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거나 미치거나 (1)
“···.”
“앉아서 얘기해도 되겠나, 드제?”
“절 친혁명파라면서 쫓아내실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그래, 내가 자네를 쫓아낸 건 맞지. 아이고, 이 의자 되게 편하구만? 자네가 가져온 건가 아니면 원래 별궁에 있던 건가?”
“지금 절 놀리려고 오신 겁니까, 준장님?”
“놀리다니 무슨, 자네도 오십 줄 되보고 나서 말하게. 젊을 때랑은 몸이 다르다 이 말이야.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자네도 자리에 앉게.”
뒤무리에는 모자를 벗어 의자 옆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보게 드제.”
“예, 뒤무리에 준장님.”
“내 자네에게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이미 절 이곳에 가둬놓으셨으면서 제게 더 바라는 것이 있다니 당혹스럽군요. 탈출시도를 안하는 것 만 해도 이미 다행 아닙니까?”
“하, 천상군인인 자네가 명령을 어기고 탈출시도? 내 그걸 믿을 바엔 차라리 기욤 재무총감이 왕당파라는 걸 믿겠네.”
“···준장님, 혹시 별을 입으로 따신 거 아닙니까?”
“하하, 하여간 재미있는 친구야.”
뒤무리에는 피식 웃었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좋아, 농담은 여기까지 하지. 부근위대장 앙투안 드제 소령.”
“···.”
“앙투안 드제 소령, 국왕 폐하를 진심으로 섬길 마음은 들었나?”
“몇 번이나 그렇게 여쭤보셔도 전 오직 프랑스와 국민들의 안전을 섬길 뿐입니다. 준장님.”
“···그래?”
“그렇습니다.”
“목숨을 잃는다 해도?”
뒤무리에는 그 말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드제를 겨눴다.
“···군인이라면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겁니다.”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으나, 드제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떨림이 없었다.
“하하! 좋아! 역시 군인이면 자네 같은 마음가짐은 돼야지! 그 머저리 놈들과 머리 맞대고 받았던 짜증이 확 날아가는구만.”
환하게 웃는 뒤무리에는 권총을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이보게 드제. 내 딱 까놓고 얘기하지. 루이 17세. 그러니까 오를레앙은 지는 해야. 아니 지는 해가 아니라 추락하는 해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은 왕당파 아니셨습니까?”
난데없는 뒤무리에의 목소리에 드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왕당파하면 뒤무리에, 뒤무리에하면 왕당파 아니었나?
“하, 왕당파는 무슨.”
“···?”
“별 하나 더 달 기회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난 처음부터 왕당파니 혁명파니 그런 거엔 관심 없었네. 어쩌다보니 기류에 휩쓸려 왕당파 쪽에 선 것 뿐이야.”
뒤무리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애초에 항상 이기는 쪽에 편승해 별까지 단 자신 아닌가.
난생 처음 겪는 혁명이라는 사건 아래 어느 쪽이 이기는 지에 대한 탐색이 너무 길었을 뿐, 오를레앙이 지는 쪽인지 알았다면 같은 배에 탔을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제 목숨까지 내걸고서 충성을 바칠 이유 따위도 없었고.
“그런데 말이야. 그 루이 17세가 의회를 무력으로 깔아뭉개려하고 있네. 파리도 겸사겸사 밟아주려 하는 건 물론이고. 그렇게 되면 자네가 생각하기에 어떻게 될 것 같나?”
“피바람이 불겠군요.”
“피바람? 피바람은 무슨, 내가 봤을 때는 국왕과 시민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는 죽고 죽이는 게 계속될 걸세. 내기해도 좋아.”
“그런데 왕당파에 병력은 있습니까?”
“국내에 2만. 거기에 국경에서 아르투아 백작이 이끄는 탈영병과 귀족들의 용병까지 합하면 대략 3만 정도.”
“그렇다면 나름 승산은 있어 보입니다만.”
“승산? 하하! 승산은 무슨.”
뒤무리에는 한참을 웃다가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국왕이 지는 해라고 하지 않았나. 이건 딱 봐도 질 싸움이야. 내가 야전과 병참부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그걸 모르겠나. 자네는 라파예트가 이끄는 군대를 아르투아 백작, 그 얼간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보나마나 플랑드르 국경 즈음에서 작살이 나겠지.
국내에 있는 2만? 하! 국민방위대가 랭스와 트루아를 틀어막고 버티면, 베르사유에서 홀로 버티는 근위대가 전멸하기 전에 도착은 할 수 있겠나? 애초에 방어선을 뚫지도 못할 걸.”
뒤무리에는 시가를 꺼내 촛불가위로 끝을 자르곤, 성냥으로 불을 붙이며 말했다.
“자네는 아직 젊어서 모르지만, 장군이라는 직위가 되고 나이를 먹으면 육감이라는 게 요동칠 때가 있네. 그리고 그 육감은 지금 내게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뒤무리에는 시가를 폐 깊은 곳까지 흡-하면서 들이마시었다가 다시 내뱉으며 말했다.
“게다가, 기욤 재무총감이 서슬 퍼런 눈으로 왕당파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고 있단 말이네.”
“···기욤 재무총감이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 자가 얼마나 약삭빠르고 무서운지 아나? 겨우 19살 핏덩이가 그 정도로 정치적 술수에 능하다니. 젠장, 생각만 해도 손이 덜덜 떨리는군.”
“대체 총감이 뭘 했길래 그럽니까? 협박 편지라도 보낸 겁니까?”
“···식사를 했다네.”
“예?”
드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아니 식사가 뭐 어쨌다고. 사람이 어떻게 밥 안 먹고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왜, 이해가 안가나? 하하, 자네는 별은 못 달겠구만. 그 자가 식사한 곳이 팔레 르와얄 앞이라네. 그래! 오를레앙 그 자의 저택 바로 앞 말이야. 호위도 없이 두 번씩이나 왕당파의 앞마당을 유유히 산책하고 지나갔는데, 그게 무언의 협박이 아니면 대체 무언가.”
쓰으읍.
후우.
“그러니 난 자네가 필요하네.”
다시 한 번 시가를 깊게 빨아들인 뒤무리에가 이어 말했다.
“별궁에 처박힌 제가 뭘 할 수 있다고, 장군님께서 직접 이러십니까?”
“자네는 여타 근위대들과 달리 결백하니까. 국왕이 바뀌고 나서 근위대에서 축출된 자네라면 혁명파들도 일단 말을 들어는 주지 않겠나.”
근위대의 재편과정에서 기존 루이 16세에게 충성을 바치거나 조금이라도 친혁명낌새가 보이면 직위해제를 때린 결과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뒤무리에는 시가의 힘과 삶의 활로가 보이는 듯 하자, 이제 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 했다.
“이건 내가 몰래 만든 상세한 작전 개요도일세. 자네가 이걸 가지고 기욤 재무총감에게 가져다주게. 그 자라면 내 전향을 잘 알아 줄 거야.”
“그러면 전 뭘 얻지요?”
“뭐긴, 내 이 갑갑한 별궁에서 빼내줌세. 그리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요양도 할 겸 고향에 잠시 내려가는 건 어떤가?”
“···약속하신 겁니다, 준장님.”
“자네 손에 내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길 수야 있겠나.”
***
1790년 7월 말.
프랑스 왕국 파리.
“그래가꼬! 내가 딱 말했제! ‘포도탄을 준비하라!’ 크. 다시 생각해도 쥑이네!”
“와 한 번만 더 들으면 진짜 백번 채우겠어. 제발 그만 좀 해애애애.”
“마,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포도 좀 풀고 그래야 하지 않나!”
회포? 회포를 풀자고?
아 회포 풀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근데 왜 술집에서 푸는 게 아니라, 내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내 포도주 시크릿 에디션을 마시면서 푸냐고. 그것도 대낮에 말이야.
“그냥 오툉에 처박혀있지 파리에는 대체 왜 올라온 거야아악.”
그것도 그루시 저 인간은 왜 데리고 오는데.
저 인간이 이틀 동안 먹은 감자튀김만 10인분 째다. 아아 세상에 회사 재고자산이 하늘로 날아가고 있어!
“여긴 오스트리아도 아닌데 대체 왜 역청야전술을 펼치는 거야?”
“무슨 소리인가 기욤! 군인은 항상 배를 든든하게 채워둬야 야전에서 활약할 수 있다네!”
“차라리 이상한 이유 대지 말고 그냥 먹고 싶어서 먹는다고 하면 안 될까.”
“그러면 기욤 자네도 같이 먹자고, 자. 찍어먹게나 기욤, 토마토 소스라네!”
···아 겉은 촉촉하고 안은 바싹하게 튀겨버리고 싶다.
신이시여. 왜 제게는 상태창을 주시지 않은 건가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보면 꼭 상태창을 열어서 마법도 푸슝푸슝 날리고 그러던데.
나는 뭐 환생 특전 같은 거 없나?
“마, 뭔 생각을 그리 오래하나? 그 보다 내 견장 좀 봐도! 어때 멋있지 않나?”
“와아 황금색 너무 멋있다 와아.”
“대령이다 대령!”
“와아 나는 소위인데 정말 대애애단해.”
“하하! 그러제?”
“거 보나파르트 대령님? 대낮부터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거 같은데, 저어어기 의자에 자빠져서 잠이나 주무셨으면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히히, 코르크 마개 발사!”
음, 이제는 내말은 들리지도 않나? 아예 입을 병에 대고 병나발을 부시는군.
그러고 보니까 저거 탈레랑 의원이 준 프로방스 산 로제 와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얼마짜리였더라?
아 몰라. 탈레랑 의원한테 나중에 물어보고 그 만큼 외상으로 달아 놓지 뭐.
똑똑똑
젠장, 병나발을 부는 취객과 끊임없이 뭘 먹어대는 돼지 다음에는 대체 어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실까.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말했다.
“누구십니까? 오늘 이삭의 민족은 휴일인데요.”
“···기욤 재무총감 맞으십니까?”
대강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흑발의 남자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예, 그런데요?”
“소관은 앙투안 드제 소령이라고 합니다. 총감 각하.”
어쩐지 사람자체가 좀 딱딱하더라니.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뒤무리에 근위대장이 총감께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다.”
뒤무리에?
그 사람 수구꼴통 왕당파 대장 아닌가?
그런 사람이 왜?
***
자코뱅 수도원.
코르들리에 클럽.
“···사실인가? 확실한 사실이냔 말이야.”
“예, 에베르 선생님. 확실합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기욤 재무총감의 집에서 왕실근위대원이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왕실근위대원인건 어떻게 알았나?”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자의 뒤를 쫓았지요. 베르사유에 있는 별궁으로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요.”
사환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확신에 찬 채 말했다.
“···일단 알겠네. 잠시 나 혼자 시간을 좀 보내야겠으니 나가주게.”
“예, 선생님.”
사환은 에베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주먹을 쥔 자크 르네 에베르의 손을 부들부들 떨렸다.
아찔하다.
만약 그 위선자에게 감시를 붙여놓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어쩐지 신성로마제국에서 인민들을 도륙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구나.
역겹고 더러운 위선자 같으니!
앞에서는 시민들을 위한 척하면서 뒤로는 왕당파 같은 혁명의 적과 입을 맞췄던 거였어.
아니, 아니다.
애초에 부르주아고 귀족의 피 아니었나. 그래, 인민의 고혈을 빨아 배를 불리는 쓰레기들과 돼지들의 피가 섞인 놈.
기욤 그 놈은 원래부터 혁명의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혁명의 얼굴’이니 뭐니 그런 모습에 속아 넘어간 우리를 보고 역겨운 웃음을 얼마나 많이 삼켰을까.
하지만 나 에베르는, 기욤 그 놈의 거짓에 현혹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같은 놈들과는 다르다. 이놈.
“역시 인민의 족쇄는, 인민이 풀어야 하는 법.”
에베르는 책상에 놓아두었던 영국제 권총의 총신을 쓰다듬으며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