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다른 곳은 안전한가? (3)
“어우, 몸이 다 뻐근하네.”
“빈에서 쾰른까지 거의 2주간 행군하셨으니 몸이 피곤할 만도 하지요, 카를 대공 전하. 그래도 첫 행군이신데 상당히 잘 버티셨습니다.”
말 위에서 뻐근한 목을 요리조리 돌려 푸는 카를 대공에게, 라데츠키는 친동생을 보는 것처럼 기특하다는 듯 말했다.
“라데츠키 장군은 어디 불편한 곳 없습니까?”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하지만 소관이야, 젊었을 적부터 오스만 이교도들과의 전쟁에 종군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허허.”
“···가끔이지만 장군이 내 또래가 아니라, 나잇살 먹은 할아버지처럼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단 말이죠.”
“허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전하.”
카를 자기보다 겨우 다섯 살 많은 스물 네 살인데, 뭐 저리 사람이 애늙은이 같은지 원.
그 때, 말을 타고 대열의 가운데서 이동하는 두 사람을 향해 병사 하나가 대열 앞쪽으로부터 다가와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대공 전하, 장군님! 이제 곧 본 시내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 작정이십니까. 라데츠키 장군?”
카를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있는 라데츠키를 바라보고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우선 쾰른 선제후께서 기거하시는 궁전에서 하룻밤을 보내시고, 내일 아침에 상세한 진압계획을 짜는 게 나아보입니다.”
“음, 알겠습니다. 장군 말대로 하지요. 병사?”
“예, 전하.”
병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카를의 호명에 답했다.
“각 대대의 장교들에게 내 명령을 전하게. 본 시내에 진입한 후, 시민들이 겁을 먹을 수도 있으니 소란은 일으키는 건 금지. 마찬가지로 음주도 혹시라도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금지. 대신 숙소를 잡고 여독을 편히 풀 수 있도록. 병사들의 숙소비용은 내가 모두 대신 지불하겠다. 아 그리고 라데츠키 장군?”
“왜 그러십니까, 대공 전하.”
“본에서 나는 특산요리엔 뭐가 있는 지 아십니까?”
“아마... 돼지족발요리가 상당히 유명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호, 그렇습니까? 병사, 자네도 잘 들었나?”
“예, 예?”
“돼지족발요리 말이야.”
“아, 예! 들었습니다, 전하!”
카를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돼지족발요리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맛있을 것 같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전하!”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통했군? 모든 병사들에게 전하도록, 숙소나 여관에서 꼭 돼지족발요리를 시켜서 먹으라고. 식대는 다 내가 부담하겠네.”
“그, 그렇지만 돈이...”
“하하! 이보게, 병사. 나는 제국의 황자이자 외스터라이히 공작이야! 내 병사들에게 고기 한 점 사 먹일 돈이야 충분하네. 자, 이제 대열로 돌아가서 자네의 전우들에게 말하도록. 오늘 저녁은 돼지족발이라고!”
“예, 예! 전하! 명 받들겠습니다!”
근 2주간 노상에서 잠을 해결한 병사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와 침대에서 편히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풀어 큰 소리로 외치곤, 서둘러 대열 앞을 향해 뛰어나갔다.
***
1790년 5월 초순.
신성로마제국 쾰른 제후국, 본.
포벨스도르프 선제후 궁전.
“신성로마제국 테센의 공작이시자, 외스터라이히 대공. 카를 루트비히 요한 요제프 로렌츠 맞으십니까.”
노란색 벽과 검은 지붕을 얹은 쾰른 선제후의 궁전 앞, 경비를 서던 장교는 말에 탄 카를 대공을 향해 경례와 함께 입을 열고 물었다.
“하하, 맞네만.”
“고귀한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숙부 되시는 막시밀리안 쾰른 선제후께서 기다리십니다.”
“좋네! 귀관이 안내해주게.”
경비를 서던 장교의 뒤를 따라, 카를 대공과 라데츠키 준장은 궁전 안 응접실로 향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전하.”
“음, 안내 고맙네.”
장교는 응접실에 다다르자, 방문을 열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수수하게 장식된 응접실 안에는, 카를 대공의 숙부인 막시밀리안 선제후가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었다.
카를 대공은 군인처럼 절도 있는 자세로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숙부님, 안녕하십니까!?”
막시밀리안 선제후 또한 카를 대공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황자 되시는 카를 대공께서 친히 이 먼 제국의 변방까지 군대를 끌고 오시다니, 새로운 카이저께서 이번 일에 대해 심려가 상당히 많으신가 봅니다.”
“하하, 모두 숙부님 덕 아니겠습니까.”
어쩐지 자기의 손을 잡고 있는 숙부의 손에 힘이 더 실리는 것 같았지만 카를 대공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뒤에 부동자세로 서있는 라데츠키를 보고 입을 열었다.
“라데츠키 장군?”
“예, 카를 대공 전하.”
“숙부님과 단 둘이 할 말이 있는데, 자리를 잠시 비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막시밀리안 선제후 전하, 그러면 소관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라데츠키 장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응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군화를 신은 라데츠키의 발자국 소리가 저 멀리 사라지자, 카를 대공은 의자에 턱-소리와 함께 앉으며 입을 열고 말했다.
“삼촌, 양해 좀 해주십쇼. 근 2주간 말 안장 위에 있었더니 몸이 이곳저곳 쑤셔서 말입니다.”
“알겠다, 이 녀석아.”
막시밀리안 선제후 또한 맞은편 의자에 턱-하고 앉으며 답했다.
그런 삼촌의 말에 카를은 씨익 웃더니 장난스런 얼굴로 말했다.
“막시밀리안 삼촌, 가족 사이 간에 한 번 후련하게 속을 털어놓아보시는 거 어떻습니까?”
“···네 아버지 되는 사람이 우리끼리 이렇게 시시덕대는 걸 그닥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카를.”
“뭐 그게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여기 없으시지 않습니까, 삼촌.”
“속이 시커먼 건 네 아버지와 꼭 닮은 것 같구나, 이 녀석.”
“하하, 피는 못 속인다잖아요.”
막시밀리안은 조카의 목소리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러냐.”
“삼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겁니까?”
“뭘 말이냐.”
“아니, 말을 잘 못했군요.”
장난스러웠던 카를 대공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뭘 원하시기에 이렇게 제국을 반 정도 박살내신 겁니까?”
“···네 아버지가 말 안해주던?”
“삼촌이 말씀하신 것처럼 속이 시커머신 분 아닙니까. 아마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황태자인 큰형도 아버지 속을 다는 모를 걸요.”
“···죽은 요제프 형님은 그래도 가족한테는 따듯했는데, 네 아버지는 정말...”
“같은 궁전 안에서 크셨으면서 왜 그러세요, 삼촌. 설마... 마리아 테레지아 할머니 욕을 하실 건 아니시죠?”
“하여간 고약한 녀석 같으니.”
막시밀리안 선제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가 내쉬며 카를 대공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후, 난 요제프 형님이 옳다고 생각한다. 카를.”
“흠.”
“시대가 바뀌고 있다, 카를. 저기 북독일 촌놈이라고 우리가 무시하던 프로이센 놈들이 프리드리히 그 전쟁광 동성애자 밑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길러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감자?”
“감...자도 맞긴 하지만...”
“하하, 농담입니다. 삼촌.”
이 녀석은 대체, 장난을 할 거면 장난만 하고 진지할 거면 진지하기만 하지 왜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지 원.
막시밀리안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큼, 내 생각으로는 평민들과 귀족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단결하는 게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합스부르크가답게 나왔지만 그래도 여타 다른 사람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턱을 쓰다듬으면 경청하는 조카의 모습에, 막시밀리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해 보거라. 귀족들만으로 용맹을 떨쳐 세상을 호령할 수 있었던 건 백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백 년 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세상이 진보했더냐? 아무리 고귀한 자의 목숨이라 해도, 전장에서는 납탄 앞에서 평민의 목숨과 다를 바 없어진 게 오래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점을 가장 잘 파고든 게 프로이센이었고.”
“물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귀족들을 엎고 제들의 마음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1년 동안 지켜본 바로는, 오히려 국가 운영이 더 매끄러워졌으면 졌지 귀족들과 왕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보다 결코 낮지 않아.”
막시밀리안은 탁자에 미리 놓아둔 물 한잔을 목 뒤로 넘겨 건조한 목을 축이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기욤이라는 자가 그러더군. 앞으로는 ‘시민의 시대’가 올 거라고. 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카를.
최소한 시민들 중 일부는 이번 프랑스의 사례로 인해 자신들이 가진 힘을 자각했을 것이고, 그 자들을 시작으로 시민들의 힘은 순식간에 전 제국의 귀족들을 합한 것 보다 커질 테지.“
“그래서 그 변화를 선도하시겠다는 건가요?”
“물론! 루이 16세와 루이 17세를 보거라. 시대의 변화를 거부한 루이 16세는 퇴위당해 루이 오귀스트가 되었고,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선도한 오를레앙은 루이 17세가 되지 않았느냐.”
“···저도 일부분 삼촌의 의견에 동의합니다만, 방향성은 조금 다른 것 같군요.”
“그래? 네 의견은 무엇이냐?”
“삼촌께서 그렇게 하신다 한들, 제국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지?”
“간단합니다, 모두를 아우를 군사력이 없으니까.”
“···.”
“제국은 누더기 헝겊으로 짠 인형입니다. 아무리 그 위에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힌다 해도, 누더기 헝겊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러니 군대가 먼저입니다. 구태의연한 제국의 군대를, 강력하고 단결된 신식 군대로 편성하여 인형을 다시 재봉한다면, 제국 내부의 불만을 모두 밀어낼 수 있을 겁니다. 시민들의 행동은 그 뒤를 따르게 되어도 늦지 않아요.”
침묵하는 삼촌의 모습에, 조카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프리드리히는 군대로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우리 제국이라고 못할 것 없지요. 군의 장교진이 계몽된다면 그 뒤는 병사, 병사가 계몽된다면 그 뒤로 시민. 마치 파도처럼 나아가야합니다. 다른 언어를 쓰되, 적어도 제국군은 전 국토에 퍼져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 외에 이 넓고 산산이 쪼개진 제국을 동시에 계몽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군의 개혁 전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테냐. 카를.”
“글쎄요. 내일 아침이면 알게 되실 것 같습니다만.”
“너 지금 제국민들을 총칼로 밀어버리겠다는 거냐?!”
“아니요. 제국민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있는 구태의연한 쓰레기들을 향한 선전포고입니다. 언제든지 당신들을 치울 수 있다는 선전포고.”
“뭐?”
“제가 끌고 온 연대는, 제가 피렌체에 있을 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인, 프로이센 식 훈련을 통해 육성한 부대입니다. 아버지가 귀족 놈들에게 당근을 던져주며 제국을 유지시키신다면, 전 채찍이 되어 제국을 지탱하렵니다.”
“···네가 만약 우리 본 시민들을 총칼로 해하려 한다면, 가족에서 벗어나 나 또한 이곳의 제후로서 맞설 수밖에 없는 것 알고 있느냐.”
“오히려 그 점이 다행 아닙니까. 제게 성역이 없다는 걸로 보일 테니 말입니다. 그러면 좋은 밤 되십시오, 삼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삼촌을 자리에 앉혀 둔 채로, 카를 대공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