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빛나거나 미치거나 (7) (103/341)

빛나거나 미치거나 (7)

“뭐... 그렇게 됐습니다.”

“······사장님. 딱 한 대만 때리게 해주시면 안됩니까?”

“플로리앙 씨? 유리병은 놓고 얘기합시다, 우리.”

하하, 하여간에 장난이 참 심한 사람이라니까.

“그리고, 저도 여러분 과로사 시키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우리는 가족 같은 기업, 이삭의 민족 아닙니까. 곧, 재무부 직원들이 와서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흐음.”

“왜 그렇게 못미덥다 듯 쳐다보세요?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플로리앙 씨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올렸다.

“뭐, 일단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시민들 응대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사장님?”

“저번 축제 때 쓰던 노점 있죠? 그거 요 앞 마르스 광장에 깔고 몇 군데 손보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간단한 질문은 상담원들이 거기서 받아주고, 민감하거나 복잡한건 여기로 데려와서 제가 직접 설명해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분신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만나봐. 적당히 분류해서 걸러 만나야하지 않겠어?

“생각은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그보다 손보다니 어딜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사장님?”

“은행 창구처럼 구멍도 뽕뽕 뚫어놓고, 상담원이 앉아서 편하게 볼 일 볼 수 있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유리벽에 구멍 뽕뽕 뚫어놓고, ‘안녕하세요, 고객님. 네이션은행 땡땡땡 상담사입니다~.’ 얼마나 좋나.

“······잘 상상이 안 되는데요.”

“아, 왜 그 있잖···.”

나는 서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낸 후, 깃펜으로 대강 그림을 슥슥 그려나갔다.

음. 이정도면 누구한테나 보여줘도 다들 ‘은행 창구네요.’라고 하겠다.

다만 그 누군가가 21세기 사람들이라는 게 문제지.

“아, 이런 모양을 원하셨군요?”

“어떠세요, 꽤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거 은행 창구보다는 성당에 있는 고해성사실 같아 보이는 데요?”

“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

파리, 샹 드 마르스 광장.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이삭의 민족. 고객응대서비스 담당자,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아무거나 물어봐도 다 된다 이거지요?”

마흔 쯤 된 사내는 쭈뼛거리며 상담사, 바뵈프의 앞에 앉았다.

“예, 그렇습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혹시 내년에는 농사가 흉작이 오겠습니까요, 아니면 풍작이 오겠습니까요?”

“······예?”

“아니면은, 혹시 무슨 작물을 키우면 농사가 잘될지 알려주십쇼.”

“······죄송합니다. 그건 어떻게... 대답해드릴 수가 없네요.”

“아니, 다 물어봐도 된다면서!!”

“고객님, 저희는 이삭의 민족이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내년에 농사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해드릴 수가 없어요.”

“아아아니, 총감님이면. 나랏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신데, 왜 그걸 모르시답니까?”

“······그, 나랏님도 사람인데. 모든 걸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립니까? 나랏님이면 당연히 어떻게 될지 알아야지 원.”

“죄송합니다만, 농사는 이제... 기후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풍년이냐, 흉년이냐가 결정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그걸 예측하나요.”

“거, 원래 이맘때쯤 되면 신부님들이 다 점지를 해주셨다 아닙니까. 이러이러한 거 조심해라- 이런 식으로.”

“······.”

“아무튼 모른다 이거지요? 쩝, 시간만 버렸구만. 안녕히 계시구려.”

“······예, 안녕히 가십시오.”

바뵈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남자에게 말했지만, 남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젠장할, 이거 더 하다간 정말 사람이 미쳐버리겠어.”

바뵈프는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첫 날은 정말 좋았다.

바뵈프가 파리로 온 이유도, 사람들에게 뭔가 더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온 것 아니었나.

물론... 지금 이삭의 민족에서 하는 일도 나쁘지는 않지만, 사실 마음 한 구석에는 좀 더 중요한 일이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사장님이 시민들의 상담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만들었을 때 기뻐하며 자원했다.

- 그... 괜찮으시겠어요, 바뵈프 씨?

- 물론입니다, 사장님! 저 꼭 하고 싶습니다!

- 이미 맡고 있는 일도 상당히 벅차실 텐데요?

- 아닙니다! 둘 다 할 수 있습니다!

- 뭐... 알겠습니다. 의지가 워낙 굳어 보이시니.

“할 수 있긴 개뿔이.”

바뵈프는 일주일 전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면 할수록,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뺨을 있는 힘껏 때리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래, 인간불신증이라고 부르면 좀 알맞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첫 날은 정말 좋았다.

- 그... 저기 상담사 선생님? 정말 영국이 네덜란드를 공격했나요? 우리 삼촌이 네덜란드를 왔다 갔다 하는 화물선에 있어서...

- 하하, 아닙니다. 지금 유럽 국가끼리 벌이는 전쟁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 저도 라파예트 사령관님과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어디로 가면 입대할 수 있을까요!

- 마음은 기특하지만, 우리 꼬마 친구가 입대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보이는 걸요. 다섯 살만 더 먹고 오세요.

-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주가가 폭락할 거라고 하더군요. 혹시 재무부에서도 똑같이 생각하십니까?

- 전혀 그런 사실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휴우!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가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사람들이 안심하고 또 웃는, 정말 보람찬 나날이었다.

그런데... 셋 째 날부터 뭔가 이상한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죽은 프로이센의 전임 왕, 프리드리히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오?

- 아...마 맞을 겁니다.

- 으하하! 선생님 덕에 내기에서 이길 수 있겠군! 고맙소! 폴 이 새끼, 딱 대라!

- 앙투아네트 대공 부인이 정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친 게 맞나요?

- 소문에 불과한 일입니다.

- 에잉, 내 생각에는 그 독한 년이 훔친 게 분명해요!

- ···다시 말씀드리지만, 앙투아네트 대공 부인은 이미 결백하다고 밝혀진 일입니다.

- 이번에 기요탱이란 사람이 백신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맞춘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 소한테서 나온 고름이랍디다! 그걸 맞으면 사람이 소로 변한다고 하더라구요!

- ···백신이 우두에서 나온 것은 맞으나, 맞은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건 근거 없는 소문입니다.

- 아니, 정말이라니까요, 선생님!? 낭트에서 대낮에 정말루 어떤 사람이 소로 짠!-하면서 변하는 걸 사람들이 봤다고 했습니다! 역시나 백신인가 뭔가를 만든 그 에드워드 제너라는 영국 놈이, 우리 프랑스인들을 모두 소로 변하게 만들려는 속셈인 게 분명해요! 우리가 모두 소가 되면, 영국 놈들이 함대를 끌고 와서 파리를 태워버릴 겁니다!

- ······.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안이 해소되자, 사람들은 마치 불량식품을 먹는 것처럼 별의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끝없이 주워섬겼다.

어떻게 질문 수준이 첫 날 온 10살짜리 꼬마만도 못한지.

심지어 재무부에서 나온 옆 자리 상담원은, 폭행까지 당할 뻔 했다던데.

정말 끔찍한 나날이었다.

***

“행정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시민들의 불안도가 상당히 유의미하게 떨어졌다고 합니다. 사장님.”

“크으. 역시 나는 대단해.”

“······예, 뭐. 그렇긴 하죠.”

“하여간 플로리앙 씨는 칭찬에 너무 인색한 것 같아요.”

사람이 응? 좀 잘하면 북돋아도 주고! 그래야 좀 살맛이 나지!

“여어어억시! 재무총감 각하이십니다! 그 현명한 혜안! 시민들을 위하는 그 마음 씀씀이!”

“······칭찬에 인색한 게,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네요. 이보세요. 뒤무리에 장군님. 여긴 이삭의 민족 사무실입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사원만 출입가능, 모르십니까?”

“아니요! 당연히 알지요! 다만, 총감님께서 내뿜으시는 그 빛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르사유에서 루이 17세, 아니 오를레앙을 팔아넘긴 전직 근위대장, 현직 국민방위대 육군 준장 뒤무리에는, 손을 싸바싸바 비비며 말했다.

듣기로는 집이 낭트라, 파리에 지낼 곳이 없다던가.

아니. 지낼 곳이 없으면 베르사유에 방 많으니까 거기서 지내면 되는 거 아냐? 거기에 당신. 육군 준장에 근위대장 출신이면 돈도 많잖아, 저택에서 사시지. 왜 꼭, 굳이 내 사무실 맞은 편 집에서 하숙하는 건지.

“······쫓아낼까요, 사장님?”

“에휴, 됐습니다.”

“그 하해와 같은 마음씨! 역시 프랑스 인민들의 구세주다우십니다!”

시발. 나 이러다가 치질 걸리겠다. 진짜.

“플로리앙 씨?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나요?”

“예, 사장님.”

플로리앙 씨는 문을 열고는, 사무실에 나와 뒤무리에 둘 만을 놔두고 나갔다.

“뒤무리에 장군님.”

“예! 총감 각하!”

“저한테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시길래, 다짜고짜 근무시간에 찾아오십니까?”

“하하, 무슨 말이라니요! 이 몸, 뒤무리에! 저어어언혀 흑심 따위를 품고 온 것이 아닙니다!”

“······흑심 따위는 품고 오시지 않았다면, 일단 어떤 마음을 품고 오시긴 한 거네요?”

“하..하하하...”

분명 라파예트 사령관님은 뒤무리에 이 자가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말하는 거니, 행동한 거니 생각해보면 별을 군공이나 능력이 아니라, 정치질로 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오를레앙을 우리 국민방위대에 넘긴 건 잘한 선택이셨습니다.”

“그럼 당연하지요! 우리 프랑스에 필요한 건, 머릿속에 권력을 탐할 생각뿐인 돼지가 아니라! 재무총감 각하나 라파예트 사령관 같은 걸물이 아니겠습니까!”

“아잇 씻팔. 그만하세요 좀.”

“예, 옙. 각하.”

이렇게 나한테 담배 마렵게 하는 사람은 여태까지 라부아지에 말고 없었는데. 아, 한 명 더 있구나. 괴테 씨. 지금쯤 뭐하고 지내시려나. 할 수만 있으면 우리 잡지사로 스카웃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아무튼, 이제 제 찬양도 할 만큼 하셨으니, 뭘 원하셔서 그러시는지, 한 번 말씀해보세요.”

“그... 혹시 ㅅ···.”

“승진은 안 됩니다.”

장난하나. 우리가 당신의 뭘 믿고 소장 계급을 줘? 까놓고 판 읽다 불리해보이니까 우리 쪽에 오를레앙 던지고 백기 흔든 거 아닌가.

“하..하하! 무, 물론입니다, 총감 각하! 이 뒤무리에! 계급장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거 말고 ㅅ으로 시작하는 게 뭔데요.”

“당연히 승진이 아니라, 이번 ‘승전행사’에 저 또한 참석하고 싶다-이 말이었습니다!”

“······승전행사요?”

“예에, 그렇습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께서 지금 승리를 거두고, 파리로 귀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비루한 저이지만,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꼭 참석하고 싶습니다!”

“흐음.”

거기 참석하는 것 정도야 뭐.

“대신 혹시 모르니 무장은 모두 압수할 겁니다.”

“당연하지요! 총감 각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볼일 다 보셨으면 이제 나가셔도 되는ㄷ···.”

“예! 나가겠습니다, 각하! 부디 만수무강 하십시오!”

“······아, 예.”

***

뒤무리에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 유능한 뒤무리에가 별 볼일 없는 뒷방으로 사라질 수는 없지! 하하하!”

승전기념일에 라파예트와 기욤 그 두 자의 옆에 나란히 선다면, 시민들에게 이 뒤무리에가 혁명군임을 각인하는 게 얼마나 쉽겠나.

그래, 나는 사실 왕당파가 아니라, 혁명군이 잠입시킨 딸랑이였던 거란 말이지.

“시민들이여, 나는 처음부터 진성 혁명파인, 빨갱이 샤를프랑수아 드 뒤무리에였던 거다. 으하하하!!”

밖으로 나온 뒤무리에는 크게 웃었다.

몇 카락 남지 않은 그의 정수리가, 환한 여름의 햇살을 받아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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