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춧돌 (3)
1790년 7월 중순.
프랑스 왕국, 중동부 트루아 시 근교.
“젠장, 적을 보기 전에 이 뙤약볕 때문에 먼저 탈진으로 쓰러지겠고마. 대항군 이 자식들, 훈련을 하고 있긴 한기가? 무슨 코빼기도 안 보이네.”
한 장교가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 연신 들이키고는 질린다는 듯 말했다.
고지를 감제한지 벌써 반나절 째.
그나마 서늘했던 새벽녘이 지나고, 햇빛이 대지를 달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사람은커녕 인영으로 추측되는 비스무리한 것도 보질 못하니, 첫 야전 훈련에 들떴던 마음도 그런 7월의 뜨거운 햇볕아래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있었다.
장교는 다시 한 번 망원경을 들어, 저 멀리 자리하고 있는 숲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의 흔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에라이 씨... 마! 취사병! 점심 준비해라! 병사들 밥은 먹여야 쓰지 않겠나!”
“예, 보나파르트 대위님!”
곧 취사병들이 심혈을 기울인 음식 -뭐 그래봤자 딱딱한 빵이며 채소며 염장고기까지 한 번에 다 넣어서 끓이는 잡탕국이긴 하지만- 냄새가 포대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위님, 먼저 드시지요.”
“됐다. 내보다 저어어기서 땀 뻘뻘 흘리는 점마들부터 주라카이.”
“옙, 대위님.”
햇볕에 달궈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대포 옆에서 반나절 째 서 있던 병사들을 시작으로, 취사병들은 반합에 잡탕스튜를 가득 따라 나눠주기 시작했다.
“대위님, 이제 대위님 차례입니다. 어서 받으시죠.”
“고맙데이, 잘 먹을게.”
“하하, 옙.”
나폴레옹은 반합을 기울여, 스튜를 입에 넣으려 했다.
그 순간.
“대위님! 서쪽 숲에 이상한 움직임이 보입니다!”
“뭐? 어디!”
나폴레옹은 반합을 두고 뛰쳐나가, 한 병사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향해 망원경을 치켜들었다.
“저기 저쪽에서 얼쩡거리는 거 대항군 기병대 아닙니까?”
“···잠깐만.”
흐릿했던 망원경의 초점이 맞춰지자 흑색 술을 투구에 꽂고 숲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나폴레옹의 눈동자에 담겼다.
흑색 술을 달고 있는 기병대라면, 대항군 용기병 연대가 분명했다.
“하, 하하. 반나절 동안 생고생한 보람이 있고마! 총원 전투배치! 각자 포대로 달려 나가!”
“““총원 전투배치!”””
“하나 포와 둘 포는 철탄, 삼 포와 넷 포는 포도탄을 장전한다. 나머지 포는 장전대기!”
“뭣들 하나! 이 굼벵이 자식들아! 당장 재장전 해! 대위님 말씀대로, 장전은 무조건 1분 안으로 끊는다!”
부사관들이 각 포에 달라붙어 고함을 치며 병사들을 다독였다.
“““예!”””
곳곳에서 텅 빈 금속 통이 저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비록 포탄은 없이 쏘는 대포지만 화약은 같은 양을 넣어야 하니, 병사들이 밀대로 장약을 쑤셔 넣느라 나는 소리였다.
“하나 포, 장전 끝!”
“둘 포도 장전 완료했습니다!”
“삼 포, 넷 포도 끝났습니다!”
“좋아! 전 포대 내 신호를 기다린다.”
망원경으로 대항군을 살피는 나폴레옹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통제관님, 잘 보고 있으시지예?”
저 멀리서 나폴레옹의 인사고과점수가 대지를 박차며 달려오고 있었다.
몇 초 쯤 걸릴까.
5초? 10초?
차분하게, 포대의 각도와 사거리, 착탄 시간을 머리에서 계산한다.
그리고.
“하나 포, 둘 포. 발포!”
콰쾅!
장약만을 넣은 두 문의 대포가 우렁찬 소리와 함께 뒤로 후퇴했다.
***
“총원, 차렷! 사령관님께 경례!”
“하하. 경례는 생략해도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금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라파예트 국민방위대 사령관은, 본부 막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참모들을 향해 말했다.
라파예트가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번 대규모 야전훈련은, 이제 갓 태어난 국민방위대에게 상당히 중요한 훈련이었다.
우선, 매일매일 나라에 돈 없다고 군축이니 뭐니 궁시렁대는 재무총감에게서 들키지 않게 한푼 두푼 몰래몰래 모아서 진행하는 훈련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기존에 있던 사관과 부사관들의 탈영으로 인해 와해되다시피 했던 과거의 국민방위대가 어느 정도 재편을 완료한 현재, 가지고 있는 역량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게 두 번째 이유였으며.
세 번째로는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원석들을 찾아내 발굴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전선은 대체적으로 팽팽합니다만, 방금 청군이 기병대를 이용해 백군의 좌익을 타격한 게 무위로 돌아가면서 백군이 조금 유리해진 듯 싶습니다.”
“···백군의 좌익이면, 포병대 아닙니까? 기병대로 포병대에 박았는데 졌어요?”
“진 수준이 아니라, 아예 대대가 전멸 판정을 받았습니다.”
라파예트의 미간이 한 참모의 답변에 찌푸려졌다.
대대, 그것도 보병이면 몰라도. 기병대가 전멸 판정?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는데요? 아닙니까?”
“그게... 사실은 대대장이 낙마해서 대항군에게 포로로 잡혔답니다.”
낙마라. 그렇다고 해도 겨우 대대장이 낙마했다고 전투력을 잃었다는 건가?
“···대대장이 전투에서 이탈됐다고 해도, 병사들이 겨우 그거 가지고 평정심을 잃었답니까?”
라파예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혼란에 휩싸인다면, 지휘관의 전사나 부상은 비일비재한 야전에서는 어떻게 대처한단 말인가. 당장 라파예트 또한 총을 맞은 적이 있는 곳이 바로 전쟁터고 야전이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병사들은 대대장의 이탈에도 기존 작전대로 측면을 잘 찔러 들어갔습니다. 물론 대열이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 말은 병사들의 훈련도 문제가 아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뭐 때문이죠?”
군인으로서의 흥미를 살살 긁는 참모의 말에, 라파예트는 입을 열고 말했다.
“통제관 말에 따르면, 포대장을 맡고 있는 보나파르트 대위가 굉장히 뛰어난 판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기병대 대열이 흐트러지자마자, 이상함을 눈치 채고 바로 포도탄으로 탄종을 바꿔 시원하게 갈아버렸다더군요.”
“장전에는 몇 초 정도 걸렸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참모는 명령문과 보고서가 섞인 탁자에서 종이 한 장을 찾아내 라파예트에게 건네며 말했다.
“보고서에는 평균 57초라고 합니다.”
“···57초? 장전에 1분이 채 안 걸렸다는 겁니까? 허, 이거 물건인데요?”
라파예트는 씨익 웃으면서 보고서를 훑어 내려가다가, 이번에 자신의 부관으로 새로 임명한 젊은 소령에게 물었다.
“니콜라 다부 소령?”
“예, 사령관님.”
“소령이 사관학교 졸업을 언제 했었죠?”
“2년 전입니다. 사령관님.”
다부 소령은 부동자세로 선 채, 마치 목석마냥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면 보나파르트 대위라는 이름을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엇비슷한 기수 같은데.”
“같은 기수는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습니다만, 기수를 넘어 이름을 알 정도로 꽤나 유명한 친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또한 재무총감 각하와도 상당히 연이 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호, 그렇습니까?”
대부분 얼치기 병사뿐인 국민방위대에서 저 정도 정예한 숙련도가 병사들에게 보이는 걸로 봐서는 병사 조련도 탁월하게 수행한 걸로 보이고.
판단력이 좋으면 좋지 낙제점은 결코 아니고.
기욤 총감과 같이 어울렸다면 혁명 사상도 확실하고.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다.
오랜만에 쓸 만한 인재를 발견한 것 같다는 생각에, 라파예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포도탄을 써서 격을 격퇴했으니, 포도탄 대위라고 불러줘야 하나? 다부 소령, 훈련이 끝나면 보나파르트 대위를 데리고 와 주십시오. 한 번 만나봐야겠네요.”
“예,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그 낙마한 대대장은 이름이 뭐랍니까?”
“에마뉘엘 드 그루시 소령입니다. 사령관님.”
***
라파예트 국민방위대 사령관의 지휘 아래, 세 개 연대를 동원해 펼치는 모의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수백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자신의 명령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아니, 뛰었‘었’다.
모두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대대 좌익을 날카롭고 빠르게 찔러 들어오다가, 낙마로 인해 사로잡힌 눈앞의 대항군 기병대대장 덕분이었다.
그래. 그것도 앳된 병사에게 사로잡혀서 끌려온 저 대대장 때문에.
“오! 내 오랜 친우여! 이렇게 만나다니! 이 모든 것이 신의 섭리가 아니고선 무엇이겠느뇨!”
대항군 기병대대장은, 한 번 땅에 굴러 흙으로 엉망이 된 군복과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으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행님. 우리 지금 대항군 사이인 건 알고 있는 거 맞제?”
결국 나폴레옹은 편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동시에 지긋이 눈을 감고서, 천천히 말했다.
“물론이지! 대항군인데도, 이렇게 만나게 된 게 어찌 보통 우연이겠나!? 하하하!”
“···.”
나폴레옹은 두 손을 높이 든 채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루시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저 묵묵히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게 그루시 이 양반은 영관이 되고나서도 생도시절이랑 바뀐 게 하나 없는 건지.
라 페흐 포병연대 소속 임시 3대대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위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어서 관등성명이나 빨리 대십시오. 연대 본부에 보고서 올려야 합니더.”
“아니, 나폴레옹! 왜 그렇게 차갑게 구는 겐가! 우리 사이에 왜 말을 높이고 그러나!”
“아잇 씻팔! 빨리 관등성명이나 대시라꼬. 이 양반아!”
“자네 그러는 거 보니까 기욤 그 친구를 닮아가는 듯 싶은데...”
“행님, 헛소리 한 마디만 더 하면 포로수용소에 넣어버릴 끼다.”
“···제 2 용기병연대 1 대대장, 소령 에마뉘엘 드 그루시.”
나폴레옹은 펜을 빠르게 놀려,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써내려갔다.
[대항군 대대장, 에마뉘엘 드 그루시 소령 생포.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위 -]
“그래, 이래 잘 대답하모 얼마나 좋나? 자 이제 어서 포로수용소로 가 버려라. 저어기 언덕 넘어가모 있데이.”
“아, 아니. 헛소리 안 했잖나?!”
“패잔병이 왜 이리 말이 많나. 싸게싸게 가라 쫌!”
마침내 그루시는 흙먼지로 범벅이 된 몸을 질질 끌고서 나폴레옹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하여간에, 이상한 양반이란 말이제.”
세상에 아편이나 술을 거나하게 빤 것도 아니고, 제 정신으로 칼을 뽑아들고 휘하 병력들과 함께 최전방에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오는 지휘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목숨을 걸만한 실전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모의전에서 말이다.
“저기, 그... 대위님?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미안타. 내 잠깐 정신이 팔려가지고. 돌아가도 된 데이.”
“예, 알겠습니다!”
그루시를 사로잡는 대공을 세운 앳된 병사는 나폴레옹에게 경례를 올리곤 뒤로 돌아 발을 내딛었다.
몇 살이나 됐을까. 열다섯? 열여섯?
“···병사! 잠깐만 다시 오도록!”
“예? 아, 예!”
결국 나폴레옹은 눈에 자꾸 밟히는 병사를 다시 불러 세웠다.
“훈련 뛰느라 배고플 텐데, 이걸로 대강 요기나 해라카이.”
“예? 하지만, 이건 대위님 몫 아닙니까?”
“내는 이미 다 커가지고 먹어도 안 큰다 아이가. 니는 한창 자랄 때니까 많이 먹으라카이. 정 미안하모, 내 막사에 가서 책 한권 가져와주라.”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직 포대에서 가시지 않은 화약 냄새를 맡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위는 병사가 가져다 준 책을 펴곤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