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춧돌 (6)
1790년 7월 16일.
프랑스 왕국, 트루아 시 근교.
국민방위대 참모부 막사.
“후우. 후우.”
“너무 긴장하지 말고, 어깨에 들어간 힘 좀 빼게. 보나파르트 대위.”
“예, 예! 참모장님!”
“허, 이 친구 기가 아주 바짝 들어 있구만. 어서 들어가게. 사령관님이 기다리시니.”
“충성! 대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령관님께서 부르셨다고 해서 방문했습니더!”
나폴레옹은 본부 막사에 달린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마치 갓 전입 온 신병마냥 빠릿빠릿하게 외쳤다.
아니.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터였다.
이곳은 하나같이 금색 견장과 휘황찬란한 훈장을 가슴에 꽂은 별들의 세계, 한낱 미약한 위관은 편히 숨조차 쉴 수 없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유성우들 사이에서, 어깨에 유일하게 푸른 십자가가 새겨진 샛노란 별이 일어나 말했다.
“아, 포도탄 대위!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소개부터 하지요.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질베르 뒤 모튀에라고 합니다. 귀관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저야말로 영광입니더, 사령관님!”
그림으로만 접했던 전쟁영웅이 건네는 손을 잡게 된 스물 한 살의 대위는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하, 역시 젊어서 그런가 말에서 힘이 넘치는군요. 여기 앉으세요, 대위.”
“예, 사령관님!”
“일단 목부터 축이고 얘기 시작하도록 합시다. 커피 괜찮나요?”
“아! 저는 커피 좋습니더.”
“혹시라도 커피가 아니라 포도주나 코냑을 좋아하면 그걸로 해도 됩니다. 장군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이라고 하면, 굳이 직접 챙기지 않아도 야전에서 좋은 술을 항상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장군이 되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말입니더.”
“하하,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보나파르트 대위는 제가 보기에 능력이 상당해 보이더군요.”
30만 프랑스군의 정점, 별 중의 별.
라파예트 사령관의 마지막 한마디에 나폴레옹은 눈이 퍼뜩하고 뜨였다.
“···제 능력이 상당하다고 하시면?”
“잠깐 실례.”
라파예트는 당번병이 가져다 준 포도주로 목을 축이더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입니다. 대위. 이번에 있었던 훈련보고서를 받아보고 검토해봤는데 병사 조련도 그렇고 상당히 인상 깊은 활약이 많더군요. 특히 탄종을 시시각각 골고루 갈아 끼우며 그루시 소령의 기병대를 시쳇말로 갈아 마셔버린 건, 처음 들었을 때 통제관이 거짓보고서를 제출한 건 아닌지 싶었습니다.”
목이 탄다.
하늘의 위, 천외천에서 반짝반짝거리는 고고한 별이 내리는 경건한 신탁에, 바짝바짝 목이 말라가는 나폴레옹은 뜨거운 줄도 모르고 잔에 든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안 뜨겁습니까?”
“괜찮습니더! 제가 원체 몸이 건강해가 원래 이렇게 먹습니더!”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만. 큼큼. 아무튼 저뿐만 아니라 참모부에 있는 장교들 모두 보나파르트 대위에 관해 좋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까, 대위?”
“잘은... 모르겠습니더.”
“하하, 편하게 생각하세요. 편하게. 보나파르트 대위에게 제가 주고 싶은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일단 들어보시고 원하는 쪽을 선택하세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나폴레옹에게, 라파예트 사령관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여주며 말했다.
“첫째. 현재 보나파르트 대위가 복무하고 있는 라 페흐 포병연대의 연대참모장을 맡는 선택지입니다. 정석적인 진급코스죠. 당연히 대위 계급도 그에 맞춰 소령으로 진급시켜드릴 겁니다. 다만 이후 소령에서 계급이 상당히 오랜 시간 정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스물 한 살에 소령이라는 계급을 다는 건, 진급이 보통 빠른 수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더.”
“좋습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번에 새로 창설할 연대의 연대장을 맡아보는 것 어떻냐는 제안입니다.”
“여, 연대장 말입니꺼?”
연대장이면, 대령?
군인들 중 다수는 쳐다도 못 보는 그 대령?
“당연히 전자의 경우처럼, 연대장에 알맞은 대령이라는 계급을 달아드릴 겁니다. 대신 이번 계급은 언제까지나 ‘임시’계급인 걸 잊지 마세요.”
“임시라면. 만에 하나 거둬 갈 수 있다는 뜻입니꺼?”
“그렇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렇다 해도 소령 계급으로는 진급시켜 드릴 테니. 대신 부대에 빈자리가 날 때까지는 자택에 대기발령을 낼 겁니다. 자택발령이면 그 동안 수당은 삭감되어 나오는 거, 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어떤 연대를 맡게 될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꺼?”
“지원병훈련연대입니다.”
가슴이 순식간에 짜게 식었다.
지원병훈련연대? 그거 한직 중 한직 아닌가.
이렇다 할 임무도 없이 하루 웬 종일 사회 물도 안 빠진 햇병아리 짬찌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기만 하는, 제식만을 위해 운영되는 부대.
장군 진급 각이 안 나오는 짬대령들을 위한 맞춤형 노인요양소.
지금까지 내게 유망하다고, 상당히 인상 깊게 봤다고 한 건 모두 거짓말이었나?
“훈련연대라고 해서 너무 안좋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보나파르트 대위. 지금 우리 국민방위대에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 훈련연대입니다.”
“···예?”
“보나파르트 대위도 병사들을 조련해봤으니 알겠지만, 지금 우리 국민방위대 병력 중 대부분은 얼치기입니다. 세상에 덧셈 뺄셈을 제대로 못하는 병사가 태반인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대위? 딱 잘라 말해서 지금 국민방위대는 숫자만 많은 바보들이나 다름없습니다.”
라파예트 사령관은 몸을 기울여 나폴레옹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얼치기 군대에 있는 어떤 포병대대는 포탄을 분당 한 발이 넘게 날리더군요. 숙련된 해군병들도 기본 1분 30초가 나오는 장전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하하, 보나파르트 대위의 모습을 보니 제 말이 해답이 된 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위? 라파예트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맡겨만 주신다면 세계 최강의 육군(Grande Armée)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더, 사령관님!”
“좋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령. 함께 잘해봅시다. 아 그리고 보나파르트 대령을 보좌해줄 부관도 미리 찾아놨습니다.”
“그렇습니꺼?”
“참모장님, 들여보내주십시오.”
“어디 누군지 한 번 볼...”
나폴레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나파르트 대령이 에마뉘엘 드 그루시 소령과 같은 기수이며 친하게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루시 소령이 직접 보나파르트 대령의 참모장을 맡겠다고 자원하더군요. 끈끈한 전우애가 참 보기가 좋습니다. 하하하!”
라파예트 사령관은 흐뭇하게 웃으며 수첩에 몇 글자를 적어나갔다.
[제 3 파리 지원병훈련연대 재편 완료.]
[연대장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령 / 참모장 : 에마뉘엘 드 그루시 소령]
***
1790년 7월 24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왕실근위대장실.
“이 상태로 승산은 없다. 만약 사태가 터지면 폐하를 호위해 무조건 방어선을 뚫어내고 낭시나 아르투아 백작이 주둔하고 있는 네덜란드로 빠르게 이동해야한다. 정 최악이라면 칼레를 통해 영국으로 배를 띄우는 수도···.”
“장군님,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을 이탈한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에 놓인 말들을 옮기던 뒤무리에의 손이 움찔하면서 멈췄다.
“···뭐라고? 귀관이 방금 내게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 번 말해주겠나?”
“폐하를 섬기는 근위대원으로서, 그런 생각은 패배주의적인 말이라고 사료됩니다. 장군님.”
“그렇습니다! 명예로운 근위대원이라면 모름지기 항상 이길 수 있다는 그런 정신력을 가지고···.”
“우리 왕실근위대는 그 프리드리히와도 맞서 싸운 정예입니다! 또한 불과 몇 년 전에는 영국 해적 놈들의 레드코트도 분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용맹함을 생각하고 있으시다면···.”
이런... 이런 미친 새끼들.
뭐가 어쩌고 저 째? 패배주의? 정신력? 용맹하아암?
정작 그 프리드리히가 살아있을 적에는 군문(軍門)에 발도 못 담궈봤을 피라미 새끼들이.
기껏해야 이제 막 스물이나 처먹었을 법한 놈들 주제에, 마치 제 놈들이 그 프리드리히니 레드코트를 상대한 것 마냥 운운해? 지금 장난하는 건가?
뒤무리에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 한 속을 겨우 참아내고, 눈앞에 도열한 장교들 중 가장 어려보이는 소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용맹이니 정예니 운운한 새파란 소위 말이다.
“···어이. 거기 자네.”
“예! 장군님.”
“이름이 뭔가?”
“예, 소위 위고 드 라입니다.”
“그래, 위고. 위고라... 나이는 어떻게 되나.”
“예, 올해로 스물 둘입니다.”
“스물 둘에 소위면 사관학교 출신이겠군. 어디 출신인가, 브리엔? 파리?”
“예, 파리사관학교 출신입니다.”
“허허, 그래? 그렇구만.”
“예, 그렇습ㄴ···.”
“요즘 파리사관학교에선 자네 같이 멍청한 생도도 뽑는다니, 그것 참 충격이군 그래. 차라리 내가 교장에 계속 있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쯧.”
명색이 사관학교 출신에, 장교라는 작자들이. 지는 싸움인지, 이기는 싸움인지 눈대중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니.
이딴 병신들을 데리고 라파예트 그 놈을 이기라고? 루이 17세, 아니 오를레앙 당신 미쳤나?
차라리 화장실에 있는 똥막대기가 이 머저리들보다는 나을 거다.
“위고 소위.”
“예, 장군님.”
“자네 작전지도는 읽을 줄 아나?”
“···예, 그렇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읽어나 보게.”
하늘보다 높은 장군의 말을 어찌 감히 위관나부랭이가 거역하겠나?
한낱 쏘가리에 불과한 위고는,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마음으로 부여잡고 작전지도에 써져있는 내용을 읽어나갔다.
지도에는 베르사유와 파리를 중심으로 수 개 부대가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왕실근위대는 세 배에 달하는 병력과 60만 파리 시민들에게 에워 쌓여있고, 낭시와 자레브에서 출발하는 2만의 왕당파 군대는 엇비슷한 규모의 국민방위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위고 소위?”
“···물론 어려운 적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근위대가 지금껏 전장에서 쌓아온 감투(敢鬪)정신이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지금껏 쌓아온 감투정신? 그래, 좋다! 어디 한 번 내 친히 자네의 정신을 시험해주지.”
“억!”
“그 잘나신 감투 정신이 겨우 그것도 못 참나!”
위고는 군화에 차인 정강이를 움켜잡고 바닥을 굴렀다.
“자네들 중 혹여 전쟁터에 1초라도 있었던 사람이 있다면 손 들어보게.”
싸늘하다.
이미 분노로 터질 듯 한 가슴에, 또 다시 짜증이 날아와 꽂힌다.
이런 돼지 같은 새끼들.
“전쟁터에, 야전에 나가본 적도 없는 놈들이. 제 선배들의 전적을 마치 제 훈장인 것 마냥 말하고 다녀! 지금 장난하는 거야!”
“···.”
“···.”
“···.”
“왜 다들 말이 없나? 입이 있으면 아까처럼 아무 단어라도 한 번 주워섬겨보게나.”
왕이 제들 뒤에 서있다는 착각에 눈앞에 있는 게 똥인지 초콜릿인지도 구별을 못하는 놈들을 근위대랍시고 세워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니 놈들이 그렇게 빨아재끼는 왕은 이미 침몰하는 배란 말이다.
“···오늘 작전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다들 한숨 자고 기분 푼 뒤 볼 수 있도록.”
“““예, 장군님.”””
뒤무리에는 모자를 쓰고 홀로 근위대장실을 나와 베르사유 궁전 한편에 자리한 별궁으로 발을 옮겼다.
“거기, 거수자! 신원을 밝혀라!”
“나 뒤무리에일세.”
“아, 장군님이셨습니까.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좀 어떤가?”
“여느 때와 같습니다. 방 안에서 별 탈 없이 지냅니다.”
“그렇구만. 잠깐 문 좀 열어주겠나? 내 그 사람과 할 말이 좀 있어서.”
“예, 알겠습니다. 장군님.”
위병은 열쇠로 잠군 자물쇠를 풀고 뒤무리에를 별궁 안으로 들여보냈다.
“허, 방 크기가 근위대장실보다 넓은데. 유폐됐는데 아주 나보다 호화스럽게 사는 것 같군 그래. 안 그런가, 앙투안 드제 부근위대장?”
뒤무리에는 마지막 말을 크게 내뱉었다.
“···직위해제에서 풀어주시기라도 하려고 오셨습니까?”
그에 답하듯 젊은 장교가 방 안쪽에서 나와 말했다.
“아니, 거래를 하러 왔지. 자네도 살고, 나도 살 거래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