰수록, 마음 한 편이 불편해졌다. 언제라도 이 일상이 깨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야. 밥까지 얻어먹으면서 뭐 그렇게 아니꼬운 표정이냐?”

“······너는 별 심각한 생각 하나 없이 살아서 좋겠다.”

“쯧. 또 자기 혼자 심각해져가지곤. 그 뭐냐, 어떤 네덜란드인이 한 말인데. 사과나무 어쩌고...”

“세상이 망하더라도 사과나무 하나를 심겠다?”

“어, 어 맞아. 그거.”

하여간에 어디 길바닥에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스피노자 그 인간은 돈 많은 유대인이니까 하는 말이고. 그 양반은 적어도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스테이크는 마음껏 썰고 갈걸?”

“어, 그른가?”

“딱 까놓고 말해서 그 사람 뒈지는 거랑 우리 뒈지는 거랑 틀리지 임마. 우리는 길가다 객사해도 잡지 떼어다 주는 마부 아저씨들 말고는 그 누구도 우리가 죽은 지 모를 걸.”

“뭐 그걸 그렇게까지 심하게 얘기 하냐? 요즘 먹고 살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삐져있어.”

친구 놈은 코를 팽-하고 풀더니 아직 다 팔지 못한 신문을 펼쳐 눈으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너 글 읽을 줄 모르잖아.”

“읽는 척하는 거야. 어때, 폼 좀 나지 않냐? 나도 막 법원 서기관 그런 사람 같아 보이지?”

“지랄. 말똥이 향기 좀 달라진다고 무화과 되냐?”

“에휴. 이렇게 비관적인 새끼가 손님들 앞에서 이빨은 어찌 그리 잘 턴담.”

사람이 목표를 가져도 좀 현실적으로 가져야지. 신문팔이 소년이 어떻게 법원 서기관처럼 보이겠나.

“그러지말고. 자, 너도 한 번 해봐.”

“뭘.”

“좀 유식한 척 해보라고.”

“쯧. 자, 됐냐?”

“이야. 수아송 씨. 혹시 오툉 법원에서 근무하시나요? 아니면 대학생이신가?”

“미친놈.”

결국 수아송은 피식하고 웃으며 신문을 다시 접어 넣었다.

그 때, 정장을 입고 지나가던 한 사람이 다가와 수아송에게 말했다.

“혹, 혹시 그거 신문이나 잡지니? 어서! 나 좀 어서 다오!”

신사는 어딘가 흥분된 기색으로 수아송에게 거듭 손을 내밀었다.

“그... 돈을 먼저 주셔야 드리죠. 손님.”

“여기 있다! 자, 맞는지는 네가 세어 보거라, 나는 이것 좀 읽고 있을 테니.”

“아, 예에.”

베르사유에서 의원이라는 사람들끼리 또 드잡이라도 한 건가. 오늘 따라 이상하게 흥분된 채로 돌아다니는 어른이 많이 보였다.

물론 정치가 어쩌고저쩌고 그러는 것보다 동전 한 닢이 더 중요한 수아송에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수아송은 빠르게 사내가 건넨 금화 한 닢을 은화로 거슬러 내밀었다.

“자, 여기 거스름돈입니다... 손님? 손님!”

“허...”

“손님!”

“어, 어? 아, 그래. 고맙구나. 그러면 많이 파려무나!”

신사는 신문을 원통처럼 말아 품 안에 넣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평소보다 넋이 나간 손님이 많은 것 같지 않냐, 수아송?”

“그러게. 무슨 일 있나.”

두 소년이 서로 숙덕이는 사이, 저 멀리 시청에서 뚜벅뚜벅 누군가 걸어 나와 광장 한 가운데 섰다.

공무원인 듯 싶은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고깔을 입에 물고 소리쳤다.

“주목, 주목! 모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청과물 가게에서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딸기를 사던 아주머니도, 점심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온 법원 공무원들도, 광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공무원은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르고는, 다시 고깔을 들었다.

"주목해주십시오. 주목.

1791년 5월 1일.

베르사유 국민의회와 파리에서 전해드립니다.

혁명정부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존중받아 마땅할 프랑스의 국민 여러분.

어제, 4월 30일 오후 4시.

국민의 정부인 우리 국민의회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를 향해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이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국민방위대에서는 독일인들의 군대가, 곧 프랑스 국경을 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안위와 구태한 봉건제를 위해 봉사하는 침략자들로부터 저항하는, 프랑스 국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들이 승리한다면,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되찾은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1789년 7월 14일 이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위정자 중 한 명으로서 여러분께 간청 드리겠습니다.

모두 분연히 일어나 침략자들에게 맞서주십시오.

다만 정부를 위해 싸우지 마십시오, 국가를 위해 싸우지 마십시오. 왕을 위해, 그 누군가를 위해 싸우지 말아주십시오.

베르사유와 파리에 있는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가 저 침략자들에게 맞서기로 한 대의는 바로 국민 여러분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워주십시오.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대의이니까요.

저 침략자들이 가지지 못한 대의이니까요.

온 세상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대의이니까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재무총감 또한 여러분의 곁에서 대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겠습니다.

파리의 도심에서, 랭스의 성당까지, 랭스의 성당에서 베르됭의 뫼즈 강까지, 베르됭의 뫼즈 강에서 아르곤의 산맥까지, 기꺼이 여러분의 곁에서 행군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대의는 옳으며, 적은 패배할 것이고,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프랑스 국민들께, 신의 은총이 있길.

1791년 4월 30일, 오후 11시.

프랑스 혁명 왕국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

1791년 5월 2일.

국민방위대 임시 사령부, 랭스.

“전체, 차렷! 사령관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좋습니다. 제군들. 계급에 상관없이 다들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가감 없이 꺼내주셨으면 합니다.”

라파예트 사령관은 돌돌 말려있던 지도를 지휘봉으로 쭉 밀어 모두가 잘 알아 볼 수 있게 활짝 펼쳤다.

부관인 니콜라 다부 소령이 말판을 가져와 지도 곳곳에 하나하나 세우길 잠시, 곧 지도 전역이 말판으로 뒤덮였다.

“사령관님, 적은 아마 스당을 지나 뫼즈-아르곤으로 올 겁니다.”

“적을 격파하려면 우리 프랑스군의 장기인 보병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베르됭의 야지에서 붙어야 합니다.”

“적을 랭스까지 끌어들여 포위 섬멸하는 건 어떻습니까, 사령관님.”

“프로이센군의 장기는 유려한 기동전 아닙니까, 오히려 산으로 끌어들이면 우리 군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말들이 오고가도, 라파예트 사령관은 가만히 책상을 톡톡 두들기다가 입을 열었다.

“예측은 좋으나 적은 스당으로 안 옵니다.”

“프로이센 보병의 훈련도는 유럽 최고 수준입니다. 귀관은 로스바흐와 로이텐의 전훈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듯 싶군요.”

“랭스까지 끌어들이면, 적에게 프랑스 영토의 5분지 1을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는 생각인가요? 기각합니다.”

“프로이센군의 장기는 기동전이기도 하지만, 산악엽병(獵兵)부대도 장기 중 하나입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우군이 몰살당할 겁니다. 기각합니다.”

스물 초반의 햇병아리 장교들이 내민 제안 하나 하나가, 막강한 대마왕 라파예트에 의해 산산이 무(無)로 돌아갔다.

“다음 의견, 없습니까?”

“······.”

“총감, 총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 말씀이십니까? 전 보급품 배분 때문에 온 건데요.”

“그래도 한 번 말씀해보시지요. 뭐든지 괜찮습니다.”

“그러셔도 전 군문을 나온 지 오래됐습니다만.”

“하지만 명색이 포병대 소위 아니십니까. 해보시죠.”

대마왕 라파예트는 싱싱한 장교들을 포식하고는, 아직도 배가 차지 않은 것인지 콩도르세 국장님한테 재무총감 일을 짬 때리고 온 날 향해 말했다.

“······제가 프로이센군이라면, 속도전을 걸어 단기전에 승부를 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국경에서 파리까지 일직선으로 쭉 뚫고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휘봉 대신 내가 가진 담배 파이프로 국경에 배치된 프로이센 말판 하나를 파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쭉 밀었다.

헬리콥터로 물자를 실어 나르고 공수부대를 거대한 수송선에 태워 적지에 투입시키는 21세기에도 보급은 실로 중대한 사항이다.

그런데 아직 뛰뛰빵빵 자동차도, 칙칙폭폭 기관차도 안 나온 지금 원정을 오는 군대라면, 필시 단기결전을 내지 않으면 배를 곪으며 죽어갈 걸.

처음 사관학교에서 공부할 때, 민가약탈로 소비한 보급품을 채우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벙 쪘는지 아나? 세상에 민간인을 약탈해 배를 채우는 게 정식교범이자 교리라니. 이 시대의 전쟁이란 대체.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잘 들었습니다, 총감.”

라파예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또 할 말 있는 장교 있습니까?”

“저 있습니더. 사령관님.”

“아, 보나파르트 대령. 말씀해보세요.”

지원병훈련연대 연대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령은 뚜벅뚜벅 걸어 나와, 언제 샀는지 모를 개인용 지휘봉을 품 안에서 꺼내, 지도에 올려놓았다.

“일단 베르됭을 내줍니더. 그리고 생미이엘과 아르곤에서 감싸듯 포위해 한 번에 찔러 들어가모, 발미나 쿠샹스라는 마을에서 적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 겁니더.”

나폴레옹은 지휘봉으로 말판을 베르됭과 랭스 사이의 빈 공간으로 하나하나 착착 옮겼다.

“······적이 기병일 경우에는 병력 전개가 그 시간 안에 가능하겠습니까, 대령? 첩보로는 국경에 블뤼허라는 자가 이끄는 정예 기병대가 있다고 하던데.”

“사령관님 말이 맞습니더.”

그러나.

나폴레옹은 한 마디를 뒷붙이고는, 지휘봉으로 삼색기가 달린 말판 하나를 툭-밀어 프로이센군 말판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낭시의 국민방위대가 프로이센군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다면 가능합니더.”

“······5천으로 5만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맞서는 게 아이고. 시간을 끄는 겁니더. 그리고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악으로 깡으로 시간은 끌 수 있을 겁니더.”

“왜지요?”

“낭시 지역사령관이 뒤무리에 장군이니 당연하지예.”

나폴레옹은 지휘봉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

프랑스 왕국, 낭시.

국민방위대 지역사령부.

“······씨발. 씨발!!”

“장, 장군님. 언행을 조심ㅎ···.”

“닥쳐! 다 나가!”

“예, 예!”

반짝반짝 빛나는 별 하나의 위엄에, 사령관실은 순식간에 텅텅 비었다.

“이, 이 프로이센 개새끼들! 갑자기 왜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혁명군의 충실한 딸랑이, 왕당파의 적, 프랑스 국민의 영웅, 뒤무리에 준장은 책상을 엎어버리며 소리쳤다.

반혁명인 프로이센군이 혁명군을 하나라도 살려둘까?

아니. 나머지를 다 살려둔다고 해도, 배신자인 뒤무리에는 무조건 처단하려 들 게 불 보듯 뻔하다.

무조건. 무조건 프로이센을 막아야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 나갔던 놈들 다 들어온다, 실시!”

“““예, 예!”””

하늘처럼 높은 별의 말에, 밖에 서있던 장교들이 다시 헐레벌떡 들어왔다.

“뭣들 하고 있나! 당장 병력 다 데리고 밖에 나가 전장 개척에 들어간다! 실시!”

“하, 하지만 정부로부터 아직 받은 예산도 물자도 없습니다. 장군님!”

“들어가는 자재는 내 사비로 대신 결제한다, 그러니까 닥치고 밖에 나가!!”

“““예! 사령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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