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포고 (3)
1791년 2월.
러시아 제국.
제국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쉬(Эрмита́ж) 겨울궁전.
라임 색으로 벽을 칠한 에르미타쉬 겨울궁전은, 오늘도 백야(白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에 있는 자신이 이 도시의 이름에 걸 맞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순백색의 기둥과 고급스러운 금박으로 치장한 채 빛나는 제 모습을 온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에게 환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밖과 달리, 겨울궁전의 안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온 누리의 찬사를 받으시는 예카테리나 차르 폐하, 부디 다시 한 번만 숙고해 주시옵소서!”
귀족 국무원의 차기 수장으로 손꼽히는 남자.
이반 안드레예비치 오스터만 공작은, 눈앞의 예순 둘짜리 여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간곡히 말했다.
그러나 여제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듣기 싫소. 짐의 마음은 이미 확고하오. 이대로 프랑스의 저 역적도당들을 내버려두었다간, 농노들이 글을 읽고, 쓰고, 나중에는 정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생길 것이외다. 지금 어서 싹을 밟아두어야 하오.”
오스터만 공작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 그러나 이미 크림 반도 일대에서는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이 한참이옵나이다! 지금 전선을 두 개로 여는 것은, 우리 러시아 제국의 국력에 큰 해가 될···!”
“짐은 이미 듣기 싫다 하였소! 이반 오스터만 공작, 혹여 공작도 푸가초프 그 역적 놈처럼 짐을 능멸하는 게요? 아니면 기욤이라는 프랑스 인이 제 국왕을 두 번이나 끌어내린 것처럼, 짐도 끌어내릴 생각인 게요?”
“절, 절대 아니옵나이다! 차르 폐하! 소신이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외치는 오스터만 공작의 모습에, 예순 둘의 노회한 여우는 눈을 잠시 흘겨 뜨더니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소. 이제 짐도 피곤하니 이만 나가보시오. 알현은 이만 끝내겠소.”
“알겠사옵나이다! 예카테리나 차르 폐하.”
공작은, 확고부동한 전제권력을 휘두르는 여제의 뜻을 결국 꺾지 못한 채로 황금그림방을, 에르미타쉬 겨울궁전을 털레털레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스터만 공작? 차르께서 뜻을 물려주셨습니까?”
“정말 선전포고를 하시겠답니까?”
“공작, 어서 말씀해주시지요!”
오스터만 공작이 궁전을 나오자, 수많은 인사들이 몰려들어 입을 열고 물었다.
“······차르께서는 뜻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오스터만 공작은 눈을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몰려든 귀족들에게 말했다.
“허, 허어.”
“세상에, 세상에.”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를 어찌...”
열이면 열, 몰려든 귀족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차르의 뜻을 꺾지 못한 이상,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에게 전갈을 보냅시다.”
“수보로프 장군이요? 수보로프 장군은 이미 오스만과의 전선에 나가있잖습니까.”
“그리고 차르께서 신임하시는 총신이지요. 수보로프 장군도 프랑스와의 전쟁은 얼토당토하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장군이 차르께 직접 간청드리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남은 수는 없습니다.”
오스터만의 말이 끝나자, 곁에 있는 귀족들 또한 고개를 차례로 끄덕이며 호응했다.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권력에 대한 차르의 집착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이 상황에, 그 반란을 진압한 수보로프 외에 그 누가 감히 차르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는 말인가.
***
1791년 2월.
오데사, 이스마일 요새.
러시아 제국군 흑해방면 사령부.
얼마 전까지 오스만 튀르크 군의 초승달 깃발이 휘날리던 이스마일 요새의 깃대에는, 이제 러시아 제국군의 쌍두독수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쌍두독수리 밑, 러시아군의 사령부로 쓰이는 건물 안에서는 러시아어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장군, 차르께 부디 말씀드려주십시오! 여기서 양면전선을 폈다간 러시아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소.”
예순 둘의 나이지만 아직까지도 다부진 몸을 유지하고 있는 노장군은, 사절의 말에 손을 저으며 말했다.
“프랑스와 전쟁이라니요! 오스만을 아직 완벽하게 이기지도 못했는데, 프랑스까지는 어떻게 가고, 또 병사들은 어디서 충원한단 말입니까?”
“난 제국과 차르의 적에 총검으로 맞서는 군인이지, 숫자와 싸우는 행정가는 아니고. 말로 싸우는 정치인은 더더욱 아니오.”
“수보로프 장군!”
“난 할 말 끝났소.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안전한 귀향길 되시기를 바라오.”
“장군, 제발! 제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장군!”
“제군들, 이 신사 분을 수도까지 안전하게 데려다드리도록.”
수보로프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두 사람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사절의 양팔을 잡고 억지로 요새 밖을 향해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여간 정치하는 족속들이란, 말이 너무 많아. 안 그런가, 쿠투조프?”
노장군은 고개를 돌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 장군을 보고 입을 열었다.
“으음.”
“왜 그러나 쿠투조프? 자네도 저 치들처럼 프랑스가 두렵나?”
“글쎄요. 프랑스군이 두렵다기보다는, 거기까지 가는 먼 길이 두렵지요.”
별 두 개를 박아 넣은 견장을 찬, 마흔 여섯의 중년 장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진즉에 살 좀 빼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펑퍼짐해지니 먼 길 가는 게 무서워지지! 날 보게. 이 나이에, 총사령관이지만 매일 아침 병사들이랑 구보도 같이 뛰고, 체력단련도 같이 하니 몸이 이렇게 탄탄하지 않나.”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오십니까? 그리고 제가 아니라 병사들이 낙오하지 않을까-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 그래. 내 자아알 알겠네. 하하하.”
“······.”
쿠투조프는 당장 자신에게 빈정거리고 있는 눈앞의 노장군을 향해, ‘총사령관이 매일 같이 구보를 뛰니, 장병들의 불평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런 불순한 마음을 참아내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수보로프 장군님께서는, 지금 당장 프랑스와 싸우는 걸 상정하고 계시는 겁니까?”
“자네 지금 무슨 소리하나? 지금 우리가 프랑스와 어떻게 싸우나? 저 오스만 튀르크와 싸우기 바쁜데.”
쿠투조프는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그러면... 아까 그 사절의 말을 듣고 차르께 말씀드렸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차르께? 하하. 글쎄?”
수보로프는 쿠투조프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측하나 하지. 내가 지금까지 수십 년간 보아왔던 차르시라면, 아마 지금쯤 이미 일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몰고 가셨을 걸세.”
“그게 무슨...”
“다들 차르께서 노쇠했다고 가볍게 보는 모양인데, 차르께서는 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수십 년간 자리를 지킨 사람이시네. 정치적 술수를 짜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국정을 바꾸기에는 도가 튼 사람이야.”
“······차르께서 바꾸는 건, 밤 시중 상대뿐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예끼 이 사람아. 농담도 참 살벌한 농담을 하는구만. 하기야, 살티코프 공작,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 그레고리 오를로프 중위, 포템킨 공작까지. 여제가 침대에 들인 남자 애첩이 많기도 하군.”
수보로프는 보드카를 꺼내 잔에 따르며 크게 웃었다.
“한 잔 들겠나, 쿠투조프?”
“장군님께서 주신다면야, 감사하게 받지요.”
“그래, 그래. 한 잔 받게. 이 따분한 전쟁터에서 즐길 거라곤 술뿐이지 않나.”
두 사람은 잔에 보드카를 가득 채워 짠-소리가 나게 부딪히고는, 러시아인답게 그대로 목 뒤로 그 독한 술을 모두 털어 넣었다.
“크으. 나쁘지 않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보게 쿠투조프. 내 아까 예측 하나 한다고 말했지?”
“예, 장군님.”
“좀 더 예측을 구체화해주겠네. 아마 지금쯤이면... 그래, 영국인들은 차르께서 보낸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겠군.”
“···영국인들 말씀이십니까?”
수보로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라면...”
“당연히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편지겠지.”
“···영국이 차르의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하하. 내가 그거까지는 알 수 있을 리는 없지 않겠나, 쿠투조프? 난 그저 러시아인 의 생리 밖에 알지 못해. 영국 놈들이 무슨 당이니, 무슨무슨 당이니 하는 것도 모르고. 그저 차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알 뿐이야.”
그리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까지. 수보로프는 덧붙였다.
쿠투조프는 까마득하게 높은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떻게 행동하실 겁니까, 수보로프 장군님.”
“군인이라면, 정치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차르의 명령이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을 높일 방법을 생각해야겠지. 미하일 쿠투조프 소장, 프랑스와 전쟁을 한다면 준비기간은 얼마나 걸리겠나.”
여태까지 장난스럽게 말하던 수보로프의 말투가 바뀌었다. 쿠투조프 또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진지하게 답했다.
“예, 총사령관 각하. 대략 1년으로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 흑해 방면군이 어서 빨리 귀환해야겠군. 5월까지 오스만 튀르크 야만인들을 크림 반도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7월내로 콘스탄티노플 앞까지 군대를 몰고 가면 튀르크도 우리에게 화평제안을 건넬 테니 군대를 바로 물리면 상당히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안 그런가?”
“맞습니다, 각하.”
“좋아. 오늘 저녁 식사 후 장교들을 소집하게. 속전속결로 마친(Măcin)을 뚫는다. 이상 전달 끝.”
“예, 각하.”
***
러시아 제국.
제국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쉬 겨울궁전.
차르의 비밀스러운 호출에 러시아의 춥디추운 새벽 밤을 뚫고 겨울궁전에 입궐한 주재러시아 특명전권대사, 찰스 허트워스 백작(Charles Whitworth)은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술에 다시 한 번 침을 바르고 입을 열었다.
“······예, 예카테리나 차르 폐하. 그 말씀은...?”
“왜 그러시오. 대사. 방금 짐이 한 말에 무언가 어폐라도 있었는가?”
“아, 아니옵나이다. 혹여 소신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사옵니까?”
“허락하겠소.”
“감사하옵나이다, 폐하.”
허트워스 백작은, 한참을 여제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시겠다는 말씀 말입니다... 정녕 사실이옵니까?”
“그대는 제국의 차르인 짐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오?”
“송, 송구하옵나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눈을 흘겨 뜨고 허트워스 백작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짐의 제안은 또렷하오. 만일 영국이 러시아의 대(對)프랑스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면, 우리 러시아로서는 동맹국을 만들기 위해 폴란드를 분할하여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에 넘기겠소.”
“폴, 폴란드라니요. 차르 폐하!”
“그러면 영국이 우리 동맹에 참여하면 되겠구려.”
“······본국에 알려 수상 각하의 동의를 얻어 보겠사옵나이다.”
“짐은 귀국 영국과 러시아가 좋은 동맹이 되리라 믿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