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포고 (1)
1791년 2월 5일.
프랑스 왕국, 파리.
우리의 혈압상승을 유발하던 주범, 고(故) 루이필리프 드 오를레앙 2세 씨의 시신이 장례식을 마치고 탕플 탑으로 끌려간 지도 이제 근 2주 째 들어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한사코 자기가 직접 장례식 미사를 맡겠다고 나선 시에예스 사제님께서 내게 말해주시길, 장례미사 중에 시체가 말을 하고 난동을 부렸다는데, 글쎄.
- 이제 우리는 루이필리프 드 오를레앙 대공과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습대로 이 육신을 땅에 묻으려고 합니다. 유족께서는 이 사람, 엠마뉘엘 시에예스 샤르트르 대주교를 통해 고인에게 하고 싶으신 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으아아!! 이놈들! 놔라!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냔 말이야!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흐음. 좀비도 아니고 어떻게 시체가 움직인담? 아마 헛소문이거나 누군가 허깨비를 본 거 아닐까.
“으흥흥. 으흠흠.”
아, 그보다 파리의 겨울하늘은 정말 높고 푸르구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절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야.
“······가끔은 네가 참말로 무섭다 아이가.”
“엥, 왜?”
“왜긴, 얼마 전에 사람 하나 통째로 담가버린 놈이 콧노래 부르모, 당연히 무섭게 느껴지지 않겠나. 내는 아직도 탕플 탑으로 다시 끌려가는 오를레앙 눈빛만 떠올리모, 식겁하다.”
“허, 그 무서운 사람이 몰래 꿍쳐놓은 포도주를 퍼 마시면서 그런 말하니까 하나도 진정성 있게 느껴지지 않는걸.”
나폴레옹 저 인간이 가져간 보르도 산 포도주와 우리 집 포도주만 해도 벌써 손으로 못 셀 지경이다. 저거 봐, 지금도 퍼 마시는 거.
“네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매. 그 말에 충실한 거제.”
“허,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대령 월급이 적지는 않을 텐데, 그냥 직접 사 먹지?”
“직접 사 먹어도 봤는데, 여기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아이가.”
“그건 또 뭔...”
설마 직접 끓여먹는 라면보다 남이 끓인 라면을 뺏어먹는 게 더 맛있다는 그런 이유이신가.
“그리고 대령 월급이 많아봐야 재무총감 월급보다야 적제. 너처럼 돈도 많이 버는 놈이 좀 노나 먹으면 어데 덧나나? 그래가지고 이 2700만 프랑스 인들을 어떻게 거느릴라꼬.”
“아니. 그거랑 형이 내 포도주 훔쳐 먹는 거랑 뭔 상관이야.”
“에잉. 괴테 선생님한테 사인 한 장 안 받아온 놈답게 속도 좁아 터졌고마.”
“거...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다고 했잖아. 연대장이나 된 사람이 왜 그렇게 쩨쩨하게 굴어.”
“이이잉, 마 됐다.”
“아유 손님, 그러시지 말고. 혹시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젠장, 내가 살다살다 나폴레옹 이 양반 삐진 거 풀어주려고 굽신굽신 댈 줄이야.
“······큼큼. 그라모. 저번에 먹었던 그 샹베르탱 와인인가 먼가하는 고거. 한... 두 병만 줘라.”
“여기 열쇠. 창고에서 알아서 꺼내 먹어. 난 또 나가봐야 되니까.”
“여윽시 우리 기욤이데이! 프랑스 최고의 성인군자! 혁명의 얼굴! 아아 드높아라, 기욤 드 툴ㄹ···.”
이 인간이 진짜.
“시끄럽고 빨리 가져가기나 해. 나, 이제 나간다.”
“어디 가는데?”
“베르사유.”
“허미...”
“영국 왕이 보낸 대사인지 뭔지 외교관이 와서.”
“그렇고마... 잘 갔다오래이.”
“적당히 꺼내 가시고, 적당히 마시고 가쇼. 그리고 빈속에 술만 마시지 말고, 뭐라도 집어 먹고 마셔. 그러다가 배에 탈난다.”
“예, 예. 명 받들겠습니더. 총감 각하.”
나폴레옹 형은 문을 열고 나가는 날 향해 실실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경례를 올렸다.
“오. 잘 지내셨습니까, 총감 각하.”
내가 마차에 오르자, 미리 마차에 타고 있던 듯, 르브렁 장관은 내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르브렁 외무장관님? 아니, 왜 파리까지 직접 찾아오셨습니까?”
지금쯤이면 베르사유에서 한참 영국에서 온 대사인지 공사인지 하는 사람하고 이러쿵저러쿵 떠드실 때 아닌가?
“하하, 총감 각하와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이렇게 파리까지 찾아왔습니다.”
“저와 긴히 할 얘기라니, 전 외교에는 문외한입니다만.”
내가 외교에 대해 아는 건, 영국은 아주 악독한 혐성국이고, 스페인은 18세기 판 그리스와 베네수엘라 급의 망가진 경제를 가진 국가이며, 독일은 지금 여러 개로 쪼개졌다는 것 뿐인데.
“외교에 문외한인 건 상관없습니다, 총감 각하. 지금부터 베르사유까지 가는 길에 제가 직접 차근차근 알려드릴 테니.”
“하아. 벌써 머리가 아프군요.”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내가 손으로 머리를 짚고 말하자, 르브렁 장관은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
“아, 그리고 총감께서 말씀한 그 사람 말입니다. 이번 사절에 같이 오셨다고 하더군요. 오늘 베르사유에서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쓰읍. 공부 열심히 할 이유가 생겼군요.”
***
영국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 수상 관저.
“차 향이 참으로 좋군요, 버크 의원.”
“···그리 한가로운 얘기를 하자고 만난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윌리엄 피트 수상.”
대영제국의 수상. 윌리엄 피트는 마주앉은 정적, 에드먼드 버크의 말에, 영국 신사답게 잔을 살포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중국에서 온 귀한 차인데, 음미도 못하게 하시다니. 너무 일에 치여 사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버크 의원.”
“수상 자리에 앉으면 그렇게 나태해지나 봅니다, 피트 수상.”
“···하여간 사람 참.”
십 수 년을 저 악독한 웨스트민스터에서 부대끼고 살아 온 정적답게,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안부보다 송곳 같은 정치적 공격이 더 기꺼웠다.
“프랑스에 관해 왜 그리 공격적이십니까, 버크 의원. 다 잘 됐잖습니까. 유혈 사태도 없었고,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영국에 이어 두 번째 명예혁명을 성취한 나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명예혁명이라, 글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지요?”
눈앞의 파릇파릇한 서른 한 살짜리 수상이 묻자, 예순이 넘은 노쇠한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는 입을 열고 말을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피트 수상. 그건 바로 무지몽매한 대중을 정치에 참여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를레앙 대공 그 자의 죽음에 얼마나 많은 대중들의 영향이 들어갔습니까? 아마 이루 형언하기 힘들 테지요. 수천, 수만 군중의 말에 휩싸여 프랑스 인들은 제 군주를 제 손으로 죽인 겝니다.”
“···오를레앙 대공의 목숨은 아직 붙어있는 걸로 압니다만.”
“흥, 수상은 그게 살아있는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탕플 탑에 유배된 채로 사회와 단절된 게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적어도 피는 안 흘렀지요, 버크 의원.”
수상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는 잠시 싸늘한 기류에 휩싸였다.
“그렇게 프랑스 혁명이 걱정되시고, 또 마음에 걸리시는 분이, 신대륙 13개 주가 독립하겠다고 발버둥 칠 때는 왜 지지연설을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그건 우리 영국이 신대륙인들에게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아 일어난 일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설마 그것도 이해 못하시는 건 아닐 테고.”
“당연히 저는 이해합니다, 의원.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 할 것 같습니다만.”
“대중과 영합하는 게, 얼마나 나라의 앞길을 막을지. 수상은 단순한 상상도 못하는 겁니까? 당신 때문에 이 나라의 미래에는 광부의 아들이 수상을 하고, 농부의 아들이 의원이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윌리엄 피트 수상의 눈가가 잠시 찡그러졌다가 다시금 원래의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지금 프랑스는 우리와 충분히 대화를 할 만큼 이성적이고 성숙한 자들이 국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버크 의원. 우리 토리당은, 그런 프랑스에 대해 당신들 휘그당처럼 무분별한 비난이나, 힐난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 프랑스는 우리 영국의 최우선적 적입니다, 수상.”
“견제를 하지 않겠다고는 한 적 없습니다, 의원.”
예순의 노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하! 번지르르한 말 하지 마시오! 미국독립전쟁의 패전 때문에 떨어진 인기를, 프랑스를 팔아 올려보겠다 이거잖소!”
“그렇게 패전, 패전 걸고넘어질 거였으면, 애초에 미국독립을 지지하지 마셨어야지!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전장에 나가는 레드코트들의 사기를 조지 워싱턴 그 자보다 떨어뜨린 장본인이 할말입니까?! 왜요? 진작 그렇게 대승적인 차원에서 협력했으면! 아메리카 식민지가 떨어져 나갈 이유도 없었을 텐데! 당장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 야당인 당신들만 노나는 거 아닙니까! 패전하면 모두 우리 토리당 책임! 이기면 휘그당이 토리당에 협력한 덕!”
‘하여간 토리당 놈들은...’
‘하여간 휘그당 놈들은...’
두 영국인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 노려보았다.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삼심대 초반의 젊은 영국인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각하. 전 그레이트브리튼의 국왕이시자 아일랜드의 국왕이신 조지 3세 폐하의 주재 프랑스 특명전권대사, 조지 레비슨 서덜랜드 공작입니다.”
“먼 길 오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덜랜드 공작님.”
“우리 영국 외교부와 윌리엄 피트 수상 각하, 그리고 토리당은 귀국 프랑스가 오를레앙 대공의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명예로운 자세와 태도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따름입니다.”
“하하, 공작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말인데, 이번 영국과 프랑스의···.”
하여간, 외교관들이란. 말이 정말 많아. 손 좀 놔주고 얘기하면 어디가 덧나나.
“외교 건은 재무총감 각하의 소관이 아니니, 저 르브렁과 함께 이야기 하시지요. 서덜랜드 공작님.”
“하하, 알겠습니다. 장관님.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총감 각하.”
“예, 부디 좋은 시간되시길.”
르브렁 장관, 그는 신인가?
나는 환영회에서 살짝 빠져나와, 미리 잡아놓은 응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총감 각하. 손님은 안쪽에 미리 모셔놨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외교부 직원은 날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응접실 문을 열어주었다.
응접실 안에는 쉰 정도의 중년 남성이 영국 풍 정장을 입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프랑스 왕국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선생님이라니요! 오히려 제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영국 <타임즈> 신문사 사장이자 편집자, 존 월터라고 합니다.”
"하하, 월터 씨. 저는 앞으로 우리 <포브스>와 <타임즈>가 항구적인 사업 파트너가 되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당연히 좋습니다, 각하! 무궁한 영광이고 말구요!"
이 맛에 재무총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