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선전포고 (5) (111/341)

선전포고 (5)

1791년 4월 1일.

프랑스 왕국.

파리 외곽.

차디찬 겨울이 지나고, 봄의 새순이 이곳저곳에서 푸르게 자라날 시기.

“공작님, 저기!”

“봤습니다, 봤어요!”

영국인은, 앞으로 다가올 제 운명도 모른 채로 유유히 발굽을 옮기는 사슴을 향해 총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항상 그렇듯, 총이 떨리지 않게 숨을 참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기를 잠시.

장인이 손수 한 땀 한 땀 노력을 기울여 판 영국제 강선 소총이 불을 뿜었다.

탕!

“르브렁 장관님, 맞았습니까?”

“맞은 것 같은데... 아, 저기 쓰러지는군요. 명중입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 사냥감이 피를 흩뿌리고 간 흔적을 따라 고삐를 휘둘렀다.

그 흔적의 끝에는, 아직 절명하지 않은 사슴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야... 이거 제대로 목을 맞추셨군요. 역시 서덜랜드 공작님 실력은 대단하십니다. 한 발, 한 발이 모두 명중탄이니 원. 저는 도저히 못 따라가겠습니다그려.”

“하하, 이상하게 오늘은 평소보다 총이 잘 맞는군요. 그러면 제가 두 마리 더 잡았으니, 오늘 내기는 제가 이긴 겁니다? 어젯밤 제 무모한 도박으로 죽은 체스 말들도, 이제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군요.”

“이런. 어제 체스에서 진 보복을 철저하게 하시는군요.”

“하하. 제가 그것 때문에 밤사이 칼을 갈고 나오긴 했지요.”

영국 특명전권대사 서덜랜드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저 멀리서 뒤따르던 사환을 불러 사슴을 손질시키기 시작했다.

“자, 사슴이 어여쁘게 손질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 동안 산책이나 좀 하실까요, 장관님?”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공작님.”

두 사람은 손에 쥐고 있던 소총을 말 안장에 묶어놓고, 조그마한 물통을 하나씩 챙겨 길을 나섰다.

말이 물통이지 그 안에는 다른 게 들어있긴 했지만.

“장관님은 역시 포도주이신가요?”

“그러는 서덜랜드 공작님은 위스키이십니까?”

“역시 외교관답게 바로 알아맞히시는군요. 스코틀랜드 스카치입니다. 아무래도 전 포도보다는 보리가 좋더랍니다.”

두 외교관은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와 함께 한참을 걸어 사환들로부터 멀어져갔다.

“······이제 듣는 사람은 없겠군요, 장관님.”

“토리당? 영국 국왕 폐하? 아니면 윌리엄 피트 수상? 누구의 말씀이십니까?”

“모두라고 생각하십시오.”

영국인은 물통의 마개를 열어 스카치를 한 모금 삼키고 말을 이어나갔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곧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해올 겁니다, 장관님.”

“으음... 첫 마디부터가 꽤 무겁습니다, 공작님.”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부디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프랑스인이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는 그렇다고 치고, 프로이센은 왜 갑자기 그러지요?”

“폴란드라고 말씀드리면 될 것 같군요.”

“허.”

르브렁 장관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폴란드를 기어코 찢어먹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건가.

영국인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본국에서도 그에 대해 생각이 참 많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별 말 없습니까?”

“그쪽은 동맹군에게 군사적 지원은 하지 않되, 물자를 지원할 듯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신성로마제국도 상당히 내홍을 겪고 있으니 말입니다.”

프랑스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들어 올리는 영국인에게 또 한 번 물었다.

“영국이 전해주는 말은 그게 끝입니까?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할 예정이라는 것, 신성로마제국은 참전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요,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영국인은 걸음을 멈추고 프랑스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프로이센군의 네덜란드 독립운동 진압이 곧 끝날 것 같다는 첩보입니다.”

“······네덜란드에 주둔해 있는 프로이센군은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라는 프로이센 기병 중령이 지휘하는 정예병 5천입니다.”

“상당하군요.”

“프로이센이 네덜란드를 경유할 수 없도록 우리 영국이 외교적으로 수를 써보기는 하겠습니다만, 혹시라도 조심하시라는 의미입니다.”

“음.”

르브렁 장관의 눈가가 잠시 찌푸려졌다.

정예병 5천. 그것도 프랑스 북부 네덜란드에 주둔하는 기병대.

유격전에 능한 기병들이 프랑스 북부 곳곳을 송곳으로 찌르듯 들어온다면 상당한 타격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르브렁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눈앞의 영국인을 향해 물었다.

“만약 우리가 반격한다면, 영국은 어느 정도까지를 적정하다고 보십니까?”

“국왕 폐하께서는 프랑스가 자위(自衛)권을 지킬 수 있는 정도까지, 우리 토리당과 피트 수상은 프랑스가 라인 강을 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영국은 중립입니까?”

“글쎄요. 중립이라...”

서덜랜드 공작은 스카치를 다시 한 모금 넘기곤,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균형의 수호자라고 말씀 드리죠.”

***

1791년 4월 2일.

이야... 다녀가신 분들의 면면들이 아아아주 화려하셔.

21세기로 따지면 국회의장, 국회의원,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 재무부 장관까지.

누가 여길 평범한 회사 사무실로 보겠나, 그것보다는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비밀결사 일루미나티의 회동 현장으로 볼 것 같은데.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내렸다.

“왜 그러십니까, 총감. 어디 아픈가요?”

“머리가... 아픕니다. 사령관님.”

“이런. 참으로 안타까워라.”

“별로 그렇지 않은 표정이신데요.”

“차가 참 좋군요.”

라파예트 사령관은 차를 호로록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국민방위대 예산은 언제 주실 겁니까, 총감?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곧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한다지 않습니까.”

“짜낼 수 있을 만큼 짜내서 드릴 테니 좀 기다려보세요.”

기껏 만들어놓은 1년 예산안을 다시 뒤엎고 새로 예산을 짜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하여간 군인들이란, 돈 나와라 뚝딱! 하면 돈이 나오는 줄 아는 건가.

“그보다 적은 얼마나 올 것 같습니까, 사령관님.”

“참모부에서는 5만 정도로 예상 중입니다. 총감.”

“5만, 5만이라. 사령관님 생각에는 적이 어디로 올 것 같습니까?”

라파예트 사령관은 잠시 날 바라보던 시선을 떼고 먼 곳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메츠, 뫼즈-아르곤, 베르됭, 랭스 순으로 들어오겠지요. 적의 목표는 파리일 테니.”

“그렇군요.”

프로이센의 국경으로부터 프랑스의 수도 파리까지를 일자로 쭉 그으면 나오는 지역.

메츠, 뫼즈-아르곤, 베르됭, 랭스.

라파예트 사령관은 그 네 지역을 말하곤 침묵을 지켰다.

나는 종이에 숫자를 휘갈기던 펜을 옆에 살포시 놓고, 사령관에게 물었다.

“그 중 결전지로 생각해 놓은 곳이 있으십니까?”

“······베르됭의 산맥을 끼고 야전에서 붙는다면, 수적 우위를 통해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메츠에서 초전에 격파할 수는 없나요?”

“힘듭니다.”

라파예트 사령관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상비군이 20만이긴 합니다만, 전국 각지에 퍼져있지 않습니까. 적은 날카롭게 다듬은 5만이라는 병력을 한 점에 집중해 우리를 뚫으려 하겠지요. 우리도 그에 맞서려면 병력을 차출해 집결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병력을 집결시키면 치안이 불안정해지거나 타국의 군사적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우리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령관님.”

“예, 총감.”

“아무래도... 사상자가 많겠지요?”

라파예트 사령관은 잔에 남은 차를 한 번에 목 뒤로 넘기고는 날 다시 쳐다보며 말했다.

“총감. 난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입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멀쩡하게 돌려보내는 게 내 일입니다.

라파예트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

1791년 4월 중순.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치하. 네덜란드 공화국, 암스테르담.

프로이센 진압군 사령부.

“좋아! 혁명이니 독립이니 하는 놈들은 이걸로 다 잡아들인 것 맞나!”

“““예! 그렇습니다! 블뤼허 중령님!”””

“으하하!! 좋다! 좋아! 이 블뤼허와 용맹한 프로이센군이 있는데 어딜 감히 독립이니 뭐니 하면서 독일인들을 핍박하고 지랄이야, 이 오렌지새끼들이! 안 그런가! 제군들!”

“““그렇습니다!”””

콧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 기병 중령의 말에, 진압군 사령부 장교들은 절도 있게 대답했다.

상급자인 진압군 사령관, 블뤼허 중령에 대한 예우도 있었지만, 사실은 모두 예우보다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기병 중령.

귀족의 상징인 ‘폰’을 이름에 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치의 교양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놈 중의 상놈이자 프로이센군의 미친놈.

심지어 선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면전에 대고 사표를 던지기까지 한 미친놈 중의 미친놈.

장교의 기본인 독도법조차 알지 못하는 미친놈.

수천 명을 거느리는 지휘관인 주제에 맨 앞 전열에 서서 기병도를 빼들고 진격하는 미친놈.

귀족인 장교들은 짐짝이나 지도 읽어주는 기계로 취급하면서, 평민인 병사들에게는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들을 보는 것마냥, 호호-할아버지가 되는 미친놈.

얼마 전에도 병사들을 구박하던 한 장교가 저 미친놈에게 걸려서 대차게 정강이를 얻어맞지 않았는가.

그러니 블뤼허 중령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하는 일은 이미 프로이센군 장교들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결국 장교들은 부디 어서 이 점호시간이 가버렸으면 하고 얌전히 침을 목울대 뒤로 넘길 뿐이었다.

그때, 사령부 건물 밖에서 한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충성! 블뤼허 중령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께서? 병사! 이 블뤼허의 손에 그 편지를 당장 올려놓는다, 실시!”

“실시!”

중령은 병사가 건네는 편지를 받자, 편지 봉투를 손으로 북북 찢어버린 후 편지지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지금 중령님 몸이 떨리시는 것 같지 않나?”

“정강이에 군홧발 맞기 싫으면 조용히 하십시오, 대위님.”

장교들은 혹여나 편지의 내용에 블뤼허 중령이 광분하지는 않을까 하며 입을 살짝만 열고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흐...흐흐흐!!”

편지를 모두 읽어 내려간 듯한 블뤼허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눈을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블뤼허는 다시 눈을 돌려 자기 눈앞에 도열한 장교들을 보며 말했다.

“제군들!”

“““예! 블뤼허 중령님!”””

저 미친놈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하는 장교들의 목 뒤로, 다시 한 번 침이 꼴깍하고 넘어갔다.

“제군들은 우리 프로이센인의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나!”

“보, 복종입니다!”

“좋다! 다음은!”

“소, 솔선수범입니다!”

“그래! 그 다음은!”

“정복정신입니다!”

“으하하하! 그래! 그렇지! 그런 면에서 나는 나, 블뤼허와 제군들을 훌륭한 프로이센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닌가!”

“““맞습니다! 블뤼허 중령님! 우리는 훌륭한 프로이센인입니다!”””

"으하하하!!"

콧수염 중령은 크게 웃더니, 모두가 볼 수 있게 편지를 높이 들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께서 프랑스 공격을 명하셨다! 모두 군장 챙기고 행군 준비! 나, 인간 프로이센 블뤼허 중령의 뒤를 따른다!! 으하하하!!”

장교들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