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그런데 다른 곳은 안전한가? (2) (88/341)

그런데 다른 곳은 안전한가? (2)

1790년 3월 초.

주재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대사관.

외교관의 덕목은 무엇일까.

자국과 타국을 사이좋게 중재하는 언변?

뭐. 물론 그것도 외교관의 덕목이 맞기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추궁 받던 눈 딱 뜨고 버틸 수 있는 철면피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눈앞에서 분노한 독일인이 이를 박박 갈며 따지는 모습에도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마크 마리 대사는 실로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걸 맞는 사람이리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기욤 재무총감은 그저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한 것일 뿐,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시민들을 선동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보시오, 대사!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독일인은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육십 줄에 가까워져 생겨난 그의 팔자 주름이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독일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대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니요. 우리 프랑스인 중 누가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길 했습니까, 아니면 일말의 불순한 행동이라도 보인 적 있습니까? 우리 프랑스인들은 별 소란도 일으키지 않고 귀국길에 오른 것인데, 그 대열에 제국의 부랑자들이 뛰어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오히려 성을 내야 하는 건 우리 프랑스 쪽 아닌가 싶습니다만?”

“···뭐요?”

“제게는 애초에 이번 일이 신성로마제국 초병들의 경계근무 태도 불량과 군기문란으로 일어난 일로 보이는 것은 물론이요. 그 부랑자 중 누군가 무기를 소지하고 우리 프랑스인을 저격할 수도 있었던 일 아닐는지.

어떻게 보면 우리 프랑스로서는 민감한 사항을 동맹국인 귀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원만하게 끝낸 것 아닙니까?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이렇게 대사관에까지 찾아오시다니, 외교관으로서 굉장히 불편하군요.”

“···이번 일은 기억해 두겠소이다, 대사.”

“···부디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님.”

험상궂은 사각턱 독일인을 돌려보내고서, 마크 마리 대사는 사무실 의자에 힘을 쭉 빼고 기대며 못해 먹겠다는 듯 말했다.

“···젠장할, 재무총감 그 자 미친 것 아닌가?! 갑자기 이렇게 어마어마한 폭탄을 던져놓고 홀라당 자기 혼자 귀국해버리면 우리 외교관들 보고 어쩌자는 거야?”

젊은 혈기가 두고 간 이 난장판을 수습하기엔 마크 마리 자신은 이미 젊음을 한참 지난 중년의 나이었다.

***

“공작 각하,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잘 풀리긴, 시치미만 떼더구만.”

대사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자신을 향해 부동자세로 묻는 장교의 말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답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쩌시렵니까?”

“어쩌긴, 이제 그만 빈에서 뜨고 프로이센으로 귀국해야하지 않겠나. 대충 제국 놈들 비위 좀 맞춰 주다가 카이저 선출 후 귀국하려 했는데, 이러면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하,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기욤 그 작자처럼 도망가는 것 같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장교에게 말했다.

쓰으읍.

후우.

희끄무레한 연기가, 공작의 사각턱을 지나 공중으로 뿌연 안개를 만들며 하늘하늘 날아갔다.

담배연기가 하늘로 모두 사라지고 나자, 장교는 공작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지만 제국의 제후들이 눈초리를 주지 않을까요?”

“쯧. 외삼촌, 프리드리히 대왕께서 살아계실 적엔 찍소리도 못 내던 쓰레기들이, 어디서 굴러먹던 뚱보새끼가 왕이 되고 나선 우리 프로이센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있으니 원. 젠장, 차라리 그때 대왕께 건의해서 빈까지 군대를 몰고 가 다 밀어버릴 것을.”

공작은 얼굴을 구기면서 입을 열었다.

물론 현실성은 턱도 없는 소리지만 오스트리아 놈들의 뒤치다꺼리도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인 프로이센 인들로서는 밥 먹듯이 하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리드리히 대왕 생전에는 어딜 감히 신성로마제국 턱돌이 놈들 따위가 프로이센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었겠는가.

신성로마제국, 아니 그게 무슨 제국인지. 카이저가 제 맘대로 하지도 못하는 게 무슨 제국? 차라리 제국 조무사겠지.

아무튼 그 조무사 놈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세상을 뜨자, 마치 제 세상인 것 마냥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원래 하나’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어떻게 해서든 제놈들 밑으로 프로이센을 넣으려 발광하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프랑스인들을 접견한 것도, 우리 프로이센 인들을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억지로 쑤셔 넣고 싶어 하는 제국 놈들 때문에 억지로 맡은 거 아닌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이프를 다시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말했다.

뭐만 하면 격식이니 뭐니, 예법이니 뭐니.

귀족이랍시고 떵떵거리는 턱돌이들 입장에서는 프로이센 인에게 명예로운 일을 시켜준 거니 ‘감사하십시오, 촌놈.’이라며 자화자찬하겠지만, 정작 뼈 속까지 실용주의로 가득 찬 프로이센 인 입장에서는 그만한 똥폼도 없어 보였다.

아니, 차라리 그런 비효율적인 걸 따질 시간에 시간을 갈아 넣으면 넣을수록 복사가 되는 작물인 감자 한 알이라도 더 수확할 방법을 찾는 게 더 실용적이지 않나?

하여간 오스트리아 얼간이들이란.

“···앞으로 한 동안 신성로마제국이 시끄러워질 것 같은 기분이군. 프리드리히 대왕께서 마련하신 강토를 탄탄하게 안정시키고 다져놔야 하는 상황에, 바깥 일 때문에 귀찮게 됐어. 제국이 혼란하면 프로이센에도 불똥이 튀기 마련인데...”

현재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복속시킨 땅을 개간하여 왕국의 온전한 강역으로 만들기 여념이 없는 상태다.

사람이 밥을 먹으면 소화를 하듯, 국가도 영토를 먹으면 소화가 필요하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자국민으로 동화 시켜야 하고, 여의치 않으면 사람들을 이주시켜서라도 완전한 프로이센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은 각종 관직과 관공서도 만들어 새로 사람들을 뽑고 통치를 안정화해야 하고.

마지막은... 뭐, 감자를 심고 또 심어 사람들을 불려야지,

그리고 많아진 사람들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폴란드를 공격하면 끝!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이 안정화 되고 그런 안정기를 틈타 소화를 끝내려했는데, 이것 참 큰 낭패를 볼 수도 있겠다 싶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었다.

그런 공작의 마음을 읽은 듯, 장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프로이센 남쪽, 제국과의 국경에 군을 배치할까요?”

“아니, 굳이 뭐.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1개 연대만 상시 출동 가능하게 대기시켜 놓게.”

“예, 공작 각하.”

장교는 공작의 명에 군례를 올리며 답했다.

***

1790년 4월 중순

신성로마제국 퀼른 제후국, 본.

“와아, 빈은 진짜 어마어마하구나.”

한 평생 고향 본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동생들을 옆에 낀 채,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루트비히는 산책 겸 본 시내를 걸으며 빈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프랑스 재상도 형을 모셔가려고 안간힘을 쓰다니... 형 이러다가 하이든 선생 같이 유명해지는 거 아니야?”

“하...하하 그런가...?”

물론 어딘가 조금씩 살을 붙여 본래 있었던 일보다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뭐 어떤가. 재밌으면 됐지.

“형,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어? 아, 저 사람들?”

루트비히는 둘째 동생 요한의 손끝에 자리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더니,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 아버지는 그렇게 말 안하던데.”

“야, 그 술주정뱅이 성격파탄자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루트비히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듣자, 얼굴을 팍 구기면서 동생들에게 말했다.

수도 빈에서 ‘그’ 일이 있고난 뒤, 본 시내 곳곳에는 프랑스 국민의원들을 따라 검은 정장을 맞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쌍두독수리가 그려진 제국의 깃발과 붉은 깃발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본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들도 그저 뒷짐을 지고 그 광경을 구경만 할 뿐이지. 딱히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본의 시민운동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시민 여러분! 우리도 프랑스인들처럼 할 수 있습니다! 봉건제라는 구시대의 잔재를 이제 모두 쓸어버립시다! 신성로마제국 만세! 시민 만세!”

“빌헬름 재무총감이 말했던 걸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왜 우리는 허름한 오두막에서 살고, 귀족이라는 작자들은 호화찬란한 저택에서 산단 말입니까!? 겨우 태어난 요람이 다르다고 이런 차이가 나는 게 말이 됩니까!”

“일어나시오, 당신도!”

“““본 시민 만세! 와아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본의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만세!’를 외칠 것이 분명했다.

그 날 전까지는 말이다.

***

1790년 4월 말.

신성로마제국 수도 빈, 라이히스탁 제국의회.

“···따라서, 나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는. 차기 카이저로서의 권한을 미리 발동시켜, 본과 프랑크푸르트에 준동하는 일련의 폭도들을 진압할 수 있는 법안을 의회가 통과시켜 주길 바라는 바요.”

라이히스탁 제국의회.

프랑스의 국민의회와는 달리 제후들과 주교 같은 귀족들만이 출입하고 의결할 수 있는 이곳, 제국의회의 한 가운데서 차기 카이저 레오폴트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레오폴트! 레오폴트!”

“카이저 폐하, 만세! 카이저 폐하, 만세!”

“한시바삐, 역도들을 잡아 죽여야 합니다! 신성로마제국 만세! 제국의회 만세!”

“지금 제국민들을 학살하겠다는 겁니까!”

“제후국의 시민들을 진압하겠다는 건, 제후국의 권리를 짓밟는 거나 마찬가지요!”

“카이저, 당장 말을 철회하지 않으면 우리 백국은 당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소!”

계몽주의자와 전제주의자.

그 밖에도 이해관계에 얽힌 수십, 수백의 귀족들이 너도나도 일어나 제 하고 싶은 말을 외쳐대는 가운데.

“개표 결과. 차기 카이저, 레오폴트 대공의 권한을 임시로 미리 부여하는 법안을 가결하는 바입니다.”

라이히스탁 제국의회에서 레오폴트의 손이 올라가고 말았다.

“외스터라이히 공작, 카를 루트비히 요한 요제프 로렌츠와 요제프 라데츠키 신성로마제국 육군 준장은 진압군을 이끌고 본과 기타 도시에 있는 역도를 소탕하도록.”

“카이저의 명령, 받들겠나이다.”

“카이저의 명령, 받들겠나이다.”

레오폴트의 명을 받은 두 사람은,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나와 말에 올랐다.

“황자 전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황자인 카를 대공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육군 준장 라데츠키는 말했다.

“글쎄요, 라데츠키 장군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물론, 간질이 많이 완화되시긴 하셨습니다만. 전장은 여타 다른 곳과는 다릅니다, 황자 전하.”

씨익 웃으며 대꾸하는 카를 대공의 모습에도, 스물넷의 젊은 나이지만 두 번의 전쟁을 겪은 라데츠키는 걱정스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자, 가자! 본으로! 전군 나를 따른다!"

카를 대공은 그러거나 말거나 말 고삐를 힘차게 위아래로 요동치며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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