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춧돌 (5)
“세상에 토마토를 먹었어!”
“안돼요, 총감님!"
"꺄아아아악!“
“의사! 의사를 불러!”
내가 토마토를 으적으적 씹어 먹기 시작하자, 마치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이세계인들 마냥 광장 곳곳에서 절규가 흘러나왔다.
아아. 이 무지한 이세계인들 같으니라고, 이건 독초가 아니라 ‘토마토’라는 것이다. 심지어 설탕을 뿌려먹으면 더 맛있지. 아 미리 설탕 좀 묻혀놓을 걸 그랬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건강에는... 뭐 잘 모르겠다.
내가 포브스 선정 아들딸이 싫어하는 TV프로그램 1위 에 등극한 ‘알토X’같은 건 안 봐서 정확히 어디에 좋은 지는 잘 모르겠네.
분명 유X브 같은 곳에서 심심찮게 영상으로 올라오는 거 기억하면 좋기야 하겠다만.
대충 항산화효과니 뭐니 하나쯤은 있지 않겠나. 그리고 내 심장, 간, 뇌 중 어디 한 군데에서는 좋아하겠지 뭐.
뭐? 포브스가 그런 거 선정 언제 했냐고? 내 머릿속 포브스에서 했다. 대한민국에 산 적 있는 아들딸이면 다들 그 프로그램 싫어할 걸.
그거만 틀면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에 ‘건강을 위한 재료’랍시고 이상하고 해괴망측한 게 들어가는 마법이 눈앞에 펼쳐졌단 말이다. 세상에 김치찌개에 몸에 좋다고 가지를 썰어 넣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 원.
그렇게 별 생각을 다하면서, 나는 5분간 토마토를 계속 목 뒤로 씹어 넘겼다.
처음에 경악하던 시민들도 이젠 아리송한 표정으로 숙덕이기 시작했다.
“어... 뭐야 멀쩡하네?”
“총감님! 어디 아픈 곳은 없으세요?”
“토마토에 진짜 독이 없나봐.”
음. 좋아, 내가 이렇게 쇼를 하는 보람이 있구만.
“이봐 토마, 너는 언제 걸 거야?”
“난 20분 뒤에 쓰러진다에 5 수.”
“그래? 그러면 난 10분 뒤에 쓰러진다에 5 수 걸지.”
···보람이 없구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어이 어이. 토마토에 독이 없다는 건 ’상식‘이라구?’
그 말은 콧수염을 기른 아버지가 흐릿하게 내 눈앞에서 나와, ‘일어나라, 기욤아! 일어나라! 상대는 애비를 죽인 공산당이야!’를 외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손을 번쩍들고 외쳤다.
“여러분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토마토에는 독이 없습니다!”
“와아아!”
“기욤 총감님이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어!”
“기욤! 기욤!”
···중간에 뭔가 이상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래도 거의 다 왔다. 이제 클라이맥스만 남았어.
나는 다시 연단에 올라,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지금 이 광장에 우리가 모인 이유를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건, 바스티유 요새를 무너뜨린 지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을 기억하고, 또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축제의 발랄한 분위기에서, 감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 제가 먹은 토마토를 봐주십시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붉다구요? 그렇습니다, 토마토는 붉습니다. 마치 우리가 바스티유를 함락시키던 그 날, 그 곳에서 피 흘려 쓰러진 우리 시민들이 흘린 피와 같이 붉습니다. 제가 감히 얘기하겠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기억합시다, 여러분. 오늘 이 마르스 광장에서 우리가 이렇게 웃고, 떠들고, 또 즐길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그 날의 희생을 기억합시다. 이 붉은 토마토를 통해, 이 자리에 있지 못한 그 용감한 사람들을 기립시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토마토는 붉습니다. 희생자들이 흘렸던, 우리 시민들이 흘렸던 피만큼 붉습니다. 그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 오늘 광장에 있는 이삭의 민족 노점은, 모든 상품을 공짜로 시민 여러분들께 팔겠습니다. 그리고 그 판매량만큼 바스티유에서 쓰러진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부디 맛있게 드시고, 1년 전 그 참상을 가슴깊이 기려주셨으면 합니다. 이상입니다.”
***
짝짝짝
“정치인 다 됐군, 자네.”
“아니 사제님은 또 언제 오셨습니까?”
“베르사유에 처박혀 있으니 원. 몸이 찌뿌둥해서 말이지.”
연단 뒤로 내려오자, 시에예스 사제님은 싱긋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보다 정치인은 무슨. 전 정치랑은 안 맞습니다, 시에예스 사제님.”
“안 맞긴 무슨. 아예 정치만 파려고 한 나보다 훌륭한데. 지금 저 광경이 안보이나? 파리 시민 수천 명이 자네 이름만 연호하는데 말일세.”
“예전에도 말씀 드렸잖습니까, 전 태생이 남 앞에 서는 거 싫다구요.”
“하하, 퍽도 그러겠군. 아무튼 자네가 사람들을 달궈놓은 것 때문에 뒤에 연설할 사람들은 죄다 눈만 꿈뻑꿈뻑 뜰 수밖에 없지 않나. 아주 나쁜 친구야 자네. 그런 연설을 할 거면 뒤에 했어야 될 거 아닌가.”
“어... 그런가요?”
“당연하지. 이 사람아.”
시에예스 사제님은 마치 말썽꾸러기 조카를 보는 듯 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말이네, 기욤 군.”
“예. 사제님.”
“희생자들에게 기부금을 전달하겠다는 것. 어떤 의미인가?”
“예?”
“의도가 무엇이든, 내 앞에서는 다 털어놔도 괜찮네.”
“왜긴 왜입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끌고 갈 때는 우리 아들, 다치거나 죽으면 느그 아들’을 시전 하는 군대에 몸을 담가봤더니, 희생을 해도 안 알아주는 현실이 굉장히 슬프더라고.
아니 슬프다기보다는 그것 참 당해보거나 내 옆에 사람이 당하는 걸 보면 좆같거든요.
최소한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의도해서든 의도하지 않아서든 위정자라는 자리에 오르면 꼭 바꾸고자 하는 게 그 현실 아니겠나.
그런데 희생자들한테 보상을 해주려면 절차가 참 힘들더라고.
안 그래도 쌈박질 중인 의회한테 그걸 비준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지.
그래서 뭐 그냥 내 돈으로 했다. 돈도 많은데 그 사람들한테 몇 푼 못 주겠나.
또... 조금 사심을 담아 말하자면, 사람들이 오늘 공짜 음식을 먹으면서 케첩에 맛을 들이면 홍보도 되고, 또 그런 과정에서 추가적인 단골 고객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괜히 기업들이 신제품 나오면 마트에서 한 번 드셔보세용-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거 완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냐?
“···그래 자네는 그런 사람이지, 하하. 내 실수했구만. 미안하네 기욤 군.”
“엥, 왜 사과를 하십니까? 그보다 베르사유를 이렇게 비우셔도 됩니까? 오를레앙은 어떻게 하구요.”
“아 오를레앙? 그나마 있던 날개 중 하나는 반쯤 뽑혀서 덜렁덜렁 거리는 놈을 왜 무서워하나?”
“그건 또 무슨...?”
“···오를레앙 목을 매달아 버리다시피 해놓고 무슨-이라니, 자네가 붙여준 탈레랑 그 친구 있지 않나.”
“아 탈레랑 주교요?”
“그래, 그 친구가 입을 참 잘 놀리더란 말이네. 앞뒤 꽉 막힌 왕당파 나리들도 그 친구랑 둘이 방 안에서 면담을 하고 나면 대부분 전향을 하더군.”
그 수구꼴통 왕당파들을 전향시킨다고? 뭐지. 탈레랑 그 사람.
혹시 주머니에 스마트폰이 있고, 거기에 최면어플이라도 설치 해놓은 건가.
아니면 눈에서 최면빔이 나간다던가...
시에예스 사제님은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이고 크게 들이마시었다가 내 뱉으며 말을 이어 나가셨다.
“아무튼 앞으로 오를레앙 그 놈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마지막 남은 패인 뒤무리에 장군과 근위대가 있지만, 라파예트 사령관이 있는 한은 그것도 쓸 건덕지가 안 나오지.”
“하기야 어떤 병사가 전쟁영웅을 향해 감히 총을 쏠 수 있겠습니까.”
“하하, 사관학교 출신이라 그런지. 역시 자네도 군인 같은 말을 하는구만.”
“아니, 전 군대 싫어하는데요.”
이미 한 인생에 군대 두 번인데 어떻게 군대가 좋아지겠습니까, 선생님.
“아 그러고 보니 콩도르세 국장님은 어디 계신지 보셨습니까?”
“···콩도르세? 아 그 사람이라면 자네가 한참 연설할 때 저기서 슬쩍 본 것도 같네만.”
“저쪽이면...”
우리 이삭의 민족 노점 아닌가?
“콩도르세 그 사람, 손에 뭘 한가득 가지고 있던데.”
“···혹시 손에 종이로 만든 봉지 같은 거 들고 있었습니까? 좀 갈색인...”
“그걸 어찌 아나?”
국장님... 감자튀김이 정말 맛있으셨나 보네.
“아무튼 다음 연설 차례는 나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 축제 잘 즐기게나, 아 참고로 저쪽에서는 달달한 디저트도 팔던데 한 번 가보게.”
“아, 예. 사제님, 수고하십쇼.”
그러나 사제님과 작별을 한 나는, 다시 또 누군가에게 한참을 붙들리고 말았다.
“총감 각하, 정말 대단한 연설이었습니다!”
“아... 당통 씨이시군요. 하...하하.”
“저도 있습니다, 총감 각하.”
“미스터 단...아니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하...하하하.”
그만 날 보내줘!
***
“다음은... 루이 봉 베토방 씨? 이름이 이거 맞나요?”
“아뇨, 루트비히 판 베토벤입니다.”
“그러면 독일인?”
“예,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연주자 분께 10분 뒤에 올라가면 된다고 말씀해 주십쇼.”
“예, 알겠습니다.”
바뵈프는 연단 뒤에서 서둘러 내려와, 이삭의 민족 노점 쪽으로 달려갔다.
“여기 감자튀김 1인분 추가!”
“여긴 간편식사 2인분이요!”
“케?첩인가 뭔가 한 번만 더 짜주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이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았는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노점 주위를 어깨를 밀어 넣어 겨우 돌파한 바뵈프는 직원용 입구로 들어갔다.
“으윽, 그 뚱뚱한 양반은 또 뭐람. 겨우 들어왔네.”
“어, 바뵈프 씨? 루트비히 씨 데리러 오셨습니까?”
“예, 부사장님. 루트비히 그 친구 어디 있습니까?”
“뒤로 가보시면 있을 겁니다.”
바뵈프는 플로리앙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자 성부 성령의 이름으로 제발 구원하옵시고...”
“루트비히 씨? 10분 남았습니다, 이제 가시죠.”
“아니,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바뵈프는 찬물을 떠다놓고 기도하는 루트비히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저게... 포브스 일주일 전 회에 나왔던 ‘동방 프레스터 요한의 영험한 기도법’이었나?
“후우. 알겠습니다, 바뵈프 씨. 가시죠!”
“너무 긴장하지마세요. 루트비히 씨. 이미 연주 많이 해본 적 있으시지 않습니까.”
“단독연주는 오늘이 처음이라...”
“정 그러시면 평소처럼 제가 찬물이라도 한 바가지 뿌려드릴까요?”
베토벤은 바뵈프에 말에 싱긋 웃어보였다.
“하하, 바뵈프 관리자님 덕에 긴장이 좀 풀리는데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오늘 이 연주를 위해 근 한 달간이나 연습한 베토벤이었다. 나이가 거의 열 살 차이가 나서 그런가, 이 괴팍한 음악가가 동생처럼 느껴지는 바뵈프 또한 베토벤에게 웃어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평소대로만큼만 하세요. 절 깜짝깜짝 놀래키시지 않았습니까.”
“후우. 가보겠습니다.”
베토벤은 바뵈프를 두고 무대 뒤편으로 올라갔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맞습니까?”“예, 맞습니다!”
“어떤 곡이시죠? 미리 좀 조율을 해놔야 해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입니다.”
“···피아노 소나타에 모차르트면, 아 그 터키행진곡?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죠.”
“예, 부탁드립니다.”
베토벤은 쿵쿵 뛰는 가슴을 억지로 눌렀다.
평생 꿈꿔왔던 것 아닌가. 그 누구의 후원이 아니라, 직접 곡을 쓰고 팔 기회를 잡게 된 것 말이다.
오늘 베토벤의 이름을, 유럽 최고의 도시인 파리 한 가운데서 떨치리라.
"루트비히 씨, 올라가시죠!"
"아, 예! 알겠습니다."
그 날, 마르스 광장에는 베토벤의 선율이 아름답게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