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주춧돌 (4) (94/341)

주춧돌 (4)

“머독 수석님.”

“왜 그러나, 리처드.”

“수석님은 기욤 사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수석 엔지니어 머독은 트레비식의 질문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괴짜라는 단어 외에 그 사람한테 어울리는 말이 더 있나? 기술자나 과학자도 아닌 일반인 중에, 그 사람 정도로 증기기관에 대해 공부한 티가 나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

“꽤 긍정적이시군요.”

“하하. 원래 기술자는 돈 대주는 사람한테 긍정적이기 마련인데 거기에 관심까지 가져주는 사람이라면 말 다했지. 그러는 리처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트레비식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생각에도 상당히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저번 로열티 문제도 그렇고...”

“그래, 이번에 우리한테 가져다 준 요 케첩도 그렇고 말이지. 뭐 영국 본토 같은 맛은 아니지만, 나름 괜찮게 만들 것 같군. 그나저나 멸치 대신 토마토는 왜 넣은 거람?”

“그래도 전 몇 달 만에 고향 음식을 먹어서 기분이 좋은데요.”

“하하, 나도 싫다는 건 아니라네. 누가 들으면 내가 불평만 쏟아낸 줄 알겠어.”

머독은 수상하리만치 영국인에게 호의적인 저 프랑스인이 가져다 준 케첩에 반쯤 베어 먹은 빵을 찍어 입에 넣으며 웃어 보였다.

“좋아.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시작하자고.”

“예, 수석님.”

마르세유 쪽에서 온 포도주로 입가심을 끝낸 머독은 트레비식을 보고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방금까지 각종 제도 기구를 통해 선을 긋고, 지우고, 또 곳곳에 숫자를 새겨 넣던 설계도로 향했다.

로열티 문제도 기욤 사장의 대인배적인 양보로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합의가 끝났고, 대접도 융숭하니 개발에 거리낄게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영국 본토에 있는 제임스 와트 사장의 공식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머독과 트레비식은 거의 온 신경을 ‘증기기관차’에 집중하고 있었다.

“객차를 끌려면 지금 증기기관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불가능한 거 자네도 알고 있지?”

“예, 그러니 증기압력을 높여 차축을 돌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고압 증기라... 상당히 위험하지 않겠나? 잘못하면 폭발의 위험도 있어.”

“수석님께서도 방금 얘기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 열댓 명만 태우고 돌아다니는 거라면 몰라도, 수십 명이 든 객차를 끈다면 지금 엔진이 가진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실린더가 깨지기라도 하면 고압증기가 뿜어져 나와 운전자를 다치게 할 텐데? 차라리 엔진 크기를 두 배로 넓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나?”

증기기관이 태동한 지 20년.

기술자들 대부분이 ‘증기기관’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들으면 마치 세이렌에 홀린 어부들 마냥 혼이 쏙 빠져 식사도 거른 채로 그 얘기만 한다지만, 아직까지 증기기관이 제대로 활약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탄광에서 물을 빼내거나 방적기로 실을 짜내거나.

심지어 증기기관을 운송수단으로 써보고자 했던 시도들은 운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원래 안 될게 안 된 것인지, 운행 중 폭발사고가 일어나질 않나 사람을 치질 않나.

어떤 국가에서는 안전 때문에 운송수단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금지되기도 했으니 일반인들과 부자들은 여태까지도 증기기관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단가가 너무 많이 드는데다가, 엔진 크기가 길어져 실린더 효율이 더 떨어질 겁니다.”

트레비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젠장, 또 같은 주제로 넘어가는군.”

“가장 큰 난관이니까 말입니다.”

증기의 힘을 받는 실린더의 압력이 높아진다면, 당연하게도 바퀴에 가해지는 힘이 늘어나고 곧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성이 높아지기 마련.

두 사람은 며칠 째 같은 고민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증기 밸브를 두 개 달아서 하나는 수동, 하나는 자동으로 실린더의 한계에 다다른 고압 증기를 내보내는 거지! 그렇게 한다면 안전성 면에서 훨씬 더 나아질 거라 보네만.”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쾅쾅쾅!

머독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손으로 받히고 말했다.

“하아··· 또 그 독일인인가 보군. 열어주게.”

“···옙.”

질린다는 듯 한 표정을 한 트레비식이 방문을 열자, 젊은 독일인이 눈에 쌍심지를 킨 채로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내가! 연주 준비할 때는! 떠들지 말아달라고 얘기했잖습니까!”

“베토벤 씨. 여긴 다 같이 쓰는 공간 아닙니까. 우리도 일 해야지요. 그보다 또 찬물을 뒤집어쓰신 겁니까?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물론! 그만큼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역시 베토벤 씨의 열정은 대단하십니다. 저로선느 그런 젊음이 부럽군요.”

“···흠흠. 칭찬 고맙습니다, 머독 씨.”

독일인답게 괴팍하지만 이제 겨우 스물을 넘은 젊은이는, 지난 십 수 년 간의 회사생활 동안 별의별 인간 군상들을 능숙하게 조련한 수석 엔지니어 머독의 말솜씨에 조금씩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

“곧 축제 기간인 것도 알고, 베토벤 씨가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말 한 마디 없이 설계도를 뚝딱뚝딱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끄응. 알겠습니다. 그래도 축제가 코앞이니 조금만 조심해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요. 아, 축제 때 공연도 꼭 보러가겠습니다.”

“하하, 이 베토벤이 귀로 듣는 최고의 쾌락을 보여드리죠!”

***

바스티유 요새 함락으로부터 1년 뒤인 오늘. 1790년 7월 14일은 굉장히 뜻 깊은 날이었다.

사람들은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바뀌는 세상에 너도나도 미래에 더 나은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덕에 샹 드 마르스 광장은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바스티유 함락 1주년 기념행사가 거나하게 열리고 있었다.

군인들이 시퍼런 눈을 뜨고 총칼을 들이밀던 때, 지방으로 도피했던 수공업자들이나 장인들도 이제는 돌아와 제들이 만든 장식품이나 기념품 따위를 노상에서 팔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으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 과자 같은 걸 입에 넣어주는 부모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파리는 희망과 일상을 다시금 되찾고 있었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거의 인외마경이나 다름없었던 거 같은데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 같네.

음음. 축제 예산 마련한답시고 이리저리 뛴 보람이 있어.

“아니 기욤 군, 자네는 뭐 안 했잖나.”

“어허, 콩도르세 조세국장님. 하급자의 공은 곧 상급자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어떻게 자네 공이야? 축제 계획부터 예산은 다 내가 짰잖나. 자네는 마지막에 도장만 딱 찍은 거 뿐인데...”

“아아아니! 저기서 맛있는 거 파는 것 같은데 한 번 맛보러 가시겠습니까?”

“왜 말을 돌리는 겐가, 기욤 군!”

왜냐니요.

콩도르세 국장님만 아니었으면 나 제 3신분위원인지 뭔지도 안했을 거고, 그랬으면 재무총감인지 뭔지 이 감투도 안 받았을 거 아닌가. 그러면 난 행복한 라이프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

그러면 국장님 좀 골려먹을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러니까 이거 먹고 삐진 거 좀 푸십쇼. 국장님.”

“이게 뭔가? 감자를 튀긴 겐가?”

“그리고 그걸 여기에 찍어서 드세요.”

“이건 소스인가?”

“옙.”

나는 보빌리에의 쪼인트를 두 번 까고서야 마침내 받아낸 제대로 된 토마토 케첩 MK.3를, 갓 튀긴 감자튀김과 함께 콩도르세 국장님 손에 쥐어드렸다.

“이, 이야! 이거 군것질거리로 딱이구만! 자네가 만든 겐가?”

콩도르세 국장님은 따끈따끈한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 입에 넣고선, 내게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어떤가요, 화는 좀 풀리셨습니까?”

“아니. 먹을 걸 주고 화가 풀렸느냐 물어보는 걸 보니, 자네는 날 뭘로 보는 겐가? 내가 돼지로 보이는 게야?”

“어...”

음...살짝?

“그 눈빛을 보니, 정말 날 돼지로 생각하는가 보군?”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됐네, 이 사람아. 안 그래도 엊그제 소피가 나한테 살 좀 빼보라고 하더구만.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살 찐 것 같나?”

손으로 찌르면 쑤욱 들어갈 것만 같은 배, 오동통통 쫄깃쫄깃 너구리처럼 빵빵해진 볼.

“···.”

“기욤 군, 지금보니 되게 나쁜 친구였구만.”

“하하...”

“하여간 이럴 때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좀 해보는 게 어떤가. 자네는 사람이 너무 정직해.”

“예에...”

“내가 말이네, 예전에 잠시 군에 몸담았을 때는···.”

콩도르세 국장님과 내 나이가 거의 서른 살 차이가 나다보니까 국장님은 마치 아들을 훈계하는 것 마냥 계속 말을 이어나가셨다.

윽! 정신 나갈 것 같애!

화제를 빨리 돌려야지 안 그러면 내 고막이 먼저 터져나갈 것 같다.

“그, 그보다 맛은 좀 어떠십니까?”

“맛? 맛이야 좋네만. 그런데 소스는 무슨 소스인가? 처음 먹어 보는 맛인데.”

“아 그거요? 토마토로 만든 소스인데 괜찮죠?”

“···토마토? 사람들이 좋아할 맛이긴 한데, 토마토라니. 성공하기는 힘들겠구만.”

“아 설마 그 독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그래, 낭설이지 낭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토마토에 독이라니! 그랬으면 제퍼슨 그 친구는 벌써 뱃사공 카론을 만나러 갔을 걸세. 그 친구가 퍼먹은 토마토만 한 달에 나무 한 그루는 될 테니.”

콩도르세 국장님은 계속 이어 말하셨다.

“그런데 자네. 이거 돈 많은 사람들한테만 팔 거 아니지 않나?”

“그렇죠?”

“그러니 문제라는 거네. 토마토가 독이 아니라는 거, 민중들은 잘 모른단 말이지. 잘못하면 자네가 민중들을 독살하려 든다니 뭐니 하는 말이 돌 수도 있네.”

“에이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자네 잡지에서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아니 그걸 국장님도 보십니까?”

“그러면 그 재미있는 걸 안 보겠나? 나, 정기구독도 끊은 사람일세.”

포브스 너... 대체 얼마나 잘 팔릴 셈이야!

“그러니까 국장님 말은, 일반인들은 좀 꺼려할 수도 있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거야 별로 큰 문제는 아니네요.”

“···?”

“하하,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나는 콩도르세 국장님께 웃어보였다.

그때 잘 차려입은 양복쟁이 한명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재무총감 각하, 곧 찬조연설 차례입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예, 앞으로 5분 뒤 연단에 오르시면 됩니다.”

“쩝. 알겠습니다. 국장님 조금 이따가 뵙지요.”

“그래그래. 잘하고 오게나.”

찬조연설이라는 게 뭔가.

하하호호 웃으면서 ‘여러분 재밌게 잘 즐기시고 항상 행복하세요.’를 수십 문장으로 풀어서 말해줘야 하는 거잖아.

그거 상당히 귀찮다.

가뜩이나 단순한 의미를 풀어서 말하는 것도 힘든데, 중복해서 말하면 또 눈치 보이기 십상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재무총감이라는 감투를 싫어하는 이유 395번째에 등극하지.

아, 그런데 또 이럴 때는 좋아해야하나.

“각하, 시간 됐습니다. 올라 가시지요.”

“예, 갑니다.”

내가 연단으로 올라가자, 사회자를 맡던 양복쟁이 하나가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쳤다.

“다음으로는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각하의 찬조연설이 있겠습니다!”

부담감을 폭발시켜서 날 죽이려는 암살모의인가?

“하하하. 안녕하십니까, 시민 여러분. 기욤 드 툴롱입니다.”

“기욤! 기욤! 기욤!”

“시민의 친구, 재무총감 만세!”

“혁명 만세!”

음. 만약 암살모의가 맞는다면 상당히 효과적인 암살계획이로군.

그렇지만 여기서 연설을 멈추면 내가 계획한 ‘토마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모든 프랑스인들과 파리 시민들의 안녕을 빌며, 제 말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부담감을 삼키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대강 한 3분? 한 5분 쯤 지났나? 상당히 오랜 시간 떠든 거 같은데, 이 정도면 분량 다 맞춘 거 맞지?

“그럼 이것으로 제 찬조연설을 마치겠습니다, 부디 시민 여러분 모두. 오늘 멋진 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와아아!”””

내가 시민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음 좋아. 계획대로군.

“아, 그런데 말입니다. 시민 여러분. 제가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을 들었지 뭡니까? 혹시 여러분 토마토라고 아십니까? 누군가 그러는데 토마토에 독이 들어있다고 하더군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이고 이런.

광장에 모인 시민들 중 대다수가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거 그냥 냈었으면 진짜 망하다 못해 쪽박을 찼겠네.

“여러분, 제가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토마토에는 독이 없습니다! 아아! 농부들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그런 낭설 때문에 아무도 먹지 않다니! 그런 낭비란 낭비가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때문에 저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 오늘 이 자리에서! 토마토가 무해하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보여드리려 합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연단 밑에서 누군가 토마토가 가득 담긴 수레를 덜컹거리며 내 앞으로 가져왔다.

“···기욤 넌 진짜 미친놈이야.”

어허 시민 분들이 듣고 있잖아 마티유 형. 언행을 조심히 해야지 참.

나는 토마토를 하나 집어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제가 딱! 5분간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리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