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거나 미치거나 (6)
101화 빛나거나 미치거나 (5)의 내용이 11월 21일 새벽, 다시 한 번 수정되었습니다. 독자님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
이건 거짓말이야.
거짓말인 게 분명해.
분명 어두컴컴했어야 할 밤하늘 곳곳에, 번쩍이는 붉은 섬광이 별빛 대신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을 배경으로 삼던 그 섬광은. 이제는 루이 17세의 눈동자 또한 도화지 삼아, 똑같이 제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폐하, 한시바삐 피하셔야합니다! 이미 낭시에 있던 군은 와해됐습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뒤무리에 장군!”
루이 17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부축하는 뒤무리에의 어깨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혁명군이 우리의 반란계획을 눈치 챈 듯 싶습니다! 폐하! 어서, 지금 이러고 계실 시간이 아닙니다!”
“근, 근위대! 근위대를 부르게, 뒤무리에 장군!”
“이미 근위대는 혁명군과 교전 중입니다, 폐하!”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단 말이오. 이럴 수는···!”
대체 어디서 비밀이 새나갔다는 말인가. 누가, 그 누가 비밀을 역적도당들에게 일러바친 건가.
콰쾅!
“어, 어이쿠!”
거대한 포성에 루이 17세는 들고 있던 황금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폐하, 어서 이리 오시지요! 스위스 근위대가 시간을 벌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알, 알겠네!”
왕의 상징인 왕관과도 같은 지팡이가 주인 없이 홀로 외로이 데구르르 굴러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루이 17세는 그 거대한 몸을 이끌고 전쟁의 방을 나섰다.
탕탕탕!
방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귓가에 총성이 울린다.
아니, 이제는 누군가 내짖는 비명까지도 들리는구나.
루이 17세는 거추장스러운 망토도 바닥에 버리고 뒤무리에의 보조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아, 저 멀리서 붉은 섬광이 펑펑 터지는 걸 보니 아마 베르사유 궁전을 넘어 후원을 가로지르고 한참 달려온 모양이다.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폐하!”
“도, 도착했다니 무슨 소리요, 장군?”
근위대장은 자신에게 묻는 주군의 말에도, 별다른 대답 없이 계속 주군을 데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폐하, 이 마차에 타시지요!”
“하아. 하아. 이건 대체 어디로 가는 마차요, 장군?!”
루이 17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무리에가 가리키는 평범한 목재 마차를 보고 말했다.
“아르투아 백작이 있는 네덜란드 국경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며칠 내로 네덜란드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폐하.”
“그대는, 그대는 실로 충신이구려! 그대는 나에게 미카엘 대천사요!”
“과찬이십니다, 폐하.”
“어서 그대도 타시오, 한시가 바쁘다고 하지 않았소.”
“전 남은 병력을 끌고 뒤를 엄호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소관의 걱정은 마시고 먼저 가시지요.”
“그, 그렇소?”
뒤무리에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루이 17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알겠소. 부디 조심하시구려.”
“예, 폐하. 마부! 출발하시게!”
“예이!”
묵직한 마차 바퀴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수수한 목재 마차가 길을 따라 저 멀리 사라졌다.
“쯧. 아무래도 난 연극하고는 별로 안 맞는 것 같군.”
뒤무리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오를레앙, 그 동안 나한테 신세 많이 졌으니 나도 댁 신세 한 번 지겠소.”
오늘따라 시가가 참 향긋한 뒤무리에였다.
***
그래, 네덜란드로 가면 아직 늦지 않았다.
유럽의 군주들에게 이 역적도당이 하는 짓을 상세히 알리고, 공동으로 위험에 대비하자고 주창한다면 마지막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을 수 있다.
아르투아 그 병신처럼 행동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겠지.
곳곳에 벌레가 먹었지만 아직 새 목재로 갈아 끼우지 않은 듯, 허름한 마차 안에서 휘황찬란한 금빛 비단옷을 입은 루이 17세는 손으로 턱을 짚고 생각했다.
“어억!”
그때 마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루이 17세는 턱을 짚던 손이 미끄러져 자신의 눈가를 스스로 때리고 말았다.
눈가가 얼얼하다.
“이, 이... 마부! 갑자기 멈추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왜긴, 목적지에 다 도착했으니 멈추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건가, 목적지는 네덜란드일세!”
그 순간, 마차 문이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무, 무슨!”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젊은 영관급 장교를 보고, 오를레앙은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 놈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누군지 알다마다. 국가내란을 꾀한 오를레앙 당신을, 국민방위대 소령 루이 니콜라 다부의 이름으로 긴급체포한다. 제군들, 끌어내도록.”
“““예, 소령님!”””
“으아아, 이 역적 놈들 놔라! 놔라! 저리 꺼지란 말이야!”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되시는군. 오를레앙. 뒤무리에 장군이 당신을 팔았소. 그만 얌전히 들어가시지.”
“뒤무리에...? 뒤무리에! 뒤무리에 이 노오오옴!!”
내 그렇게 중용해줬건만! 배신자는 네놈이구나! 이 뻔뻔스러운 작자!
파리 3구, 탕플 수도원의 탕플 탑에 새로운 입주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1790년 8월 17일.
프랑스왕국 파리.
이삭의 민족 사무실 겸 임시재무총감실.
과연 내 직업은 뭘까.
사업가인가 아니면 공무원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금 이걸 저보고 사람들 앞에서 읽으라니, 제가 무슨 독재자라도 된답니까?”
나는 혀를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독재자-라... 하기야 어떻게 보면 독재자가 맞는 것 같기도 하군요. 시민들의 지지율을 독재하고 계신 분이니 말입니다.”
“아니, 지금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탈레랑 의원. 이거 완전 계엄령 아닙니까? 시민들이 안정하기는커녕 우리 이삭의 민족 창문을 깨고 들어와 간편식사나 안 훔쳐가면 다행이겠네요.”
“하하하.”
탈레랑 씨. 피식피식 웃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아니 말 잘한다고 해서 데려왔더니 하는 짓이 ‘자꾸 그러면 다 밀어버리겠다.’ 말고 없어.
“제가 탈레랑 의원을 왜 여기로 불렀죠?”
“총감 각하께서 외국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으로 불안해하는 시민들을 안심시킬 연설문을 쓰라고 하셔서 그렇지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야 난 모르는 줄 알았지.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래?
“말이란 게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계엄령은 아니고, 그에 준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냥 말장난이잖습니까.”
“원래 정치와 외교는 다 말장난입니다, 총감 각하. 알겠다는 말은 고려해보겠다는 말이고, 고려해보겠다는 말은 안된다는 말이며, 안된다는 말은 해서는 안되는 게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불안하게 만들 건덕지가 있는 건 안됩니다.”
“흠. 제 생각에는 상당히 유하게 쓴 겁니다만, 총감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참나 유하게는 개뿔. 시중에 떠도는 소문은 모두 허무맹랑한 개소리니 만약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면 헌병대로 두들겨 패겠다는 게 어딜 봐서 유해?
하여간 영아사망률이 60퍼센트가 넘으니 아이를 열 명 넘게 낳고 그 중 두셋만 살아남아라하는 시대, 서로 의견 안 맞는다고 권총 뽑아들고 상대 미간에 가져다 쏘는 시대 아니랄까봐 유함의 기준이 남다르다.
이 사람이 왕당파들 전향시킨 것도 사실은 권총을 들고 가서 머리에 겨누고 ‘전향할거냐 말거냐, 5초! 4초! 3초!’-이랬던 거 아닐까.
“그러면 이건 어떠십니까?”
내 뚱한 얼굴을 본 탈레랑 의원은 종이에 뭐라뭐라 적더니 내게 건넸다.
“어디... 아니 시발. 단어만 달라졌지 똑같잖아요!”
“하하하.”
“이거 말고 쓸 다른 내용은 없습니까?”
“고려해보겠습니다, 총감 각하.”
“···고려해보겠다-는 안된다는 뜻이라고 아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젠장, 그냥 내가 써서 읽는 게 훨씬 낫겠다.
***
샹 드 마르스 광장 뒤편.
“시에예스 사제님. 사람들은 어떻게, 많이 모였나요?”
“허, 기욤 자네가 연설을 한다는데 아마 다들 일도 미뤄두고 나오지 않았겠나? 벌써 프로이센군이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했다니 뭐니 허무맹랑한 소문이 퍼지는 시국에 재무총감이나 되는 자네가 직접 나와 이렇게 말을 해준다니 말 다했지.”
“그도 그렇겠군요.”
불확실한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데 행정부 장관이 나와 총대매고 말하면 그 누가 듣지 않으려하겠나.
“의회는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어떻긴. 흉흉하지. 그래도 명색이 나라의 기둥이라 부르는 국왕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작살이 났는데 당연하지 않겠나. 왕당파 놈들은 찍소리도 못 내고 연일 두드려 맞기 바쁘고, 혁명파 쪽에서는 세력이 둘로 나뉘었네.”
“둘로 나뉘어요?”
시에예스 사제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고 말하셨다.
“오를레앙 놈의 거취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중일세. 오를레앙의 왕위를 박탈하는 것까지는 모두 공감하고 있네만, 그 뒤에 공석이 될 왕위와 오를레앙을 어떻게 처분할지가 문제가 되고 있어.”
“다들 골머리를 싸매고 있겠네요.”
시에예스 사제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우리 머리를 가장 싸매게 만드는 게 뭔지 아나, 기욤? 오를레앙을 폐위하고 그 자리에 왕족 중 누굴 앉힌단 말인가. 프로방스 백작? 아르투아 백작? 해외에서 연일 프랑스를 침공해달라고 질질 짜는 미친놈들을 세울 수는 없지 않나.”
“후우. 가슴이 답답한데 담배 한 번 피워도 되겠습니까?”
“이런 우연이 있나, 마침 나도 그런 기분인데. 같이 피우지.”
우리는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크게 한 입 들이마시었다,
갑갑했던 가슴에 니코틴으로 칠 좀 하니 살 것 같네. 뭉게뭉게 담배연기야 사랑한다.
“오를레앙을 폐위시키는 건 그렇다 쳐도 처분한다는 거 말입니다. 혹시 죽인다는 겁니까?”
“···.”
말없이 담배 파이프만 물고 계신 걸 보니 맞구만.
“보나마나 로베스피에르 의원이죠?”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나?”
“제가 그 사람을 좀... 많이 알지 않습니까.”
우리 로 선생님. 잘 알지. 알고말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오를레앙 그 자는 머리를 잘려도 싸. 그런데 그 자 머리를 자르면 그 뒤엔 어떻게 되겠나? 바로 전쟁이야 전쟁.”
“자르자는 쪽과 자르는 건 어렵다는 쪽의 비율은 몇 대 몇입니까?”
“지금은 백중세지만 급진파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네.”
사제님 말을 듣다보니 벌써 파이프의 잎이 다 타들어가고 있었다.
“일단은 나중에 더 얘기하시지요. 청중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그래, 알겠네. 어차피 하루아침에 결정될 일도 아니니.”
나는 품에서 고이 접어둔 연설문 쪽지를 꺼내 연단 위로 올라갔다.
“기욤 총감 각하! 소문이 사실입니까!?”
“프로이센이 스트라스부르를 넘었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부디 답해주세요, 총감님!”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고 연설문을 차분히 읽어내렸다.
“저, 기욤은 여러분께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시민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 국민방위대는 엊그제, 낭시에서의 치열한 전투 끝에 루이 17세의 반란군을 격퇴했습니다. 곧, 라파예트 사령관이 개선식을 치르기 위해 귀환할 겁니다.”
“예?”
“무, 무슨?”
“···.”
갑작스러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충격적인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이 충격적인 사실을 여러분들께 알려드리는 것은, 바로 한 가지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함입니다. 바로 제가 여러분들께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독일인들이 국경을 넘었다고요? 거짓말입니다.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은 우리 국민의회에게 다소 과격한 외교적 수사를 취했을 뿐, 군을 움직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문을 퍼트린 건 누구일까요. 바로 국경에서 왕당파를 이끌며 하루가 멀다 하고 헛소리를 지껄이시는 아르투아 백작이십니다.
시민 여러분.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이곳 마르스 광장에 서서, 바스티유에서 아스라져간 우리의 이웃을 기리자고 말했습니다. 악랄한 자들의 거짓 농간에 놀아나 우리가 겨우 쟁취한 이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야 말로, 그 열사들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있는 이삭의 민족 사무실을 개방해놓을 테니, 부디 국정에 관해 궁금하신 게 있다면 직접 찾아와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비록 제가 모든 사람들을 만나볼 수는 없겠지만 제가 만나 뵙는 모든 분들의 질문에 진실로써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